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광금지 에바로드
장강명 / 연합뉴스 / 306쪽
(2016. 6. 12.)



무수한 떡밥들을 던져놓곤 끝 없는 낚시들의 연속
이곳 저곳에서 감독의 의도는 어떻고 이에 대한 내 견해는 어떻고
새로운 해석을 덧 붙여서 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놀이가 계속되고
결국은 대단한 명작의 전설이 시작된다.
에반게리온과 같이 바로 곡성에 대한 오덕질이 시작된 것이다.


곡성 감독판이 나오면 누가 옳았는지 확실히 알게 될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감독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내용이 될 거라고 예상된다.

이 영화는 결코 명확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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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에서는 젊은 세대가 오덕화(오타쿠화)하고 있다. 일자리는 없고, 취향은 다양해졌고, 인터넷은 싸니까, 누르면 모르핀이 나오는 버튼 곁을 떠나지 못하는 실험용 생쥐들처럼 젊은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되풀이해서 즐기고 또 즐기면서 파고들게 된다. 옛날 야구팬들이 경기 규칙과 스탯에 이렇게 해박했던가? 옛날 축구팬들이 전날 밤 있었던 유럽 리그의 경기 결과를 놓고 이렇게 치열한 토론을 벌였던가?
(P.8)



  대중은 이제 드라마 속 재벌 2세들의 재력을 그의 여러 가지 매력 중 하나(사실상 가장 큰 매력)로 받아들인다. 재력은 이제 인성과 분리되지 않는 덕성의 한 요소이고, 돈이 많다는 건 잘 생겼다거나 유능하다거나 다정하다거나 정직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미덕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돈이 없다는 건 그런 미덕의 부재를, 가난은 곧장 말해 악덕을 의미했다. "집안 형편이 좀 어려웠나 보죠?"라는 질문은 이제 "어릴 때 거짓말쟁이였나 보죠?"라는 것고 비슷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P.38)



  내가 생각하는 자아실현은 멋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판의 가격 같은 건 보지도 않고 순전히 그날 내가 뭘 먹고 싶은가, 평소 못 먹어보던 음식이 뭐가 있나, 맛있어 보이는 게 어떤 건가 하는 것만 생각하며 요리를 주문하는 거야. 그리고 가족들이랑 친구들한테도 같은 식으로 메뉴를 고르게 하는 거야. 제일 싼 메뉴가 뭔지 몰래 살피는 일에는 아주 진력이 났다. 그런 고급 식당에서 고급 요리를 먹으면 아주 뿌듯한 성취감이 들거야. 그러기 위해서라면 낮에도 열심히 환자를 보고 진료를 할 힘이 날 거야. 이게 대통령이 되겠다는 소망보다 천박한 건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은, 자기가 왕이 되어서 남들을 지배하겠다는 말을 둘러 하는 것 아냐?
(P.153)



  그는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일종의 '자아 찾기 여행'으로 평가받는 일에 대해 무척 불편한 기분을 느꼈는데, 그 이유도 여행에 대해 평소 품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산티아고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거나, 인도를 무전여행하고 나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다는 유의 에세이들을 보면 '돈 낭비 참 여유롭게 하신다'는 생각만 들었다.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와 그런 여행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내가 물었다.
  "글쎄요, 큰 틀에서는 같습니다. 무의미하고, 시간 낭비라는 점에서요. 그래도 차이점이 있다면 일단 순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그게 자아 찾기라고 포장한다는 점이겠죠.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두번째 차이점은 결과물이죠. 저는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마음을 먹고 가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왔어요. 워낙 손에 잡히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요. 글쎄, 순례 여행을 떠난 사람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여행서 출간이 목적이었던 분도 계시지만 그러면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났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죠."
(P.191)



  종현은 틈틈이 주변 사람들이 오덕 행위를 탐문하고, 흥미로운 덕질에 대해 인터뷰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누구나 오덕 취미 하나쯤은 있었으니까. 특히 싱글 남녀인 경우에는 예외가 없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자기 진지해지고 또 솔직해졌다. 대개 마무리는 "우리 회사 사람들은 이거 모르게 해줘"라는 부탁으로 끝났다.
  이게 보편적인 현상일까. 아니면 종현 주변의 젊은이들이 그저 그런 품팔이 개발자들이라 그런 걸까? 삶의 의미를 어떻게든 확인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직장에선 그럴 수가 없어서 덕질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법연수원새이라거나 구글 직원, 또는 시민단체 종사자 중엔 오덕이 별로 없을까? 중년이나 노년들은 덕질을 할 줄 몰라서 등산이나 캠핑에 미친 듯 매달리는 걸까?
(P.214)



  '내가 왜 에반게리온에 빠졌던가'에 대해 종현은 다시 생각했다. 첫 감상에서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하다'는 위안을 받은 뒤로 이 시리즈에 자신이 헛된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장르 전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멸시에 저항 하면서 애정을 더 깊이 키워나갔고, 그러다 마침내는 상대에게 없는 장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 아니었을까. 여러 소년만화 중 가장 심오해 보이는 에반게리온이 실제로도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기를, 그나 제작이나 너무 간절히 바랐고, 나중에는 그게 어떤 사이비 종교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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