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 최장집, 박상훈 / 후마니타스 / 236쪽
(2016. 2. 27.)

 

 

 

<소명의로서의 정치> 

 

  국가는 오늘날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다. 근대에 와서, 국가 이외의 다른 모든 조직체나 개인은 오로지 국가가 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물리적 폭력/강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국가만이 폭력/강권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P.110)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해'[혹은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이 결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를 위해 사는 정치가는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적 균형과 자긍심을 함양한다. 정치에 의존해 사는 정치가는 정치를 지속적 소득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정치 지망생이나 지도층 혹은 그의 추종자들을 비금권적인 방식으로 충원하고자 한다면 당연한 전제 조건은 이 지망생들이 정치 활동을 통해 정기적으로 확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명예직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정치는 흔히 말하듯 '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사람들, 자산가나 특히 금리생활자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적 지도층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한다면 이들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P.125)

 

 

  정치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 및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가리킨다.
  단지 열정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 그것이 제 아무리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의'에 대해 헌신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끄는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적 판단이다. 정치가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로서 균형적 판단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P.196)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적인 두 원칙을 따른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다르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다.
  신념 윤리는 무책임과, 책임 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신념 윤리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가 -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는 올바른 행동을 할 뿐,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는 식 - 아니면 책인 윤리의 원칙에 따라 - 우리는 우리 행동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 행동하는가 사이에는 심연과 같은 깊은 차이가 있다.
(P.210)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정치가 가진 윤리적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치가는 모든 폭력/강권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P.224)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하고 있듯이] '악마, 그는 늙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연령, 즉 인생의 나이가 아니며 따라서 '악마를 이해하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토론할 때 출생증명서의 날짜를 이유로 남의 의견을 압도하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참아 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스무 살이고 나는 오십 살이 넘었다고 해서, 단지 그 사실만으로 뭔가 성취했다고 할 수 없으며 그보다 앞서서 뭔가를 배웠다고 할 수도 없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을 견뎌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
(P.227)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고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이면서 또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영웅일 수밖에 없다. 지도자나 영웅은 아니라 해도,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지금에라도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오늘날 아직 남아 있는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해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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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정치가는 누구인가 (최장집)>

 

  정치철학은 시대의 격변을 배경으로 출현했다. 그런 시대적 변화의 의미는, 철학자들이 어떤 상상력과 비전을 가지고 당시의 인간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런 현실을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어떻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점에 있어 정치철학은 경험적 지식을 추구하고 이를 축적하는 과학으로서의 학문, 즉 '사회과학'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일찍이 칸트는 그의 철학 강의에서 철학이란 "철학 그 자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철학도 마찬가지다.
(P.9)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비교적 짧은 텍스트이지만, 그 내용은 더없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해석의 다양함을 허용하는 고전은 읽는 사람을 미로에 빠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할 가능성 또한 크다. 이 점에서 베버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 열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베버의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분법적 구조라고 할 수 있을 석이다. '신념 윤리'대 '책임윤리', '카리스마적 지도자' 대 국가 및 정당의 관료화, 의회 민주주의 대 지도자 민주주의, 정치인 대 관료, 카리스마적 개인 대 조직의 '일상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개념의 쌍들은 모두 '이율배반'적 구조를 갖는다. 한마디로 말해 두 명제 사시에 어떤 것을 양자택일적으로 선택하는 정태적 차원의 문제로 베버의 중심 사상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들 대쌍적 개념이 현실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나아가 인간 행위와 사회 변화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를 분석하려 했다는 데 있다.
(P.17)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독일어 원래 제목 "Politik als Benuf"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이 Beruf라는 말은 소명과 직업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사전적 말뜻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베버가 이 책에서 의미했던 바도 그러하다. 그래서 한 대표적인 영어 번역판은 두 의미를 동시에 사용해서 "정치라는 직업과 소명"이라고 풀어쓰기도 한다. 그러나 두 의미 가운데 제목으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도 무방하지만 소명이라는 말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 정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 의식을 가진 직업 정치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P.36)

 

 

  그의 유명한 젓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일상의 경제생활에서 이윤을 축적하는 상업 행위를 신의 부름으로 생가하고, 그러므로 헌신적으로 그에 복무했던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금욕적인 그들의 교리와는 달리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냈음을 테마로 한다. 마찬가지 논리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는 한 사람의 정치인/지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프로테스탄트적 윤리에 상응하는 정치적 소명 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소명 의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의식을 동시에 말한다.
  하나는 내면적 신념 혹은 '내면적 신념 윤리'의 원천으로서의 소명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신념을 현실 속에서 이행해야 할 책무, 즉 텍스트에서 말하는 '책임 윤리'의 도덕적 원천으로서 소명 의식이다.
(P.37)

 


  베버는 정치의 중심이 되는 영역을 국가라고 정의한다. 정치 이론의 고전으로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더불어 이 국가에 관한 정의다. 그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국가란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라고 정의힌다.
  이어서 정치에 대해서는 "국가들 사이에서든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관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 또는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이라고 말한다.
(P.43)

 

 

  정치의 본질을 갈등이라는 베버 정치론의 중심 테마로 볼때, 갈등에 휘말리지 않는 합리적 행정을 구현하는 관료가 정치적 리더가 되는 것에 반대해 왔다. 관료와는 정반대로, 정치적 지도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던 간에 완강한 자세로 목표를 달성하려고 투쟁하고 헌신한다. 정치에 복무하는 그들의 의무는 단순히 기존의 조건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다. 그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도적인 지도자들은 그들의 데마고그적 기술을 활용함과 아울러, 그들 스스로 지지자를 창출하고 동원하지 안으면 안 된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투표자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제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P.71)

 

 

  정치 영역에서 유효한 정치의 에토스, 정치의 도덕적 성격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베버는 '내면적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하고, 이 두 개념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신념과 책임의 두 모순적 도덕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이율배반의 한 유형인 '자유와 필연'에 대비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신념 윤리는 각 개인이 행위할 때,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그가 옿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도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도덕적 근본주의의 태도를 동반한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행위는 종교나 도덕의 영역 밖의 세속적인 현실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예기치 않은 문제에 이내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과는 달리, 책임 윤리는 사건의 전체 구조, 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판단력, 사려 깊음을 뜻한다. 따라서 책임 윤리는 목적과 수단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영향을 미친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동일한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P.86)

 

 

  민주화 이후 한국의 사회구조는 다원화되고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계층화되었다. 경제 역시 세계경제의선진국으로 부상하면서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수준에서 일어난 빠르고 커다란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이념은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고, 정치에 대한 이해는 부정적이고 경직적이어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작동 원리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베버의 정치사상을 집약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읽는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커다란 지적 자원과 만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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