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금욕과 탐욕 속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
막스 베버 / 김상희 / 풀빛 / 252쪽
(2016. 2. 22.)

 

 

 

  우리는 베버의 학문적 열정이 낳은 이 책을 보면서 자본가라고 해서 물질적인 것만 추구한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라고 하면 생각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그런데 이 미국을 강한 나라로 만든 정신을 흔히들‘프랭클린 정신’이라고 한다. 베버는 이 책에서 시간이 곧 돈이며 정직이 신용이라고 주장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면서 바로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순수한 원형인 프랭클린 정신이 정직과 절약, 그리고 일에 대한 의무였음을 밝혀낸다.
  물론 베버가 밝힌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건강성과 경건성이 완벽하게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베버는《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일반화된 하나의 논리로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철저하게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학 저서라고 할 수 있으며, 학문의 객관성을 구체적으로 밝힌 고전으로 그 빛을 잃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P.8)

 

 

<프로테스탄트>
16세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장 칼뱅(Jean Calvin)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해 성립된 기독교의 분파를 말한다. 가톨릭이 구교라고 불리는 데 반해 프로테스탄트는 신교 혹은 개신교로 불린다.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와 더불어 기독교의 3대 교파를이룬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저항하다, 항거하다’의 뜻을 가진 영어
‘프로테스트(protest)’에서 왔다. 이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 국회에서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와 도시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저항한 데서 기원했다.
(P.10)

  막스 베버(Max Weber)는 근대 자본주의를 주목했다. 직업을 통해 이윤을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근대 자본주의를 베버는‘합리적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합리적 자본주의는 정규적인 시장과 연관되어 이루어지는경제 행위의 한 형태로서, 정확한 계산을 위한 장부 정리와 합법적 수단에 의한 체계적인 이윤 추구를 특징으로 한다. 베버는 합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합리적 정신이라는 규범적인 조건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라는 제도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구분했다. 이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합리적 자본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 합리적 정신의 뿌리인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를 찾아가는 추론 과정을 살펴볼 수있을 것이다.
(P.15)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과 1905년, 두 번에 걸쳐 발표된 논문을 묶은 책으로 먼저 발표된 것을 1부로, 나중에 발표된 것을 2부로 구성했다. 제1부는‘문제 제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베버가 앞으로 말하려는 주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1부는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장에서 베버는 어떤 신앙과 그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사회적 계층이 서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제2장에서는 베버가 탐구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순수한 이념 형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제3장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근원이 된 루터의 직업 사상에 대해 살펴본다. 이렇게 베버는 제1부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어떻게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밑바탕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제2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와 내용을 제시한다.
(P.30)

  베버가 어떤 지역의 종교와 직업에 관한 통계를 통해 주목한 것은 “자본가와 기업가들, 특히 근대 기업의 숙련된 상급 노동자와 관리자 계급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었다. 즉, 베버는 신앙과 계층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16세기 초 초기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중심지들 중 일부가 프로테스탄트를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중심지들에서는 종교 개혁을 통해 낡은 전통의 껍질을 벗도록 했으며, 특히 경제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통해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다. 사실상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감독은 느슨한 것이었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로 개종을 하면서 가톨릭이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한 행동의 규제를 받았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 신자들보다도 휴식이나 향락, 오락 등에 대해 더 단호하고 엄격한 태도를 취해야 했다. 이 점은 특히 칼뱅교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베버는 만일 우리가 프로테스탄트와 경제적 발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지닌 특유한 성격을 살펴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P.31)

  프로테스탄트가 의무와 미덕으로서‘직업의 소명’을 신에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본 점은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종교적 가치에 뿌리를 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연스런 향락을 엄격하게 억제하면서 더욱더 많은 돈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순수한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개인의 행복이나 효용을 초월하는 매우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윤을 획득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렇게 경제적 활동을 통한 부의 획득이 금욕적인 성격으로 바뀌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초기 자본의 축적을 이끌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주도 원리로 작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베버는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 원인으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제시한다.
(P.47)

  베버는 한마디로 루터를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관한 한 주목할 인물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루터가 말하고 가르친 직업 개념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가장 고결한 표현은 수도원의 금욕주의나 은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주어진 의무를 실천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모든 사람은 신이 각자에게 적절하게 부여한 천직에 종사한다. 따라서 정치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가 루터가 주장하는 신앙인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루터가 세속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윤리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칼뱅과는 달리 루터의 직업 개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면서 수동적이라 하겠다.
(P.84)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나타난 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 발생의 원인이 아니고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확정된 직업에 금욕적으로 충실하라는 요구는 근대의 전문화된 노동 분업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이윤 행위를 하느님의 섭리로 해석함으로써 사업가의 활동 또한 정당화했다. 사치와 방종은 금기 대상이 되었던 반면 스스로 부를 이룩한 중산층은 최고의 윤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합리화 과정을 확대시키는 데 공헌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 베버는 다음과 같은 말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일 뿐만 아니라 근대 문화를 구성하는 직업 사상에 기초한 합리적인 생활 태도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태어난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이 책에서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P.164)

  청교도들은 직업인이 되기를 바랐다. 반면 지금의 우리들은 직업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닫힌 벽을 걸어 나와
일상생활의 직업으로 옮겨 왔고 현세의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금욕주의는 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전제 조건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강력한 우주를 형성하는 데 그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이 근대적 경제 질서는 엄청난 힘을 갖
고 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개인의 생활양식을 강제로 규제하고 있다. 이 질서는 영리 추구 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포
함하며 마지막 석탄이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그 규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백스터는“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얇은 망토처럼’신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어야만 한
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운명은 이 망토를 강철 같은 우리로 만들었다. 금욕주의가 세상을 새롭게 형성하고 세속에 영향을 미
치기 시작하자 이 세상의 외적인 재화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고 급기야 인간은
결코 이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종교적인 금욕주의 정신은 이 우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영원히 사라진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라는 기초 위에 서 있으므로 더 이상 정신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의 유쾌한 후계자인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완전히 빛이 바랜듯하고,‘ 직업의무’사상은 지나간 종교 신앙의 유령이 되어 우리 삶의 주변을 떠돌고 있다.
(P.197)

  베버 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회 과학이 가치 판단을 하기 전에 사실로서 사고해야 한다는 몰가치성과 가치 중립성을 추구해
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학문적 판단은 역사적 사실이나 사회적 현상의 구체적인 실상을 연구하고 파악한 다음에 내려진다는 사
회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성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P.219)

  베버는 사회 과학의 주된 목표가 현실 세계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 즉 특정의 역사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무한히 복잡하고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경험 세계를 추상화할 필요가 있다. 이때 사회 과학자는 관심을 끄는
어떤 종류의 문제들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어떻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부딪치게 된다.
  베버는 이에 대해 생각 속의 실험을 구성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실제와 다른 방식으로 발생했다
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실험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주제를 선택하더라도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을 현실로부터 직접 도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의 역사적 현상에 대한 이해 및 설명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개념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념형이라고 베버는 말한다. 이는 현실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추상화시켜 명료하게 일반화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P.221)

 

  베버는 세계 역사의 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어떤 목표를 설정한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을 거부했던 것이다. 베버는 사회 과학자가 각 시기를 이전 시기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것이 아니라 각 시기를 특유하게 만드는 특징들을 파악하고, 이 특징들이 어떻게 각 문명에 독창성을 부여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베버는 서구 문명의 특수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어떻게 해서 서구 문명에서만 보편적 의의와 가치를 지닌 이러한 사회·문화 현상이 나타났는가?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추구한 것이 바로 이《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P.224)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의의
  이 책에서 종교 개혁과 근대 자본주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힌 것은 베버만의 성과가 아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베버 이
전의 많은 학자들도 이미 제기했다. 먼저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윤리란 자본주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경
제적 변동이 정신에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주장은 문명에 속하는 모든 사건들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요소, 즉 생산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가치 판단이 담긴 관점이 사회 과학의 진실 규명 방법론으로는 부적절하다고 보면서 새로운 가설, 즉 이념형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념형이란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서 특정한 보편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즉 경제 활동의 합리화가
급격히 진행된 역사의 과정은 프로테스탄트, 그중에서도 칼뱅주의의 도덕적·종교적 원동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버는 명백히 입증할 수 있는 현상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당대를 지배하던 유물론적 주장에 맞서, 예외적이고 변
칙적인 현상에 대해 파악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 점은《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독창성이 드러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P.238)

  사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조건 돈을 거부하거나 멀리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
립되지 않는다면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돈을 모으는 과정은 물론 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합리적이며 공리적인 윤리와 정신이 요구된다. 베버가 지적한 자본주의 정신의 합리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옳은 선은 아닐지라도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깊이 되새겨야 할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가 돈과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직업 자체에 대한 성실함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던 청교도의 직업관은 직업이 의무자 피할 수 없는 생존 조건이 된 오늘날에는 공허한 메아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관해 근본적으로 성찰한다면 검약과 절제의 미덕을 바탕으로 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도리어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일까?
  우리가 베버의《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다시 읽는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질과 외형적 치장에서 행복을 찾
는 우리 시대의 가난한 정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들이나 행복한 삶의 가치를 찾기 시작한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객관성을
가진 학문적인 방법론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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