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다락원 / 104쪽
(2016. 2. 17.)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금욕주의를 중시하는 개신교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출현이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연구한 저술이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는 예전과 달리 이윤추구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인정하고 더 나아가 미덕으로까지 칭송한다면서, 이런 사고방식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만족스런 해답을 찾기 위해 개신교로 눈을 돌린다. 개신교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각자 종사하는 일에 다 신이 각자에게 맡긴 '직업'의 개념을 부여하는데, 직업의 의미에 대한 좋은 해석은 될 수 있어도 이윤추구의 동기를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칼뱅주의를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이윤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다. 예정설을 믿는 칼뱅파는 신으로부터 구원받는 자와 저주받는 자의 운명이 영원한 옛날부터 신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고 생각한다. 교세가 점점 퍼져감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틀림없이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했고, 세속적인 직업에서 거두는 성공을 구원의 증표로 여겼다. 이윤획득과 물질적인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고방식은 전통주의적인 경제체제를 허물어버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일단 자분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자 개신교의 가치들은 불필요해졌고, 스스로의 생명을 얻게 된 자본주의 윤리는 근대의 경제적 활동에 아주 유용한 나머지 이제는 우리가 그 정신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P.10)



  벤저민 플랭클린의 글을 보면 고전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정신이 포함되어 잇다. 시간은 돈이고, 신용도 돈이다. 신용을 잘 이용하면 큰 돈을 쌓을 수 있다. 돈은 생식력을 갖고 결실을 맺는 성질을 가진다. 돈이 돈을 낳는 것.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늘어나며, 효용은 더욱 급속하게 증가한다. 남에게 돈을 빌렸으면 제때 갚아라. 신용을 얻으면 언제든 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근면하고 검소하며 시간을 잘 지켜 남들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심어줘라. 적은 돈을 잃은 자는 단지 그 돈의 총액뿐만 아니라 그 돈으로 벌 수 있었을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이 '탐욕의 철학'은 자본 증식을 목표 자체로 여긴다. 이 글에서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윤리에 따르면, 개인은 자본 증식의 의무를 가지며 이 윤리의 위반은 어리석음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의무 망각으로 취급되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다.
(P.26)



  많은 자본주의 비평가들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며 보편적 인류 사회의 변화 과정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단계를 나타낸다고 가정하거나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베버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성공을 거두는 자본주의적 활동에 필요한 '자본주의 정신'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경제활동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정한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간 본성분만 아니라 이 가치들이 자본주의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P.34)

 

 

  베버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급하는 사회학과 역사에 대한 접근법인 소위 '유물론'에 대해서도 명확히 답하고 있다. 유물론은 자본주의 정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상과 발전들을 경제적 상황의 반영이거나 상부구조로 간주한다. 경제적인 상호작용은 모든 사회제도의 토대다. 종교 자체도 그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역사의 원동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베버는 서양 문명이 봉건적 전통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향의 가치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가치들은 경제적 상황에서는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었다. 가치들의 형성이 경제적 상황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전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 이처럼 유물론적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사실들의 둣받침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적 진보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원인들의 다양성은 물론, 경제적 상황과 종교관의 인과관계가 쌍방향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P.35)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주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직업 사상에 근거한 합리적 생활방식은 기독교적 금욕주의 정신에서 '태어났다'. 결국,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적 금욕주의의 본질적인 내용은 같지만, 자본주의 정신에는 종교적 바탕이 결여되어 있다.
  "청교도들은 직업인이기를 원했던 반면, 우리는 직업인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금욕주의는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거대한 우주'의 건설에 일조했으며, 오늘날 태어나는 사람들의 삶은 이 거대한 체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외적인 재화에 대한 관심은 '철창'이 되어 버렸고, 그 재화는 전례 없이 인간에 대한 힘을 증대시켰다. 종교적 금욕주의는 '그 철창 안에서 벗어났으나', 자본주의는 더 이상 그것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직업의무의 관념은 죽어버린 신앙의 망령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직업의무를 정당화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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