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사람들이 도서관이라는 건축 유형을 만들어냈을때, 그들은 도서관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고있는 하나의 소우주라고 생각했다. 우주를 상징하는 원통 혹은 반구형의 서재로 둘러싸인 대열람실(Great Reading Room)은 이러한 상상력이 은유적으로 반영된 공간이었다.
자본논리에 잠식되어 기능 혹은 경제성을 제외한 수많은 가능성을 상실한 오늘날의 건축과 비교해보면, 이런 상징성과 공간의 형태가 묘하게 연관관계를 형성하는 옛 사람들의 도서관에 대한 정의가 참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대영 박물관 도서관>
특히나 수만권의 책들로 둘러싸인 공간은 나같은 책덕후들의 로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어법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을 보면 이게 단지 나 혼자만의 로망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바 료타로 메모리얼>
그런데 이번 설계는 디지털 자료를 중심으로하는 전자도서관이라는 프로그램이 주어졌다. 서고로는 어떠한 드라마를 만들어볼 수도 없는, 건축가 입장에서는 조금은 아쉬운 상황이었다. 여튼 이런 로망은 접어두고 전자도서관이 어떠한 공간이 되어야하는지 정의해보아야했다.
정보는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획득한다는 것이 수백년간 이어져온 전통이었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은 분류법에 의해 배열되고, 이용객은 그 분류에 따라 책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체계의 단점은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는 과정이 꽤나 험난하다는데에 있다. 물론 아무생각없이 방랑하다 발견하는 흥미로운 책과 같은 예상하지 못한 소소한 기쁨과 역시 존재한다.
정보도서관은 책들에 담긴 모든 정보들을 디지털화해, 손수 찾아다니는 수고 없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편리하게 찾을 수 있다. 정보도서관의 장점은 손쉬운 정보의 접근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런 장점을 극대화시키기위해 내부공간 역시 열려있는 장소가 되기를 원했다. 컴퓨터 뿐 아니라 다양한 디지털기기를 이용한 정보 접근이 용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열려있는 대공간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보의 획득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가장 열린 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조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소음이 발생하거나(그룹스터디), 소음이 완벽히 차단되어야하는 공간(열람실, 캐럴)만 구분된 공간안에 담고자했다.
동시에 현대에 이르러 잃어버렸던 도서관의 상징적인 차원의 형태를 차용했다. 도서관의 열린 공간은 원형을 기반으로 형성되어있는데, 이것은 기존 도서관과 연계되는 공용공간을 형성함과 동시에 온 세계의 지식을 담고 있는 도서관이라는 상징성을 환기시키려는 시도였다.
건축에서의 기능이나 경제성으로만 수렴되지 않는 또 다른 가치, 다의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즉 벤츄리나 로시가 이야기했던 것들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표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능을 극대화시키면서도, 우리가 내세웠던 전자도서관 - 정보의 자유로운 접근 - 이라는 정의에도 부합하는 건축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기능을 충족시키면서도 정신적으로 빈곤하지 않은 건축 말이다.
요새 관심이 가는 인문학은 이러한 관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인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로만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호모 폴리티쿠스, 호모 루덴스, 호모 사피엔스 같은 다양한 층위의 양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인문학처럼, 건축 역시 돈으로만 계량되지 않은 풍부한 의미를 담을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만족할만큼의 풍부함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한 50살쯤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전제는 굶어죽지 않고 꾸준히 이 길은 간다는 전제하에겠지...
그리하여 만들어진 거대한 밥통...
밥통의 해질녘 분위기 - 저 입면 디테일 푸느라 죽을맛. 역시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난생 처음 만들었던 1/100 스케일의 모형. 입면 부착하기 전. 자유로운 접근을 상징하는 3개층이 열린 대공간과 소음이 조절되어야하는 열림실, 즉 학습공간을 구분했다. 빨갱이 사람들이 여기저기를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