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네 집 민음의 시 150
황성희 지음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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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에 대한 바람이나 생각을 해 본적 있는 당신이라면 황성희의 이야기에
솔깃할 거다. 호명을 바라지도 호출을 원하지도 않은 채 무방비로 생산돼 나온
이 막막한 세계에 대한 거부를 생각한다면 이미 깨진 꿈의 조각들을 주우며
퇴행으로 발길을 돌리고 싶은 심정.

그렇게 돌아가기로 했다면,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 길엔 이름이 가지는 위엄
따위는 없다 「후레자식의 꿈」을 동경하는 후레자식의 떳떳함이 있을 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기억 밖의 기억으로 내뱉는 시가 듬뿍한
곳이 여기 앨리스라고 하는 여자의 집이다. 한 집에 산다고 가족은 아니듯
그저 여자와 남자로 또는 그냥 사람으로 들어 있을 뿐

결국「살의의 나날」을 꿈꿔야 저 퇴행을 완성할 텐데 다시 기어들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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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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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그녀의 소설, 또는 소설 속의 목소리, 아니면 황정은이라는 자연인
그 모두가 결국 하나이겠지만 그것을 읽어가는 일은 묵묵하다거나 담담하다거나 뭐 그런 느낌, 기분이다.

'이건 뭐야'하고 황당한 소리와 함께 책장을 덮을 사람도 있겠지만 비틀린 걸, 비틀렸다,는 표현은
뭔가 적절하지 않지만, 잠시 곰곰 들여다보면 뒤틀린 것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황정은 식 이야기를 알아먹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뭐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니고.

뻔해서 하나마나한 생각들이나 투명할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게
소설이라면 굳이 소설을 쓰거나 읽을 필요는 없다. 뻔한것도 '낯설게 하기'가 소설가들의 본업이다.
황정은이 그려내는 낯선 풍경들이 장쾌한 그랜드케년도 아니고 대기권 밖의 신비스런 장면도
아닌 입술 거스러미나 뜯고 있는 옆 사람 이야기인데 나는 그런 장면들에 탐닉하는 독자일 것이다.

물론 또래의 여러 작가들이 그렇고그런 일상에 대해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황정은 특유의 색깔이
강렬한 빨강이나 서늘한 청색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특유의 색깔은 이제 염색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생각한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워지려는 이율배반적인 색도 색이듯이 C M Y K R G B같은 대표색이 아닌 파스텔
톤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그것의 매력을 본다면 황정은의 애독자가 될 것 같다.

각 단편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읽었거나 읽을 이의 몫이라 지껄이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관심이나 어떤 의무에서 읽어야 할 이들은 찾아 읽을테니 굳이 미주왈고주왈 떠든다는 건
무의미 하다. 사실 귀찮다.

「오뚝이와 지빠귀」에서 "왜"라고 되묻는 장면은 남겨본다.
자빠지는 건 의지와 상관 없이 닥쳐오듯 대부분 그런 일상에 파묻혀 살지 않나
그것에 대해 왜 라고 생각하는 순간 노말-보통 이라 할 일상의 허물어짐은 시작이다
다들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생활을 위해 동분서주 뭣 빠지게 뭣 나게 뛰어다니고들 있잖은가 말이다
누군가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그 '왜'를 생각하겠지. 쓸쓸하고 비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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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벽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김석희 옮김 / 마운틴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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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그럴때가, 그런 느낌이 드는 때가 있지 않던가.
머릿속 생각으로는 이게 아닌데,라는 목소리가 분명한데 그 목소리를 객관화 시키는 나는
그 아닌 곳으로 뭔가에 이끌리듯 그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경우. 내 의지이기도
하면서 의지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런걸 운명이라고 해야하나. 거기에서 한참 지나 그때를 생각하면, 아 그때, 하게 되는.

인간은 어느 시기가 되면 자신을 믿지 않게 된다. -94p

우오즈, 미나코, 고사카. 그들 인생의 한 순간에서 그 어쩌지 못하는 불가해한 끌림에 끌려간
순간들의 이야기 쯤 이라고 해두자. 넘어선 안되는 것을 더 넘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면 
불행은 결국 인간에 내재하는 건가.

어쩌면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불행하긴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를테면 판도라의 상자를
손에 쥔 인간이랄까. 열어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결국 열고 마는 게 인간이고 만약 열지 
않는다면 영원히 상자를 버리지 못한 채 갇혀버릴 것이다. 

문제는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 아니겠어? 자제할 수 있다면야 아무 문제도 없겠지.
하지만 꼭 자제해야 할 때 자제할 수 없는 게 인간이야. 사실 말이지 자기 자신이란 건 별로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94p

고사카 역시 미나코와 안된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포기하는 게 안되는 것. 그게 운명이라면.

"난 안 돼." -102p

























우오즈 역시 머리로는 미나코와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엔 알게 모르게 미나코가 와 있었다.
미나코는 어떤가. 그녀 또한 다를바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산에서 일어난 사건과 함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타며 전개된다.
두툼한 분량에 비해 빨리 잘 읽히는 건 행 간을 시원하게 편집한 영향도 있겠고
무엇보다 어떤 결과가 날 것이며 과연 짐작이 맞을것인가와 같은 호기심을
쫓아가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 때문일 것이다.

1957년에 발표된 작품이기 때문에 현재의 감각이나 감성으로 읽어보면 조금은 아쉬운 부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이 풍기는 감정코드가 영 맞지 않아 일본 소설은 잘 읽지
않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일본인 특유의 가치관이랄까, 뭐 그런 것들.

몇 년째 책꽂이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작품을 별 생각없이 뽑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막힘없이 빠르게 읽었다. 딱 그 정도.
마흔 넘어 등단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작가의 이력이 눈에 띈다.
표지 디자인이 참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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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흡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5
리카르도 피글리아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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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와 돈크라이포미~ 밖에 아는 게 없는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시절에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의 폭압적 상황 속에서 살았던 외삼촌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 주변인물들의 이
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 1부와,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쏟아내는 아르헨티나 문학에
대한 그럴듯한 진짜같은 문학담론이 백미라고 할 수 있는 2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좀 지루했다. 또 포기할 뻔 했다는 뜻이다. 겨우겨우 1부를 읽고 이걸 더 읽어야하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포기했으면 큰일날뻔한 작품이었다.

히틀러, 카프카, 비트겐슈타인, 제임스 조이스 등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2부는 정말
압도적이다. 내용은 당연히 그럴듯한 '뻥'이지만 이거 정말 그럴듯한데? 할만큼 귀가 솔깃
눈이 번쩍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들이지만 보르헤스,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등을 읽어
보고싶게 하고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것 같다. 그리고 아를트와 보르헤스를 비교하고 아를
트의 문학이 왜 현대적인것인지 설명하는 렌시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독서의 재미를 선사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것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의 의지는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하찮은 우연으로 인한 인간의 삶은 인간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 흘러
가는 것인지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패자'들에게 심취하게 됐다는 타르텝스키의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니 좀많이 거슬리는 건
간접화법의 문장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그가 말했다,> 같은 화자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읽는 리듬을 딱딱 끊는지 정말 짜증이 날 정도다. 이게 원래 작가가 그렇게 썼겠지만
번역상 의도 또는 번역의 한계라면 정말 안하니만 못한 부분인것 같고 원본도 이렇다면 아르헨티나어
특유의 말버릇인건가 싶기도 하다. 이런 부분은 번역자도 여실히 느꼈을 텐데 이정도는 부드럽게
수정해줘도 괜찮은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 부분을 수정한다고 전체 작품의 의도가 훼손되는 건
아닌것 같다. 정말 짜증 제대로였다는!!!

그리고 필요 이상의 각주. 어떤 각주는 꼭 필요한 것도 많았으나 단순 사실의 설명에 그친 각주 또한
많아서 이 역시 읽는 리듬을 따박따박 깨고 있다는 사실.

러시아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하지만, 남미 소설도 메모를 해가면서 읽어가야 한다.
특히나 등장인물이 많고 혈연으로 엮여있거나 하면 가계도를 그려가야 한다. 저 유명한
『백년 동안의 고독』의 가계도를 생각하면 쥐난다... 다행히 등장인물은 그리 많이 나오
지 않으셨도다...

솔직히,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낸건가 싶다. 남미 소설은 각 나라의 문화 역사 경제 등이
너무 낯설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이라면 뭔가 가까운게 아닌가 싶지만 남미는...
이런저런 소개와 귀동냥으로 남미 작가들의 작품을 몇 읽기도 했지만 임팩트는 미미했고
역시 남미쪽은 내게 맞지 않아, 하는 부정적 이미지만 쌓여갔다.
마르케스, 보르헤스 같은 작가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을것 같기도 하다. 몇번 시도
했으나 번번히 실패. =.=
리카르도 피글리아 역시 남미 작가여서 과연 내가 읽어낼 수 있을까 이번에도 포기하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집어들었던 게 사실이다.
읽어 볼 마음이 생겼다면 1부는 진득하니 읽어나가시라. 2부를 기대하면서. 실존했던 작가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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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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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셋

'너'라고 부를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고독하다
내가 너라고 부르는 네가 너의 너라고 하는 대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두 불행하다

굳이 소설을 들추지 않아도 불행했던 세 명의 연인들은 비극을 살았고 그들을 등장시킨
소설 역시 많다. 작가들의 형형색색 변주에 따라 그들이 위로 받기를 바란다. 그들의 비극으로
우리는 우울한 행복감에 빠지기도 하니까.

씨안이 본 영화가 소설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면에선 너무 선명하게 이야기해 버린 건
아닌지 좀 아쉬운 부분이다. 그 영화에 대한 부분을 읽다보면 아 이런 소설이구나, 맥이
좀 풀렸다고나 할까. 그러나 여전히 소설은 독자를 잘 끌고 나가긴 했다.
문장들이나 전개과정을 보면 꽤나 공을 들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책 뒷편에 평론가 정여울도 언급했지만 '셋'에 관한 박솔뫼 식의 소설인 것이다.
박솔뫼는 하얀 도화지에 굵은 4B연필로 인물의 윤곽 정도만 그리면서도 이야기는
또렷하게 읽히게 했다는 점에서 수상작이 되었을 것 같다.

셋에 관한 유사한 많은 작품이 있겠으나 신경숙의『깊은 슬픔』이 생각났다.
나는 너를 바라보고 너는 또다른 곳을 바라본다던가 뭐 그런 문장이 있었을 것이다.


2.을

인간관계에서 절대적인 갑 절대적인 을의 위치에 있는 경우는 없다. 관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을의 위치에 있는 연인들은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주이 처럼.
비극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만.

교묘하게 노'을'이라는 작명을 했지만 노을 보다는 '을' 이야기를 해야한다.
을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갑이 하는 사랑과 을이 하는 사랑은 다르다. 갑과 을이 서로 사랑한다해도 그 사랑의 무게추는
한쪽으로 기우는 게 사랑의 속성이다. 관계의 속성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한쪽이 '더' 하게 마련.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을'의 입장이다. 을 위에 있는 갑이 아니라 갑의 밑에 있는 을.
'노을'도 을이며 '민주'도 을이다. 민주는 노을에게 있어선 갑일지 모르겠지만 윤에게 있어서는
민주도 을이다. 프래너 주이 씨안 모두 상대적으로 을의 사랑을 했다고 본다.

삼각형은 가장 안정된 도형이겠지만 세 연인은 가장 불안할 것이다. 그리고 불행할 것이다.
'을'의 이야기와 '셋'의 구조가 잘 엮인 소설을 만났다.
군더더기 없는 작품을 써낸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




이제 그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났고 서로 잊는다.
여행객들을 상대로하는 호텔에서 만났던 그들이 캐리어를 끌고 아니면 간단한 여행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모두 이름을 잃는다. 민주가 507호 남자가 돼버린 것처럼.
내가 당신(들)과 맺는 관계 또한 그렇다. 그러하기를 나는 바라는 사람이다. 민주가 떠난
507호에 을이 떠나기 전에 방문할 수 있다면 흔한 여행객이 되어 507호의 남자가 되는 여행을
떠나 영원한 여행생활자가 되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여행이 있을까. 내가 나의 무늬를 잃는 여행.


하루키 이야기를 듣고 읽기도 해서인지 씨안이 자주 올라가던 옥상 장면에서
상실의 시대의 그 옥상이 생각나기도 했다.


*본문 급수가 작아서 보는 내내 눈이 피로했다. 확실히 여타 소설보다 글자들이 작고 작다보니 좀 희미한
감이 있다. 왜 그렇게 편집을 했을까? 개인적 시력의 영향인가? 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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