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산문선 102
심노숭 지음, 김영진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옛날 사람의 글을 읽는다.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불우했던 한 선비의 심사를 읽는다.
출세를 하지도 명망을 쌓지도 못한 한 남자의 마음과 말들을
오늘에 와서 읽어봐도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인지상정임을 알아간다.

처연하고 쓸쓸하다.
제목이 된 눈물이란 무엇인가 편에선 완고하기만 할 것 같은 선비의 마음을
읽고 선입견 가득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어찌보면 옛 선인들의 글들을 읽는 게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넘쳐나는 글들에서 진정성을
읽기란 쉽지 않은 요즘에 말이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물이란 것의 속성인데 어찌 눈물만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지 모르겠다는 저자의 일갈에 아득해진다
다시 한번, 눈물은 마음에 있는 것인지 눈에만 있는 것인지의 고민에
가서는 그런 고민의 골짜기에 가있는 저자의 처지가 아련하기도 하다
덩달아, 눈물은 어디에서 우러 나오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본다
우물에서 길어 올려지는 물처럼 눈물을 이끌어 내는 일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면 어디 있는지 모를 우물 바닥이 울렁하고 철렁하는지
물렁해지는 마음을 부러 외면하려 한다 눈물이 싫은 것이겠지 아니면
눈물 나는 일들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때론 그저 한번 펑펑 울어서
다 지워버리고 싶기도 하고. 울수도 안 울수도 없는 이런...
먹먹하고 막막하기만 한 새벽.

고요함은 진실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으나
움직임은 그 자신만을 감동시킬 뿐이다. 190p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잊게 된다. 1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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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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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9년 12월 27일 부터 2004년 7월 19일까지
서른 여덟 부터 서른 셋 까지

그 사이의 말들을 읽고 있다. 

이런 글쟁이들의 책을 읽으면 따라 읽어보고 싶은 작가나 책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오늘은 레이먼드 카버의 책들을 검색하고 보관함에 넣어뒀다


'생활, 이 무시무시하고 엄정한 단어',
'세상은 극단 앞에서 약해진다. 그런데 나는 결정적으로 극단적이지 못한 것이다. 극단적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매우 단순하다. 비겁하기 때문이다. 견딜 자신이 없기에. 극단은 사실은 매우
강하고 독한 것이다. 강하고 독한 사람만이 극단을 넘볼 수 있다.' -15p

이 글을 쓸 당시 김도언은 '실업자'가 '술주정뱅이'가 되었다고 토로 한다. 모 출판사로 부터 괜찮은
연봉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나 작가로서의 개인적인 욕망을 버리라는 단 한 가지 조건 때문에 거절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출판사에서 일할 동안은 오로지 월급받는 직장인으로만 살아달라는 것인데
뻔하게 작가라는 걸 알고 영입하려는 쪽의 요구는 스님에게 날마다 술판을 벌여 고기들이 즐비한 난장판
을 벌여주십사 하는 것과 같은 아주 (내 생각엔)괘씸하고도 싸가지가 없는 조건이 아니었나 싶다.

김도언의 진술처럼 나도 비겁하기 때문에 극단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이도저도
아닌 채 간만 보고 한참을 물러나 있으면서 이러쿵 저러쿵. 독하고 강해져야 하는데.
속초까지 혼자 자전거 타고 가는 날 보고 독하다고 그러긴 하던데 그 '독'으로 물어 쓰러트릴 건
다른 곳에 있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넌 뭐하나.



소설가 김훈은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은 개수작 같은 거라고 일갈한다. 103p

(나는)101%동감.

여기에서 김도언은 '인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문학을 생산하는 담당자들 즉 시인이나
소설가, 그리고 문학 작품을 읽거나 연구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그 두 가지다. 최소한 전자로 언급한
문학 생산의 주체자들은 문학을 함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구원'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아무 언급없이 넘어갔기 때문에 김도언의 생각에 공감
하기는 힘들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시인이나 소설가라고 인정 받고 많은 시간을 시와 소설의
창작에 몰두하는 것이 김도언 식의 구원일까? 이것을 김도언에게 적용 시켜 한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소설가가 되어 소설을 쓰는 그 시간에 대해 당신은 구원되었다고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
는지. 

 나에게 있어 '좋은책'이란 지금 이 책처럼
어떤 문장을 읽으면 씀풍 다른 문장을 생각나게 한다거나
어떤 사물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을 보며 새로운 면면을 챙길수 있는 책이다
비록 어떤 것들은 채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저 검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겠지만
기약 없는 어느 순간 그 어둠에서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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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인생
지현곤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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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할 수 없고 갈 수 없음이 할 수 있고 갈 수 있는 사람보다 더한 상상을 이끌어 낸다
그의 그림(카툰)을 한 점 한 점 보자면 그야말로 촌철살인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는
놀라움이 있다. 아 이런 걸 이렇게 비틀어 낼 수 있다니, 정말 놀랍다.
초등학교 1학년 이후 양팔을 펼치고 조금 더 됨직한 골방에서 살아온 한 사람으로써
보여주는 세계는 주목할만 하다. 수십년 동안 '갇힘'과 홀로 싸워야 했던 심정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지나간 과거와 지금의 일들에 대한 이야기 보다 '마치며'에서 들려준 그의 몽상에 가까운
글이 더욱 많이 실렸으면 어땠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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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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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또는 '결국' 다 읽었다. 나 같은 의지박약 인생이 재미있지 않은 딱딱한 책을
거기다 두껍기까지 한 책을 완독하기란 쉽지 않다. 전공자도 아닌데 굳이 평론집까지
펼쳐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없지도 않았으나 다 읽은 지금 생각해보면 '괜찮았던'
독서라고 자평한다.

덕분에 관심 대상에 넣은 작가와 시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메모해 뒀거나 구입 대상이
늘어 났다. 무엇보다 '맛있는'문장들을 많이 음미했다는 것이다. 무수한 독서에서 뿜어
나오는 예시들과 예문들이 부러웠음은 두말하면 잔소리. 물론 읽어도 모르는 많은 인용과
이론들도 있었지만. 무엇을 모르는가를 알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두껍고 재미없는 평론집이 근 8개월여 만에 5쇄를 찍었다니 이것은 평론가 신형철 개인의
매력일까 아니면 그의 문장과 말들이 갖는 흡입력일까.
어쩌면 그것은 그의 비평에서 느낄수 있는 '온정'이 아닐까 싶다. 그 온정이 어떤 것인지는
수고롭겠지만 그의 비평들을 찾아 읽거나 본 도서를 일독해야 할 것이다.

수없이 밑줄 그은 문장들 가운데 그나마 읽으면서 적어본 것들이다. 옮겨 놓지 않은 말들은
읽는 이들끼리만 공유하기로 한다.
어떤 비평가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론집도 이만하면 나같은 일반독자가 읽어도 괜찮겠다는
긍정을 한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 5p

몰락인지 알수없지만, 몰락하지 않기 위해 매일, 하루를 쓰는 나날들의 연속선상에서
몰락에 대해 잊고 있던 생각을 들쑤셔 주는 문장을 만났다. 이미 몰락에 대해, 일찍이
새겨 듣게끔 하던 당신의 일성도 생각났었다. 몰락의 진행중이던 깊은 밤 아니었던가.
가까스로 몰락의 현장에서 나는 잠시 이탈해 있지만 몰락은 기정 사실이요 변함없는
의지 아니던가. 몰락해야 드러날 어떤 것이 있다면 지금 기꺼운 마음으로 나는 몰락해
야 하지 않겠나. 물론이다. 그럼에도 몰락을 하루하루 미루는 이 실험은 언제 끝낼것인가.

몰락을 작심하는 순간 많은 것들은 대수롭지않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나르키소스의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호수에 비친 나르키소스의 얼굴이 몰락을 작정한 사람의
얼굴이다. 몰락을 바라보는 일이 곧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다.



왜 우리는 이모양인가. 개별자의 내면에 '세계의 밤'(헤겔)이, 혹은 '죽음 충동'(프로이트)이 있기 때문이다. 부분 안에 그 부분보다 더 큰 전체가 있다는 역설, 살고자 하는 것 안에 죽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는 역설 때문이다. ... 덕분에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과연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캉). 그러니 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신경증)은 쉬운 일이고 그것에 삼켜지는 것(분열증)은 참혹한 일이다. ... 말에 배반당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을 찾아헤매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한없이 곱씹는다. ... 한편 행동이 통제 불능이라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 소설가다. ... -13p


당대적 현실의 세목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 꼭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 그 소재가 무엇이건, 도대체가 미학적으로 태만한 작품은 옹호할 수가 없다. ...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23p


강박증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죽어 있는가, 살았는가?"이다. 강박증자는 그 자신의 충동과 향유의 대상에 직면하면 스스로가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향유를 통제하려고 한다. -112p


단편소설에서 반전은 자칫 예상을 깨는 답을 제출하는 데 봉사하는 수수께끼 놀이의 차원에 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기술이다. -125p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매력적인 단언인다. 비어 있는 목적어의 자리에 '윤리'를 넣고 싶다.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우선 도덕이 아닌 그 어떤 것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었다. ... -142p


아름답지만 위선적인 도덕이 아니라 참혹하지만 진실한 윤리가 문학의 몫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144p


욕망이 고갈된 삶이 고통이라서 앞으로 다가올 죽음은 휴식이 된다. -148p


한유주에게 소설은 '듣는 것'이고, 편혜영에게 그것은 '냄새 맡는 것'이며, 김중혁, 이기호, 김애란 등에게 그것은 '상상하는 것'이다. -172p


...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서정성의 메커니즘을 충실히 따르는 서정시가 씌어질 수 있고 또 씌어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선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기는 쉬워도 우리 시대의 진리 혹은 실재에 접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진정한 진리는 착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진리는 언제나 위협적인 것이다. -185p


자아의 위력이 놀라운 것은 여하한 종류의 타인들에게서도 자신의 거울상을 찾아내는 능력 때문이다. 언제나 자아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이 경우 타인과의 만남을 규정하는 공식은 1+1=2가 아니라 1+1=1이 된다. 이것은 사랑의 메커니즘에 대한 쓸쓸한 설명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소위 연애시의 성패는 자아가 거울에서 궁극적으로 그 자신을 보는가(1+1=1), 아니면 타인의 타자성을 인지하는가(1+1=2)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다 ... -192p

이 꼭지의 글을 읽고 되새겨 본다. 축약하자면 '뭐 눈엔 뭐만 보인다'라고 하는 말로 대체하면 어떨까 싶다.
개개인인 우리가 타자를 흔히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대상인 타자의 모습에서 사랑하게 되는 건 결국 그 타자에서
읽어내는 나의 모습이라는 것. 나와 다르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망은 성립되겠지만 그 관계망이 철거되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연인들 간의 불화는 결국 서로
'넌 나완 달라' 또는 '나 같으면...'이라는 나르시시즘의 실망일 것이다.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이는
바로 '나'뿐이다. 그러니 자기애自己愛가 강한 사람은 타인과의 '사랑'은 할 수가 없다.


'사유의 논리'가 아니라 '감각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고집스럽게 당당하고 시종일관 읽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 그 감각의 과잉 때문에, 누구든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누구도 김경주를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다. ... 서정적인 구절들에 밑줄을 치는 버릇이 있는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시편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런 독자들에게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불친절하거나 고집스러워 보일 감각의 향연들도 허다하다. ... 그 자신 명료한 사유를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사유가 되려다 만, 사유가 되려고 하는, 혹은 사유의 형식을 이미 초과한 어떤 에너지들이 흘러넘친다. -304p

김경주의 시세계를 저자는 어떻게 보고 있나, 참 궁금했다. 김경주의 시를 이야기할 때 '감각'이 빠지면 말 하지말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 김경주의 시는 감각적이다. 그 감각에 무릎을 치거나 위안받는 독자가 어느 시집의 독자보다
많았음은 분명하다. 시집이 팔려 나가는 현상이 그것의 반증이라고 본다. 그러나 첫 시집이후 그가 들려주고 있는 많은
말들(시와 산문들)의 색채는 이제 슬슬 바래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의 '감각'에 싫증이 난다는 것이다.
사유가 부족하거나 정제되지 않은 감각들의 한계랄까 그런. 빛나는 그의 감각에 호들갑 떨던 때는 지났다는 것이다(최소
시에서만큼은).


근원(아래)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뒤)를 캐지 않으며 초월(위)을 도모하지 않는 시는 어디를 보는가. 이렇게 '옆'을 본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들뢰즈)
그녀는 '시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부류의 시는 본질적으로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 그녀의 시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지 말고 그녀의 시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353~367p


창작자는 작품을 통제할 수 없다. 작품이라는 결과는 창작자의 의도를 초과할 수 있고, 수용자의 해석은 그 결과를 또 한번 뛰어넘는다. 이것은 즐거운 이중의 배반이다. ... 시에서 '나'란 하나의 "닉네임"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를 시인에게로 환원하지 말라는 주문일 것이다. ... 손가락은 지시가 아니라 암시입니다." -372p


『이상 문학전집 1-시詩』(문학사상사, 1989)는 정본 텍스트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오식과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 인용 텍스트로는 부적합하다. -464p
바로 이 전집을 가지고 있는 한 독자로써 뜨끔하지 않을수 없는 지적이다. 한문이 그대로 있어서 읽기가 난해했지만
오식과 오류라니... 물론 내가 연구자 수준의 읽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작년에 뿔(웅진)에서 나온 이상 전집에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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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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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진은영은 그의 시집 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 시절, 성수동에서 이대 입구까지
다시 이대 입구에서 성수동까지
매일 전철을 타고 가며 그녀를 상상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 만약 당신이 앉아 있다면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에게


어디 진은영 뿐이었을까. 본 시집의 해설을 쓴 박혜경 또한
"1980년대에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최승자의 시들에 열광했던
젊음의 한때를 지나왔다."고 했다. 만약 당신이 최승자의 '다음 시집'을 기다려 보았던
독자라면 당신 또한 그러했으리라.

비록 2000년대에 들어서야 나는 최승자를 읽을수 있었지만 나 또한 얼마나 열광했던가.
11년이다. 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 시간. 그가 다음 시집을 내기까지 견뎌낸 시간은.
무엇보다 그 시간에 촉각을 세워왔던 건 그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다. 뒤표
지글 "나는 잿빛으로 삭았"다는 부분에서 지난 시간의 길이보다 깊이로 먼저 읽히는 것
도 투병과 무관치 않게 보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인은 시인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간간히 신작시를 발표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초판 1쇄에서 3쇄까지 단 7일. 최승자를 기다려온 사람들의 갈망이다.
여전히 최승자는 시단의 중심에 있음이다. 가운데 있어야 한다. 비록 이번 시집에서 말
수가 줄었다고는 하나 최승자의 거침없는 목소리를 기대하고 있다.

출판사 새책 페이지를 보다가 이게 누군가 싶어 본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잠시 멍 했던
그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참 다행입니다라고 속으로 되뇌이던 그 순간.

그런 마음으로 쓸쓸하게 머나먼 곳에 있었던 한 시인의 시집과 만나는 일. 행복한 밤이다.


가시 영역과 가청 영역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그 영역은 좁다. 우리 생각의 지도 또한
아직도 확장중이지만 밝히지 못한 영역 끝이 없다. 어떤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고 그 허무맹랑
안에 시가 숨어 있어 우리는 미처 간파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입을 빌어 귀신이
하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어느 책에서 최승자 는 자신이 써온 시가 귀신이 들려준 이야기였다고
하고 지금도 혼자 중얼거리곤 하는데 그런것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영감'이란
게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의 말대로 귀신이 던져주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런 귀신의 말을
잘 낚아채는 인간부류가 시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번 시집 시들을 한 편 한 편 넘기면서 자꾸만 드는 불온한 느낌들. 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고
불길한 예감만이 언제나 적중하기 마련이다.
앞날을 내다보는 귀신의 이야기가 이번 시집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부디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어떤 풍경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時間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詩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흐린 날 -일부


병원 안 컴퓨터실
고요한 실내
책상 앞에서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천국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웠던 부운몽, 그러나
여실했었던 부운몽


책상 앞에서 -일부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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