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기에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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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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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는 유교적 가르침을 숭상하는 국가였다. 효와 충와 같은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근본으로한 이 체계는 예의와 같은 포장지로 잘 싸여져 겉으로 보기에는 군더더기 없는 상품과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정된 자원을 소수의 기득권이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의미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억압을 숨김으로서 안정적인 사회를 만드는 목적이 숨어있었다. 


 이 책은 가족 안에 숨어있는 억압적인 구조에 대해 밝힌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으로 구성되어야할 가족 안에 숨겨진 권력구조와 욕망을 파해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처첩제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적자와 서자의 구조는 그 시대의 가족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였다. 처는 권력이 있었으나 사랑받지 못했고, 첩은 사랑받았으나 대를 잇지 못했다. 높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욕망과 육체적인 욕망이 두개로 나뉘어 처와 첩에게 투영되었다. 분리된 두개의 자아 처첩으로 대응되어 끈임없는 갈등을 겪었고 그 두개를 동시에 취하기 위한 처와 첩의 보이지 않는 다툼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홍계월전, 옥루몽)


 여기서 태어난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화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의 자식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실망을 느꼈을 것이고, 첩의 자식들 역시 첫째 부인에게 억압받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면서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흐르는 적자와 서자의 수직적 위계는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시키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의 왜곡된 자아는 유교의 충이나 효와 같은 가치로 표면적으로는 봉합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갈등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의 불합리와 수직구조를 체화했다면, 이들은 사회에서 어떠한 행동양식을 보여왔을까. (홍길동전)

 

 권력을 가진 이는 처첩을 두고 이를 통해 왜곡된 가족관계를 만들어냈다면, 일반 서민들 다른 방식으로 왜곡된 가족관계를 만들어냈다. 원앙새 한쌍과 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남존여비를 기반으로한 유교사상은 서로 소통하는 가족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가부장 중심의 작은 독재사회를 만들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지금도 내려오는 부모님과는 겸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가부장제의 수직적 위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의 권한에 따라 온 가족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흥부전, 쥐 변신 설화, 옹고집전)

 

 한편, 일찍이 과부가 된 여성들은 재가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평생을 살아가야했다.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양반의 숫자를 제한해야했기에 과부들이 재혼한다는 것은 양반의 숫자를 늘리는 일이고, 과부의 재혼은 국가적으로 억압당했다. (열녀함양박씨전)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 땅이 아닌 상상의 나라에서 실현되거나 혹은 실패하게된다. (홍길동전, 최고운전)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그들이라고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족구성원간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토록 억압적인 가부장제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체계가 유지된 것은 그래도 부모가 자식을,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가끔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부모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여우누이, 심청전)


  어디선가 재미있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실은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이중적인 행동과 약자에 대한 억압이 드러난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만 여겨지던 전래동화가 실은 이면에 감추어진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가족 기담>이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눈앞에서 선혈이 낭자하는 B급 공포영화의 소름끼침이라기보다, 김기덕의 영화와 같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가감없이 보여주기에 느껴지는 공포스러움에 가까웠다. 아니,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현실에 대한 이면의 것을 알게 되었을때 느껴지는 무기력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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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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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꿈꾸던 사람들은 적어도 이상향이란 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삶에서, 또 사회에서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핵심에는 마르크스 사상이 있고, 이를 이어받은 러시아 혁명가들로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혁명은 직접적으로 반세기 동안 세계사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이상적인 목표을 가진 체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일단 개인의 이기심을 극대화하자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목적부터가 노동자(크게 보면 인간)해방 아니겠는가. 노동자(인간)의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체제를 뒤엎고 누구나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목표 자체는 오늘날에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숭고한 이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목표에도 불구하고 왜 사멸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구조에서 조금은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 

 급진적인 변화를 통해 권력을 잡은 소련의 볼세비키당은 소수의 인원으로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권력의 피라미드와 같은 이 방법론은 하나의 꼭지점에서 시작되는 일방향적인 억압구조로 이루어져있다. 공산주의 국가 자체를 보면 그 곳엔 언제나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자가 존재했고, 이것은 소련과 그 명령에 따르는 위성국가와 같은 국가적 수직관계로 확장된다. 

  이러한 구조의 전제에는 엘리트 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독단이 숨겨져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엘리트가 주도적으로 국가를 움직여야만 궁극적인 평등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가 이 땅에 더 빨리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남들보다 조금 더 공부하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에 빠진다.) 노동자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시스템이 오히려 엘리트와 민중을 구분함으로, 엘리트의 정책을 일방향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또 다른 억압체계가 생겨난 것이다. 가장 평등한 국가를 만들고자한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형태의 불평등 구조를 양산해냈다.

 불평등 구조에 저항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강하게 억압되자 사람들은 이중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생존할 수 있는 말을 택했으며, 또 생존을 위해 서로를 밀고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체제에 빠짐없이 존재하는 노동 수용소는 말살된 인간의 자율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 외에 다른 의견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계는 고인 물처럼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제 계획이 시도되었으나, 목표량은 인간의 자율성과 이기심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채워지지 않았고, 그결과 관리자들은 달성량을 조작해야했다. 그것이 상부에 보고되었고,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단지 지표상의 숫자에 불과했다. 물론 과학 및 군사 기술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는 소비재는 조악했으며 그나마도 물량부족에 허덕였다. 

 공산주의 국가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0년대 말, 개혁을 추구했지만 억압이라는 고삐를 풀어버린 공산주의는 각자의 길을 가려는 개인을 통제하지 못했다. 개인의 발언권과 자율성이 주어지자 사회는 통제되지 않는 상태로 빠져버렸다. 억압체제를 유지하지 못하는 공산주의는 결국 내부로 부터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자율성과 공산주의의 독단은 양립하지 못하는 물과 기름과 같았던 것이다.

 이상적인 목표만 존재했던 공산주의 체제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오른 오만가지의 생각 중에 지금까지도 남은 몇가지 질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0. 어떻게 하면 노동에서 의미를 찾고 노동자가 소외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1.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2. 추상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정책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3. 어떠한 선의의 목적을 위해 - 이를테면 경제발전 혹은 인간해방 - 일시적인 독재체제가 가능한가.
4. 개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과 효율적인 목표추구 - 이를테면 경제개발 - 는 양립 가능한 것인가.
5. 민중에게 더 큰 자율성을 부과했던 고르바초프가 경제적 위기로 신임을 잃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6.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은 무엇인가. 급진적인 변화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7. 경제를 성장시킬수 있다면 어떠한 억압적인 사회체계도 용납될 수 있는가. (중국의 예)
8. 독재적 억압체계는 무너진다는 역사를 통해 북한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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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쿨 자고 있는 숲속의 공주를 깨운건 백마탄 왕자가아니라 한마리의 왱왱거리는 모기였다고 한다. 짜증을 내며 모기를 잡아 죽이고 왕자님을 기다리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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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가 과연 인류의 아편에 불과한가? 모택동의 발언은 공산주의의 불길이 세상을 휩쓸던 시대적 상황에서는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에까지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이성에 따른 합리적인 계획이라는 미명아래 자행된 공산주의 독재체계의 해악과 실패라는 과거를 굳이 꺼내들지 않더라도 종교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게 만들고 반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가 가진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들-이성,지성,감각등-이 그 자체로 얼마나 한계가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나 인간이 이성이라는 도구로 남들 위에 서는 것을 얼마나 정당화해 왔는지는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종교적인 성찰이 가능한 인간이라면, 타인을 소통의 대상으로 여길뿐 억압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어떠한 인간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적 가르침도 타인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 교리는 없다. 기독교의 원리는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 예수를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데 있으며, 불교 역시 인연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에게 선의를 배풀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자. 특히나 오늘날과 같이 돈으로 모든 가치가 일원화되어 가는 사회일수록 종교의 의미는 다시금 커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의미를 찾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종교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2. 오래간만에 교회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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