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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연인들 ㅣ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3
장 타르디유 지음, 이선형 옮김 / 월인 / 2003년 5월
평점 :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을 이루는 쥐라산맥의 작은 마을에서 화가 아버지 빅토르와 음악가 어머니 카롤린 사이의 외아들로 1903년에 태어난 장 타르디유는 일찌감치 영재의 기질을 발휘해 10대 초반부터 후기 인상주의의 취향에 젖어 있었다고 하는데, 10대 초반이라, 이건 못 믿겠다. 점점 자라 29년,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당시엔 프랑스도 의무복무가 있어서 그것도 때울 겸,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베트남에서 미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도 만날 겸해 인도차이나에 지원해 갔다가 현지의 젊은 혁명 시인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3주간 더위 속에서 감방 생활을 했단다. 그러나 그곳에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할 한 살 위의 생물학을 전공하는 여인 마리-로르 블로를 만나 프랑스에 돌아와서 결혼하기에 이르니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듯. 더구나 베트남까지 가서 어려운 시절에 만난 평생의 배필이 배우기도 잘 배우고 세상에나, 아름답기까지 하다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나 그래.
193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이후 극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라디오 극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한편, 1950년대 이후 부조리극 계열의 작품을 발표한다. <지하철의 연인들>도 이 가운데 하나다. 이후 1990년까지 계속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95년, 92년간 한평생 잘 먹고 잘살다가, 63년 동안 해로한 93세의 아름다운 아내가 지켜보는 침상 위에서 숟가락 놓으니, 거 참, 세상에 이이처럼 팔자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지하철의 연인들>은 역시 부조리극. 부조리극이라면 1950년대부터 대략 10여 년 동안 유행했던 전위 연극을 말한다. 흔히 반연극反演劇, 아방가르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부조리, 라는 어원을 따지는 골치 아픈 이야기 대신 한마디로 하자면, 기존의 연극 문법을 타파하려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라고 할 수 있겠다.
등장인물을 보면, 연인들이라고 했으니 일단 주인공 비슷한 연인들, 그녀와 그이가 나오고, 23명이나 되는 무명의 승객들이 출연하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은 마네킹이다. 물론 23명이 다 필요한 건 아니다. 최하 남자 셋, 여자 두 명이 분장과 목소리의 변화를 통해 대신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는 역할은, 첫 번째 평범한 남자, 두 번째 평범한 남자, 성격이 급한 부인, 다리를 저는 남자, 잘난 체하는 신사, 애교스런 여자친구, 책 읽는 사제, 책 읽는 비 신앙인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첫 번째 우아한 여자 외국인과 두 번째 우아한 여자 외국인, 그리고 성별이 분명하지 않지만 남자인 것처럼 보이는 통역사다.
지하철. 대도시의 상징이다. 한때 세상의 수도였던 파리에서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인 지하철. 사람은 끓어 넘치게 많지만, 역사 이래 어느 때보다도 인간의 소외와 개별화, 파편화가 가속화되어 오히려 더 많은 인파 속에서 대화와 소통은 단절된다. 1막인 플랫폼에서 두 명의 우아한 여자 외국인이 등장해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을 조금만 인용해보자.
첫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아마 마히, 파하 「파리」?
두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파리」란 단어를 이해하고는) 오 파리, 구쉬, 구쉬, 파리!
첫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우유 메-후이?
두 번째 우아한 외국여자 : (이해하지 못한다) 파 콥, 파 코피, 포톡!
여기에 통역사가 등장해 첫 번째와 두 번째 여자의 언어를 통역하지만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이들의 국어를 사용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플랫폼에 아무리 많이 몰려 있어도, 무수한 사람들의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는 장 타르디유가 듣기에 외국 여자 두 명의 대사와 같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모르겠고,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2막은 객차 안이다.
객차 왼편과 오른편 끝에는 연인, 여자와 남자가 서 있고, 이들 사이에 다섯 명과 기둥서방 역을 하는 마네킹이 서 있다. 객차는 그나마 플랫폼과 달리 사람들 전체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만드는 물리력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출발, 정지, 가속, 회전에 따라 승객들의 몸이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기는 하니까.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외부 힘일 뿐으로, 같은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같은 속도로 자전하는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탑승한 나와 당신의 어깨 위를 누르는 공기, 코끼리 다섯 마리 무게의 압력과도 같은 것이다. 즉, 2차 세계대전 같은 거대한 사고가 나지 않는 한 별로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없다는 말씀.
다섯 명은 각각 신문을 즐겨 읽는 사람, 감정이 상한 도발적인 부인, 이해심이 많은 배관공, 스타를 꿈꾸는 공주병 아가씨,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인데, 남자와 여자는 전혀 의미 없는 대화를 남발하고, 연인끼리의 의사소통은 자기주장을 쪽지에 써서 사람들이 전해주는 형태다. 남자가 옆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자리를 바꿔가며 한 칸씩 연인 곁으로 가지만 결코 의미 있는 대화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결국 그녀와 그이가 상봉을 해 드라마는 해피엔드로 끝나긴 한다.
여기에 프랑스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타르디유 표 말장난이 눈부시게 나온다는데, 불어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나는 조금도 알지 못하니 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역자는 그런 크레센도, 데크레센도 같은 음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안타깝다고는 하지만 어쩌랴, 그게 왜 안타까운지도 모르는 독자 입장에서는 말이지. 번역서를 읽으며 완전히 다 만족할 수 있나. 다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