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강성화 / 서울댓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29쪽
(2016. 2. 17.)

 

 


  자본주의 정신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 16, 17세기의 종교개혁과 금
욕적인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를 베버는 지적한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운명은 태초로부터 정해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직업노동과 부의 추구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P.10)


  베버는 서구의 합리적 자본주의의 특징적 현상으로 ‘형식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 등을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서구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낳은 것, 그리하여 합리적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 것은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 합리적 정신, 생활태도의 합리화, 그리고 합리적인 경제윤리 등, 한마디로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P.13)



  베버는 서구의 합리적 자본주의의 특징적 현상으로 ‘형식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 등을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서구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이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서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지적한다.
(P.29)



  베버가 최종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서구인의 “근대적 삶에서 가장 운명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서구에만 특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곧 ‘합리적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의 방법은 단순한 영리욕이나 탐욕의 추구가 아니라 도리어 그와 같은 불합리한 충동의 절제 즉 합리적 조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 된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근대화란 합리화이며, 이 합리화는 서구 문화의 특수하고 독특한 현상이고, 서구의 근대적 자본주의 또한 이 합리화에 의해서 여타의 자본주의와 결정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보면, 베버는
근대성 혹은 합리성을 자본주의의 상위개념으로 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일차적으로 경제영역에서의 근대화 곧 합리화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버의 말을 빌리자면, “근대 경제의 기본 동기는 경제적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P.33)



  근대의 기업이 노동의 합리적 조직, 과학적 지식의 기술적 이용, 합리적 부기, 합리적 법과 행정 등을 통해 합리적, 지속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면서 합리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근대적 자본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 또는 합리성이 갖추어
져 있다고 하여 과연 근대적 자본주의가 형성되었을까? 베버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경제적 합리주의의 발달이 부분적으로는 합리적인 기술과 법률에 의존한다 해도 그와 동시에 그러한 발달은 일정한 유형의 실천적인 합리적 행위를 채택하는 인간들의 능력과 성향에 의해서도 결정되기 때문이다.”(p.16-7) 즉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낳은 것, 그리하여 이상의 모든 조건 또는 합리성의 측면들을 가능케 한 것은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 합리적 정신, 생활태도의 합리화, 그리고 합리적인 경제윤리 등, 한마디로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베버는 생활태도, 경제 윤리에 프로테스탄티즘 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는가를 검토하게 된다.
(P.40)



  베버가 경제 영역의 합리화의 기본적인 특징을 노동의 합리적 조직과 합리적 부기 방식 등에서 찾는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도가 가톨릭교도에 비해 자본주의의 전개에 보다 긴밀하게 관계하였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어떤 내적인 친화성이 있는 것인가? 이것이 베버의 의문이었는데, 베버는 이것을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말, 또는 하나의 이념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전형적으로 표시한 것으로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양키의 신앙 고백”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는 프랭클린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베버는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사실은, 비록 그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 한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하더라도 누구나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인다.(p.36) 그러면서 그는 여기서는 ‘탐욕의 철학’이 아니라 독자적인 윤리 혹은 하나의 에토스(ethos)가 표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P.46)


 
  사경제적 부의 생산이라는 면에서는 금욕은 부정직함뿐만 아니라 순수한 본능적 소유욕과도 투쟁했다. 왜냐 하면, 이러한 소유욕은 ‘탐욕’, ‘배금주의’ 등으로 비난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부유해지는 것 자체를 궁극목적으로 삼는 부의 추구이기 때문이었다. 소유 그 자체는 유혹이다. 그러나 여기서 금욕은 “항상 선을 원하면서도 항상 악을 ― 소유와 그 유혹이라는 의미에서의 악 ― 낳는” 힘이었다. 왜냐 하면, 금욕주의는 구약 성서에 따라 그리고 ‘선행’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똑
같이, 물론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를 비난받아야 할 가장 큰 악이라 배척하면서도 직업 노동의 열매인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종교적 평가는 부단하고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 노동을 단적인 최고의 금욕적 수단이자 동시에 거듭난 자에 대한 또는 그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명이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종교적 평가는 우리가 이 책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 부르는 생활관의 확장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말한 소비의 봉쇄를 영리 추구의 이러한 해방과 관련시킨다면, 그 외적인 결론, 즉 금욕주의적 절약 강박을 통한 자본 형성은 쉽게 얻어질 수 있다. 벌어들인 것의 낭비는 막는 것이 투자 자본으로서의 생산적 사용을 야기 시킨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p.137/S.191-3, 일부수정)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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