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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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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게되고, 그것이 확장되어 국가가 형성된다. 국가라는 틀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시대 초월해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통해 국가 형성의 기반인 정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올바른 지도자상과 국가 체제를 그려낸다. 자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에 쓰여진 책 이지만 인간사회에 내제된 보편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고전이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국가>를 읽는 동안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졌다. 

 20세기 대한민국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 이후 한반도는 감격적인 해방을 맞이한다. 그러나 타인의 힘을 빌어 얻은 독립은 절름발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해방 후에도 친일 행위에 적극 협력했던 이들이 국가의 경영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들은 6.25전쟁과 반공을 국시로 삼아 스스로를 (자유)민주주의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친일이라는 맨 얼굴을 반공의 가면으로 가린 그 누군가는 군부의 힘으로 권력을 얻기에 이른다. 독재자는 경제적 성장과 같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대상을 교묘히 제거해갔다. 언론을 통제하거나 혹은 입맛에 맞는 언론을 살아남게끔하는 정책은 불의를 정의로 탈바꿈시키는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를 이어받은 정권 역시 5.18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이 참여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붙이는 일련의 행위들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6월 항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러한 사슬을 끊을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러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역사의 흐름은 한순간에 고쳐지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평화적 민간이양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5월이 광주에서 민간인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게엄군 사령관이었다. 반공과 안보의 승리였으나 이는 곧 불의의 승리이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

 2,500여년전 그리스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면서 스파르타에 의해 30인의 참주가 지배하는 정부가 세워지게 된다. 민주정을 택하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은 참정권을 박탈당했으며, 더 나아가 참주들은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다행이도 아테네의 세력이 회복되면서 참주들은 축출당하고 아테네는 민주제로 복귀하게되지만, 오늘날과 같은 삼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라기보다는 중우정치에 가까웠던 아테네의 민주제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만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이성과 정의가 비이성과 불의에 패배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의가 정의를 대체하는 세상에서 지식인들이 행동할 수 있는 양식은 두가지였다. 지극히 현실주의자가 되어 상황을 옹호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은 이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소피스트들은 전자에 해당했으며, 상대주의적이며 회의주의적인 논변을 펼쳤다. 3.1운동이 좌절되자 항일운동에서 노선을 바꾸어 국민개조론을 주장했던 친일 지식인들처럼 말이다. 소피스트들은 불의를 정의로 포장해 이득을 취하는 삶이 오히려 정의를 지키려다가 손해는 삶보다 나은 것이라는 논지를 펼친다. 심지어 불의야말로 궁극적인 정의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이러한 소피스트의 논지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아무래도 권력자들이 불의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국가>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으며, 이런 것들을 지켜나갈때 이상적인 국가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체가 욕망에 지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긴 소크라테스는 이와 유사하게 이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지배자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을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정치체제로 묘사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그리던, 혹은 플라톤 자신이 추구하던 국가의 이상향을 이와 같은 철인정치로 정의한다. 폭정을 가져온 참주제와 스승을 죽음으로 몰고간 민주제에 대해 플라톤은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참주제는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것으로, 민주제는 자유를 넘어선 방종에 가까운 체제로 기술된다.

 친일이 반공으로 탈바꿈하는 상황이나, 군사 독재가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현상, 스파르타에 의해 세워진 참주제가 체제를 유지하기위해 시민들을 탄압하는 것, 중우정치에 빠진 민주제가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과 같은 사건들은 현실에 정의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의야말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철인정치를 통해 국가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믿었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가지는 의미는 공동체 형성에 기반이되는 신뢰를 회복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관점이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상호 신뢰를 통한 안정적인 국가 체계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식의 상대성을 주장하기되면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기위한 '기준'이 사라지는데, 이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보다는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에서 포퍼의 지적처럼, 철학자들도 인간인 이상 실수할 수가 있을 뿐만아니라, 만약 실수하게 된다면 그에대한 비판과 개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철인정치의 체제가 소크라테스의 이상과 같이 운영될지는 미지수이다. 자신들만이 유일한 정의라고 믿었기에 체제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던 공산주의가 소멸한 것과 같은 종류의 문제를 내포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국가의 방향성은 시민들 스스로가 결정해야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의 선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져버린다면, 시민들은 판단력을 상실하고 그것은 아테네의 중우정치와 다를바가 없어지고 만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비록 시작은 온전하지 못했만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선거를 통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수준높은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독재권력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명확한 지향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이를테면 오늘날 이슈가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같은 거대 자본의 논리는 효용성을 중시한 나머지 인간성을 말살하는 문제점을 만들어 냈지만, 우리나라의 대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규모의 경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대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한가지만을 고려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의 철인정치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바로 민주국가 시민 개개인이 지성과 책임감을 가진 철학자와 같이 되는 것이다. 같은 민주주의 체제를 가지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나라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는 곳이 있다. 같은 전술을 사용한다고 가정할때, 일류의 축구팀과 동네축구팀을 구분하는 것은 결국 선수 개개인의 기량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체제 역시 그 체제 자체가 잘 설계되어야하는 것은 자명하며 더 나아가 개개인들이  그 체제를 운영하기에 적합할만큼 높은 수준을 가져야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한 부분만 덧붙이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기존의 <국가>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맥락이나 의미 등이 가다듬어져 정말 읽기 쉽게 번역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번역자가 원전을 언어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500년전 그리스, 그리고 라틴어라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번역을 독자에게 선물한 천병희 선생님께 경의를 표하며 여러모로 부족한 <국가>의 읽고 쓰기를 마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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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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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뉴욕의 MoMa(Museum of Modern Art)에서는 해체주의자 건축 (Deconstructivist Architecture)라는 제목으로 프랑크 게리, 다니엘 리베스킨트, 렘콜하스, 피터아이젠만, 자하하디드, 쿱 힘멜브라우 그리고 버나드 츄미가 참여한 전시회가 열렸다. (해체주의에 대한 이미지 및 정보)


 1980년대는 합리와 이성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때였다. 그도 그런 것이, 효율성과 합리성을 내세웠던 도시계획이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슬럼화되는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콘크리트와 철골 그리고 유리로 대표되던 현대 건축물이 지역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대량으로 증식되어 각국의 도시들은 그 특유의 매력을 잃어갔다.


 합리성을 넘어선 복잡성, 사각의 그리드 내에서의 형태적 구속을 넘어서는 방법론을 찾기 위해 건축가들은 건축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합리성이나 형태적 구속을 뛰어넘기 위한 근거가 필요했고 그래서 철학과 손을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내 자신이 그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젊은 건축가들이 선택한 '정치적'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190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르 꼬르뷔제같은 현대 건축 거장들은 철학적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오히려 건축 그 자체였는데, 이를테면 자유로운 평면과 입면 혹은 건축적 산책로 같은 것이었다.  조금 더 후대 사람이었던 루이스 칸 역시 servant-served(보조하는-보조받는) space라는 용어를 사용해 그의 관심이 건축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확인 시켜주었다.


 이런 현대 건축 거장들의 접근과는 달리, 후대 건축가들은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철학적 용어에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이른바 해체라 불리는 철학적 방법론은 언어의 의미는 고정적이지 않고 변화한다는 논지를 끝까지 발전시켜, 중심의 해체, 주체성의 해체와 같은 이슈를 만들어 냈다. 이는 이항분리적이고 수직구조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 - 이를테면 합리성을 숭배하면서 만들어내는 독선적인 태도,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 나아가서는 국가간의 억압 등- 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고, 합리성이라는 틀에 갖혀버린 건축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면서 이러한 개념들을 차용했다.     


 결과론적으로 해체주의적 건축은 어떠한 측면에서는 성공하기도, 다른 측면에서는 실패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현상은 2000년대에 미국 부동산 경기가 거품 효과로 인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 처럼 보였을때, 이런 해체주의적인 건물들이 제법 많이 지어지고 계획되었다는 것이다. 거품이 꺼지고 불경기가 찾아왔을때, 사각의 틀에서 벗어난 해체주의적 건물을 짓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외관이나 형태 그 자체를 해체하는 방법론은 결국 경제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건축 공간에서 위계의 해체라는 방법을 통해 새롭게 떠오른 주제도 있었다. 이른바 탈중심성이라고 부르는 이 주제는, 좀 더 열려있기를 원하고 또 상호간의 소통이 필요한 공간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SANAA에게 프리츠커상(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을 안겨준 롤렉스 러닝센터는 공간적으로 열려있으며 또 이용자들의 소통을 유발하는 탈중심적 건물의 예가 될 수 있겠다. (롤렉스 러닝 센터 / 롤렉스 러닝 센터 관련 설명 및 이미지 / 탈중심성의 또 다른 예)


 이러한 1990년대에 해체주의와 함께 건축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그러나 이제는 조금은 퇴색한 듯한) 철학에 대한 관심을 지적하면서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밝힌다. 자신들의 형태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철학적 용어의 남용을 막고, 건축가나 학생들에게 논리를 기반으로한 철학적 접근은 무엇이며, 또 철학의 담론이 건축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책은 명확한 독자를 염두해두고 쓰여졌다. '독자들 - 건축가, 건축 실무자, 학생 - 에게 설계 작업에서 맞닥뜨리는 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힌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교양으로 철학과 건축을 접하기에는 조금은 난해할수도 있겠다. 건축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실체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에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는 철학이 건축과 어떠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보편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 되려면 풍부한 시각적인 도판이 첨부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건축과 철학의 관련성을 통시적이며 또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전문 지식의 분업화가 완전히 정착된 오늘날에 두 분야에 대해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추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과 철학의 관계를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내는 여정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이 주는 의미는 충분하리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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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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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책을 읽으며 경외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저자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고 이 책이 딱 그런 경우였다. 백과사전 식으로 지식을 나열하는 일과는 달리 통찰력이라는 바늘을 가지고 그 구슬들을 꿰어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통찰이 이시대의 문제를 적절하게 설명하고 나아가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성까지 제시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인 것이다.


사회 문제의 해결 방안은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가 발생하는 구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범죄가 발생했을때 처벌을 강화함으로 범죄를 방지하려는 입장은 첫번째 경우에 해당하고, 사회 구조에서 범죄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것은 두번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째서 이토록 힘을 잃어가고 있는지에대해 밝히고 있으며 문제가 발생하는 구조 자체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에 관점에서 투표율 저하로 대표되는 정치에 관한 무관심은 단지 개개인의 의식 저하에서만 오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체계가 이백여년 넘게 정착되어오면서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에 가까운 것이다.

시민의 참여가 줄어들게된 구조적 원인 중에 하나는 시민과 국가가 서로의 밀접하게 이익을 주고 받았던 상호 관계가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국가 형성 초기에는 참정권의 획득은 자신의 이권 확보하는 수단이었고 시민들은 이를 얻기위해 국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된다. 국가 역시 조세와 군역을 확보하기 위해 시민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그러한 협력을 확보하는 만큼 시민들에게 권력을 이양하게되는데 그것이 바로 선거권의 부여라고 할 수 있었다. 어렵게 얻어낸 선거권이었을 뿐만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장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던만큼 높은 수준의 참여도를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아가 국가와 시민은 이익을 교환하는 관계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동기로 상호 의존하는 관계였다. 순수한 애국심으로 인한 참여를 빼놓을수 없는데 이는 두차례의 세계대전에서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전과 적극적인 국채의 구입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참여가 없이도 국가의 체제가 작동되게끔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치뤄낸 독립전쟁와 두차례의 세계 대전과는 달리 9.11과 (이른바) 대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지금껏 해왔던 것 처럼 꾸준히 소비하라고 독려한다. 이제는 국가와 시민이 이권의 교환이나 애국적인 희생이 필요한 관계에서 지속적인 소비와 세수의 확보를 위한 관계로 변화한 것이다.

 한편 정부가 시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정책상 우위를 선점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 것도 시민들을 정치에서 괴리시키는 결과를 낳든다. 이를테면 사법부나 군부 혹은 연구기관을 포섭하는 일은 대중들의 도움 없이도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데에 필수적인 것이 된다. 특히나 2005년 미국 대선의 결과는 사법기관을 통해 판가름 나게 되었는데 이는 선거만큼이나 사법부가 대통령 선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선거에 있어서 시민들의 영햘력은 그만큼 축소된 것이다.

 비영리 단체나 노동 조합의 활성화 역시 오히려 시민들의 참여에 있어서는 악영향을 끼쳤다. 개개인과 접촉하며 민의를 모으던 정치인들은 이러한 노동 조합이나 비영리 단체들의 대표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게 되는데 이는 정부와 시민들이 멀어지게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대표성의 강화로 개개인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힘들어졌을뿐만 아니라, 재정지원을 받기 시작한 단체들이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졌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백미 중에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정치 참여 하락에 관한 상관관계에 대한 통찰이 아닐까 한다. 신자유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민영화는 관료제의 비효율성을 기업의 효율성으로 체질을 개선시킨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번 민영화된 공기업은 선거를 통해 기관의 장을 교체하거나 운영의 방향성을 바꿀수 없다는 것에 있다. 민영화된 공기업은 공공의 이익에서 벗어나 자본의 논리에 따라 운영되게 되는데 이러한 방향성을 시민들 스스로가 개선할 여지가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은 제 아무리 투표를 독려해도 높은 투표율이 나오지 않는 것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한표가 정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때 투표에 참여해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관점인 구조적인 문제 접근 방법을 유지하면서 개개인의 의식을 성장키는 것 역시 중요한 축임이 분명하다. 아무리 잘 설계된 좋은 제도라고 하더라도 구성원들의 의식에 따라 선으로 작용하기도 악으로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예를 해방시켰던 링컨 탄생시켰던 것도,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히틀러를 만들어 낸것 모두가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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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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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쓰기는 참 어렵지만 어찌보면 참 쉬운 일이기도 하다. 책이 담아내는 정보나 관점의 질이 어떻느냐 보다는 누가 썼는냐가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책을 무명의 작가가 썼더라면 얼마나 팔렸을까. 


 나는 여행기라는 장르 자체에 회의적이다.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과연 독자와 공감하는 것이 가능할까. 저자가 여행지에서 느꼈던 고조된 감정은 오히려 나에겐 거부감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 여행지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오감을 통해 느낀 여행지에서의 감동을 텍스트로 재현해내는 것이 애초에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기라는 장르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했더니 가까운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여행도 책으로 읽는 여행기보다 낫더라.'


 이 책의 특징이라면 방문지에 따라 그곳에 해당하는 역사와 사건들을 서술한다는 것이다. 여행기의 특성상 과거의 사건에 대한 교훈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며 이 책도 어김없이 그러한 규칙을 따랐다. 위키피디아를 읽는 것과 다른 점은 객관적인 사실을 기초로해 저자가 생각했던 교훈적인 측면을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회의적인 부분이 많지만 카잔차키스와 동행하는 듯한 기획은 이 책만이 가지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카잔차키스는 대립되는 두가지의 가치를 융합하여 각각의 가치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소설가였다. 카잔차키스를 여정에 동참시킨 이유는 인간적이지만 초월적인, 개방적이지만 폐쇄적인, 이성적이지만 감성적인과 같은 다양한 이항 대립적인 요소들을 통해 그리스라는 나라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저자가 10권으로 기획한 책 중에 그 첫번째 책이라고 한다. 저자의 명성에 힘입어 앞으로도 꽤나 많은 부수가 팔려나갈 것 같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를 통해 그리스의 본질을 조명한다는 컨셉을 뺀다면 이미지는 사진집만 못하고, 역사적 설명은 백과사전만 못한 애매한 여행기가 되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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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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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통섭이란 단어를 자주 듣게 된다. 학문 간의 경계를 넘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시도들이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다. 화가이자 발명가,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르네상스 시절 이후로 서양사회는 제너럴리스트 보다는 스페셜리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해왔던 것 같다. 복잡해진 학문 체계에서 나온 필연적인 현상이기는 했지만, 이는 다른 분야의 전문지식에 대해 무지한 전문가들을 낳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분기된 학문체계는 자신들의 영역을 설명하는 것에는 강점을 보이지만 통합적으로 사고해야하는 경우에는 약점을 드러내곤한다. 그러니까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으며 한사람은 코를 만지며 코끼리는 뱀이라고 하거나 한사람은 다리를 더듬으며 기둥과 같다고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 책은 과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예술가, 음악가, 철학자, 건축가, 영화감독, 언어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노엄 촘스키라던지, 미셸 공드리와 같은 어디에선가 들어봤음직할만한 각 분야의 대가들이 과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각 분야의 유명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흥미를 자극한다.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서로의 분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하고 또 자신만의 관점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과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자신들의 전문분야에서 습득한 관점을 통해 제시된 주제와 당면한 문제의식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과학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른 것을 배제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는 둥근지 평평한지 둘로 나뉘어 오랜기간동안 논쟁을 벌여왔지만, 이제는 평평한 지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평평한 지구에 대한 믿음은 그릇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으로 어떠한 분야든지간에 성역없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믿음에 대해 의심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믿음도, 언어학적인 분석도, 심리학적인 접근도 이제는 뇌과학과 함께 좀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방법으로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 그 자체가 문제 해결의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다. 과학은 객관적인 방법으로 데이타를 제시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의 방법론으로 해석을 통해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도 인간이고, 정립된 과학을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용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말이다. 


 일례로 6장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지구 온난화에 대해 우려를 다양한 방법으로 경고하고자 했던 기후학자(스티븐 슈나이더)가 등장한다. 그는 오랜 기간 연구해온 수치를 분석해 지구 온난화를 경고해왔지만,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만의 해석의 도구를 들고와 지구 온난화가 거짓이라고 선전해왔다. 두가지 입장 모두 다 설득력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 두번째 입장의 경우에는 에너지 관련 기업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접근이 있었다. 오늘날 온난화의 문제는 전지구적인 것이 되었지만, 이제는 기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고 슈나이더는 지적하고 있다. 이는 말기에 발견된 병은 비용이 크게 들어가면서도 완치 확률은 낮아지는 것과 유사하다. 과학은 이처럼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이용되기도 하기 때문에 다수결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들이 가져야하는 요건 중에 하나가 객관적인 사실과 정치적인 접근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내가 속해있는 건축 분야 역시 다양한 종류의 통섭이 진행되고 있다. 건축 자체가 철학, 경제, 역학, 미학 등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분야이기는 하지만 건축물에 더욱 다양한 가능성과 의미를 담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예를들어, 단순히 기능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건축물을 넘어서, 친환경적인 기능을 고민하는 것은 이제는 필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친환경적인 건축물에 대한 관심사는 태양광 혹은 지열을 이용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법부터 궁극적으로는 에너지 제로의 건물인 패시브 하우스를 만드는 것 혹은 도심 농장을 만들어 생태적으로 자족하는 도시에 대한 개념에까지 이른다. 


 이 책에 아쉬운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다보니 깊이 면에서 조금은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한편 패널들이 짧은 대담을 통해 서로 예의를 차리느라 치열한 토론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서로의 의견을 동감하고 또 정보를 교환하는 것에 급급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이 긍정적인 것은 어쩌면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분업화된 오늘날의 학문 체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한 '통섭'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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