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전처럼 읽기
정희진 / 교양인 / 312쪽 / 2014
(2016. 08. 08.)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임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복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P.14)



  책은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무관해 보이는 책들 간의 관련성을 읽는 이가 어떠게 판단하느냐이다. 독자의생각에 다라 무관한 책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는 방법이 아는 내용을 결정한다. 별개로 존재하는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의 구분도 없고 개별 학문의 구별은 더더욱 없다.
(P.15)



  자기 전공보다 자기가 공부하는 학문이 생겨난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다. 학문이 생겨난 이유와 문제의식에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전공의 전제와 맥락을 모르게 된다. 이때 지식의목적은 해결로 전락하고 앎이 아니라 정보만 소유하게 된다.
(P.16)



  좋은 글, 빼어난 글, 읽을 만한 글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논문(학문?)과 '잡문'의 구별을 지양한다. 그리고 이를 구분하는 사람이수록 그 지성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다. 글은 정치적 입장과 문장력으로 구별되는 것이지 학문, 잡문, 예술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트로트와 클래식에는 위계가 없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수준이 아니라 기호의차이다. 이와 달리 글은 질적 차이, 수준의 차이가 크다. 좋은 글은 읽는 이의 정치적 입장이나 기호와 상관없이 합의된다.
(P.17)



  독서는 내 몸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다. 통과 전후 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다치고 아프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P.19)



  어떤 책은 읽는 동안 그러저럭 시간이 잘 가지만 읽고 난 후 별 다른 변화가 없다. 이런 경우를 킬링 타임용이라고 한다. 반면, 다양한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는 통과 의례도 있다. 여운이 남고, 머리속을 떠나지 않으며, 괴롭고, 슬프고, 마침내 사고방식에 변화가 오거나 인생관이 바뀌는 책이 잇다. 즉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책이 있다. 이것이 자극적인 책이다. 그런 책은 여러 번 읽고 필사를 한다. 번역서인 경우에는 원서를 구해서 역시 필사한다. 필사를 하면, 최소 네번 정도 읽게 된다. 당연히, 읽을 때마다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내 몸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책을 쓴 작가보다 더 '내 것'이 된다.
(P.19)



  모든 책은 각각의 위치에 쓰인 것이지, 조감도는 없다. 따라서 책의 내용은 진리도 진실도 사실도 아니다. 아니, 사실이나 진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독자는 사용자가 되었다. 원래 지식은 쓰고 없어지는 소비재지, 간직해야 할 보물이 아니다. 사용자는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할 뿐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지식을 몸에 구조화하는 데 사용하면 된다.
(P.23)



  내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을 요약해 본다.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epoche).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P.24)



  책 읽기는 책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입체화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어느 순간/어떤 내용과 접속하는가에 다라 다양한 사건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한 권을 읽어도 열 권을 읽는 사람이 있고, 열 권을 읽어도 한 권도 못 읽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P.27)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극중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도적인 시점이 있다. 대부분의 관객은 그러한 시선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작가가 비교적 집중하지 않는, 그러니까 그 자체가 아니라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인 주변인, 조연, 엑스트라에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환기하고 동일시하는 관객은 드물다. 그러나, 주인공만이 아니라 주인공을 주인공이게 하는 주인공과 타자(다른 인물, 동물, 사물, 자연)의 관계에 집중해서 텍스트를 읽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주제와 줄거리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근본적으로는 다른 정치적 세계(범주)가 만들어진다. 텍스트 자체도 감상문도 달라진다.
(P.298)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될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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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
장강명 / 문학동네 / 188쪽
(2016.  8.  04.)


순서가 뒤섞인 순서 없는 이야기들 속에 자신만의 순서를 찾는 흥미로운 소설




  인간이란 건 결국 패턴이야. 남자가 설명했다. 앞에는 새장을, 뒤에는 새를 그린 부채를 상상해봐. 부채를 빠르게 돌리면 새장 속에 갇힌 새가 생겨. 신경회로 위에 의식이 떠오르는 과정도 그와 비슷해 전기신호들이 회로 속을 바르게 다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불쑥, 유령처럼, 밤거리의 네온사인들이 제각각 깜박이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동시에 켜지고는, 그 다음부터 함께 점멸하는 광경을 상상해봐.
(P.8)



  우주에는 시작이 없어. 남자가 대답했다. 우주는 마치 볼펜과 같은 거야. 그냥 하나의 덩어리이야. 볼펜은 길쭉하게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볼펜에 양끝이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사실은 볼펜이 공기와 닿는 모든 면이 다 볼펜의 끝이야. 그 모든 접점에서 볼펜이 시작하고 끝나는 거야. 우주도 비슷해. 시공간연속체가 무와 만나는 지점이 있지. 거기서 우주는 시작하고 끝나. 그 안쪽에는 우주 알이 있어. 그 바깥쪽에는 우주 알이 없고.
(P.10)



  학생들은 학교에 있을 때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나 벌을 더 닮았다. 교사들은 지친 로봇 같았다. 운동장은 재래시장의 늙은 상인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대낮을 견디다 하교시간 즈음애서 제 혈색을 되찾았다. 운동장의 성별은 아마 남성인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친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 즐거워했으니까. 운동장은 신화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해 질 무렵부터 슬슬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해 밤이 되면 귀기를 몸에 둘렀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다시 사소하고 조잡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P.30)



  마지막에 아버지랑 딸이 꼭 만나야 하는 거야?
  만나야지.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이런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니면 좀 곤란하잖아.
  하지만 생각해봐. 그 아버지와 따른 서로 못 본 채로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았어. 그러다가 마지막에 만나는 건 겨우 십 분 정도야. 그 십분으로 인생이 해피엔딩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되는 거야?
(P.86)


  전망대도 운동자과 비슷했다. 바깥 하늘이 붉어지자 조금씩 마력을 얻었다. 여자의 시간이 제 속도를 조금 잃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인간들의 현재와 미래는 기묘하고 쓸쓸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와 벌을 더 닮았다. 여자는 제대로 된 순서에 대해 생각했다. 도시는 점점 빛으로 된 암호가 되어 갔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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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철학사상』별책 제2권 제3호)
2003년 / 윤선구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 / 90쪽



데카르트의 많은 저서 중에서도 <방법서설>은 가장 기본적인 저서에 속한다. 이 책은 철학만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학문 전체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고, 무엇보다 절대적인 진리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합리론자로서 데카르트의 신념과 이성을 신뢰하고 자신의 이성에만 의지하겠다는 근대적 정신이 명확히 표출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포함한 일반 학문의 연구자 그리고 일반교양인들 까지도 반드시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가 1636년에 쓴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라는 다소 긴 제목이 붙어 있는 책의 첫 번째 부분이다. 통상 첫 번째 부분만 독립적으로 떼어내어 <방법서설>이라 이름하여 출판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방법서설>의 원 제목은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인 셈이다. 책의 제목으로만 보면 이 책은 방법에 관한 논고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히 방법에 관한 논고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까닭은 이 책이 6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학의 방법, 즉 이성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규칙에 관한 내용은 2부에서만 다루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P.3)



  제1부에서는 기존학문과 관습에 대하여 비판하고, 참된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2부에서는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해 이성을 인도하는데 적용되어야 할 규칙, 즉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방법과 이 방법을 어떻게 고안하였는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고, 3부에서는 이 방법을 적용하여 참된 지식을 얻기 전에라도 실천적인 행동은 해야 하므로 이때 필요한 임시방편적인 행동원칙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4부에서는 후에 <성찰> 에서 상세히 서술하게 될 철학의 제일원리, 정신으로서 자아의 존재, 그리고 신존재 등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인식과정이 간략히 서술되고 있고, 5부에서는 <방법서설>저술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지만 이미 저술이 완료되어 있던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에 대한 내용과 혈액순환 등 동물학 관한 내용 및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한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6부에서는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는 출판하지 않았으면서, 마찬가지로 자연학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책인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라는 책은 왜 출판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이 담겨있다.
(P.3)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좁은 의미에서 철학에 대한 방법론이 아니라 자연학 나아가 학문 일반의 방법론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이성을 인도하는 규칙에 따라,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철학의 제일원리로 불리는 최초의 확실한 인식인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과, 자아의 존재와 정신 안에 존재하는 신과 물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인식, 그리고 물질세계의 존재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도출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확실한 인식으로서의 자연에 관한 인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P.4)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오류에 빠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인간은 누구나 이성사용을 올바로 인도하기만 하면 확실한 진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고, 이성 사용을 인도하는 규칙을 마련하고 이를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P.20) 



데카르트의 학문탐구 방법은 그의 기존학문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개발되었다. 즉 그의 방법론은 기존학문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따라서 그의 기존 학문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면 방법에 대한 데카르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기존 학문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세 가지의 기준에 따른다. 첫 번째 기준은 일상적 삶에의 유용성이고, 두 번째 기준은 이성을 통한 학습가능성, 그리고 세 번 째 기준은 확실성이다.
(P.23)



데카르트는 도덕을 중요시하였던 까닭에 보편적인 회의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도덕적 실천은 한시도 중단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잠정적인 도덕규칙을 설정하기도 했다. 그가 세운 잠정적 도덕규칙은 네 가지인데, 첫 번째 규칙은 자기 나라의 법률과 관습, 그리고 종교를 존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 실 생활에서 취하는 온건한 입장을 따르자는 것이고, 두 번째 규칙은 아무리 의심스런 것이라도 일단 따르기로 결정했으면,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할 것, 세째 운명이나 세계의 질서보다는 나 자신과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 네 째는 세상 사람들이 종사하는 직업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자는 것 등이었다.
(P.27)



데카르트는 기존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혹시 실생활에 속하는 것에서 확실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실생활에 속하는 것은 잘 못되면 즉시 손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잘 못된 추리에 대해서는 즉시 시정하려고 할 것이며, 따라서 학문에서 보다 실생활에 속한 것에서 더 확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학교를 마친 후 세상을 여행하면서 여러 나라와 지방의 생활관습들을 경험하게 되는 데, 이를 통해 그가 얻은 결론은 나라나 지방마다 생활 관습이 다르다는 것이었고,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이며, 따라서 확실하게 보이는 관습이나 선례도 실은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려면 전통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이성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P.30)



데카르트가 의미하는 양식이란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능력, 다시 말하면, 참된 것, 즉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누구나 이 인식능력을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누
구나 진리를 인식하기에 충분한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학자들이 지금까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식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성이란 소유하고 있는가 소유하지 않는가를 구별할 수 있을 뿐 더 많이 소유하는가 더 적게 소유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성은 지능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P.32)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인식능력도 가지고 있고 인식대상도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인도할 규칙 또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P.36)



데카르트는 인간은 누구나 진리를 인식하기에 적합한 인식능력인 이성을 가지고 있고, 흔하지 않기는 하지만 이 이성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대상도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진리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류에 빠지는 거나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의심스러운 이유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따라서 진리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인식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진리 인식의 충분 조건은 아니며, 진리를 인식하기위해서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장은 합리론의 특징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P.37)



데카르트는 <방법서설>보다 8년이나 앞서 집필했던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에서는 21개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원래 이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장은 12개씩의 규칙을 포함하여 총 36개의 규칙을 제시하려고 했었는데, 저술이 미완성으로 끝나, 21개의 규칙만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는 단지 4개의 규칙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데카르트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규칙이 필요하지 않고 단지 4개의 규칙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P.39)



데카르트의 학문체계에 있어서 형이상학은 가장 근본적인 토대에 해당한다. ꡔ철학의 원리ꡕ 불어 판 서문에서 언급한 나무의 비유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나무의 뿌리에 해당한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내용은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은 인식의 측면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여
기서 데카르트는 자아와, 신,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는 이 세 가지 대상에 대한 관념이 정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에 대응하는 외적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두번 째 측면은 존재론적 측면으로 무엇이 실체인가 하는 문제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과 <성찰>에서 실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는데, <철학의 원리>에서 비로소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방법서설>, 1부 51절)이라고 규정되며, 이러한
실체는 정신과 물체 두 가지라고 보는 실체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P.46)



방법적 회의란 데카르트가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인식을 제거하고 확실한 인식만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인식에 대해 의도적으로 제기하는 의심을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인 근거를 추구하여 그 결론으로서 모든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는 결론적 회의와 구별된다. 방법적 회의는 오히려 결과로서 아무리 의심하려고 해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을 추구하려는 의심이기 때문이다.
(P.49)



방법적 회의란 확실한 인식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확실해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봄으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확실한 인식을 쌓아가려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방법적 회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불확실한 기존 학문 전체를 허물고 확실한 철학, 즉 형이상학의 토대 위에 확실한 인식체계로서의 보편학문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기존 학문 및 선례와 관습 모두를 의심하는 것이고, 또 다른 차원의 방법적 회의는 좁은 의미의 철학, 즉 형이상학을 확고한 토대 위에 구축하기 위해 불확실한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이다.
(P.49)



나의 존재에 관한 인식은 최초의 확실한 인식이며, 악마의 존재 가정 하에서도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다. 만일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데카르트의 확실한 인식만으로 이루어진 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철학의 제일원리”라고 부른다.
(P.57)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신 관념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신을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란 전통적인 신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러한 존재를 “완전한 존재”라고 이해하고 있다. 완전한 존재란 표현은 이의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모든 종류의 완전성을 다 가지고 있는 존재란 의미에서 완전한 존재라는 것과,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각각의 종류의 완전성을 최고의 정도로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완전한 존재라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완전성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안 된다.
(P.59)



데카르트가 신 존재 증명을 위해 확실하게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정신으로서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정신 안에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사실이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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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존 코팅엄 / 정대훈 / 궁리 / 106쪽
(2016.  7.  22.)





  근대는 르네 데카르트라는 이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17세기 사람들은 데카르트와 그의 계승자들을 '새로운' 철학자들이라 불러다. 이들은 과학의 사고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 전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카르트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 사고'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바로 그 관념을 만들어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과학적 설명이 계량적인 수학의 정밀한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P.9)



  1637년에 익명으로 출판된 <방법서설>의 4부의 초두를 바로 잇는 문단에서 그 유명한 구절은 "즈 빵스 동 즈 쒸 je pense donc je suis"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아마도 데카르트의 의도에 보다 가깝게 말한다면) "나는 생각하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가 나온다. 이는 모든 철학적 금언들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방법서설>은 7년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그 번역서에서 이 금언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이라는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형태로 등장한다.
(P.35)



  <방법서설>은 온전한 제목은 '자신의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에 대한 논고'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방법'의 한 핵심은 데카르트가 철학적 외양을 띠지 않는 회의주의의 기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회의를 극단에까지 밀고 나아간다는 데 있다. 이 방법의 목적은 회의를 견디고 살아남는 것이 도대체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데카르트가 건설하려고 애쓰는 새로운 학문이라는 믿을 만한 건축물의 주춧돌로 쓰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을 거듭한 끝에 최초의 진리를 발견한다. 이 진리는 물론 저 유명한 코기토 - 내가 생각하고 있기만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 이다. 주석가들은 데카르트가 자신이 건설하려는 체계의 나머지 부분을 가동하기 위해 기대하려고 하는 '아르키메데스의 점' (코기토 에르고 숨)이 가지는 정확한 의의를 끝없이 붆석하고 논쟁해왔따. 그러나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좀 더 흥미로운 것은 코기토에 바로 이어 데카르트가 그토록 그 존재를 확신하는 "생각하는 존재의 본성"을 계속하여 논의한다는 점이다.
(P.36)



  데카르트의 실수는 인신론적인 참으로부터 존재론적인 참을 읽어내려고 한 점인 것 같다. 좀 쉽게 말한다면, 어떤 것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거나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사실로부터, 또는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의심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정신이나 생각하는 자아의 실체 본성에 대한 결론을 끌어내려고 한 것에 그의 실수가 있는 것 같다.
(P.46)


  이 책은 미국에서 데카르트와 근대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 두드러지는 몇 명에 속하는 존 코팅엄이 철학의 초심자를 겨냥하여 쓴 데카르트 소개서이다. 이 책은 얼마 안 되는 분량에 데카르트의 전체 사상을 담는 동시에 단순한 개괄의 수준을 뛰어넘어 일관된 흐름과 논지를 유지하면서, 한 위대한 인물의 전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극적인 전개 과정까지 갖추고 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인 삶의 여정을 거친 데카르트의 살밍 그의 철학적 여정과의 연관 안에서 소개되고 있다. 데카르트에 관해 쓰여진 책 중에 이토록 짧은 분량에 이토록 많은 내용이 담긴 책은 몇 권 되지 않을 것이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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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 이현복 / 문예출판사 / 342쪽
(2016. 7. 21.)



  데카르트의 저서 중에서 <방법서설>은 일반적으로 애독되는 책인 반면,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은 다소 덜 알려진 책이다. 그렇지만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책임이 분명하다. 이 책이 비록 미완성으로 끝나고, 또 그 형식이 산만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방법서설>과 <성찰>을 거쳐 <철학의 원리>에 이르기까지 두루 나타나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자연학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를 위해 반드시 독서되어야 할 책이다. <방법서설>에서 개진된 방법의 주요 규칙들이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에서 피력된 내용의 축소판임은 물론이고, <성찰>에서 논의되는 형이상학 원리가 그 열매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P.7) 



  사람들은 종종 두 사물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심지어 그것들이 실제로 서로 다른 것일 경우에도, 그 둘 중 하나만에 대해 참이라고 인정햇던 것을 두 사물에 모두 적용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사정은 학문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들에 따르면, 학문들은 그 대상의 상이성에 따라 서로 분리될 수 있고, 그래서 다른 학문을 고찰함이 없이 오직 그 하나만을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인간의 지혜와 다름아니고, 지혜가 비록 여러 상이한 대상에 적용된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빛이 여러 다양한 대상들을 비춘다고 해서 그 빛이 다른 것이 아니듯이, 학문들도 서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한게지원 제한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어떤 한 진리의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한 기예를 연마하는 경우처럼 다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발견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P.15)



이 서설이 너무 길어 한 번에 읽을 수 없다면,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읽어도 좋을 것이다.
제1부에서는 제반 학문들이 다양하게 고찰되고 있다.
제2부에서는 저자가 찾고 있는 방법의 주요 규칙들이 고찰되어 있다.
제3부에서는 저자가 이 방법에서 끌어낸 몇몇 도덕 규칙이 제시되고 있다.
제4부에서는 저자가 신 및 인간 정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데 사용한 근거들, 즉 저자의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근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제5부에서는 저자가 탐구한 자연학적 문제들의 순서, 특히 심장의 운동 및 몇 가지 의학적 난제들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 영혼과 짐승의 영혼 간의 차이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다.
제6부에서는 자연에 대한 탐구를 더욱 진척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및 저자가 이 책을 쓰게된 동기가 서술되고 있다.
(P.145)



  청년 시절에 나는어떤 길을 발견했는데, 이 길을 따라 몇몇 고찰들과 격률들에 이를 수 있었고, 또 이로부터 하나의 방법을 만들어 냈으며, 이 방법을 통해 내 인식의 폭은 점차 증대되어, 마침내 평범한 내 정신과 얼마 남지 않은 내 생애가 허락하는 최고의 정점까지 조금씩 내 인식이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P.148)



  내 의도는 이성을 잘 인도하기 위해 각자가 따라야 할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이성을 인도하기 위해 내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남에게 교훈을 주려는 사람은 교훈을 받는 사람보다 자신이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야 하며, 그래서 그들이 하찮은 일에 실수를 저지른다면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혹은 - 당신들이 원한다면 - 하나의 우화로서, 즉 이 안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을 수 있는 글로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몇몇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길 원하고 있으며, 또 나의 이런 솔직함에 대해 모두들 고맙게 여겨 주길 기대하는 바이다.
(P.149)



  나는 내 스승들로부터 해방되는 나이가 되자 학교 공부를 집어치워 버렸다. 남은 청년 시절을 어행하는 데 사용하면서 이곳저곳의 궁전과 군대를 관람하고, 온갖 기질과 신분을 지닌 사람들을 방문하면서 갖가지 경험을 거듭하며, 운명이 나에게 몰아치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내 스스로를 시험하려고 했고, 내 앞에 나타나는 온갖 일들로부터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반성ㅎ애 보았다. 왜냐하면 학자가 서재에서 하는 추리보다는 자기에게 소중하고 판단을 잘못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일에 대한 추리 속에서 더 많은 진리를 찾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56)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라는 것, 그리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리에 대해서는 그 발견자가 민족 전체라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으므로, 그 진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 진리성이 만족스럽게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 사람의 견해를 따라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P.166)



  이런 이유로 나는이 세 가지 것의 장점을 겸비하면서 그 결함을 가지 않는 어떤 다른 방법을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첫째,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조금도 의심의 여자가 없을 정도로 명석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지 말 것.
  둘째, 검토할 여러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본래 전후 순서가 없는 것에서도 순서를 상정하여 나아갈 것.
  끝으로,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
(P.168)



  나는 오히려 이런 학문의 원리는 모두 철학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철학에 있어 나는 아직 아무런 토대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무엇보다도 우선 철학에 있어 확실한 원리를 설정하는 일에 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 이때 나로서는 속단과 편견을 가장 경계해야 했기 때문에, 이 작업을 수행하기에 앞서, 나는 전에 받아들인 그릇된 의견을 모두 정신에서 뿌리째 뽀바 버리고, 훗날 추리의 재료로 삼기 위해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며, 규정된 방법을 더욱 확실히 사용할 수 있도록 그것을 계속 연습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다.
(P.172)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 감각은 종종 우리를 기만하므로, 감각이 우리 마음 속에 그리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했다.
(P.184)



  나는 신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세계도 없으며, 내가 있는 장소도 없다고 가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상할 수는 없고, 오히려 반대로 내가 다른 것의 진리성을 의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게 귀결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P.186)



  사람들이 보통 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주요 난제와 연관해서 나를 만족시킬 만한 수단을 짧은 시간에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몇몇 법칙들도 알게 되었다. 이 법칙들은 신이 자연 속에 확립시켜놓은 것이고, 또 그 개념을 우리 영혼 속에 각인시켜 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반성만 한다면 세계에 있는, 또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그 법칙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이 법칙들로부터 어떤 것이 귀결되는지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전에 배웠떤 혹은 배우기를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중요한 다수의 진리들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P.196)



  어떤 것을 남에게 배울 때에는자기 스스로 생각해서 하는 때만큼 잘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지금 우리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주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들에게 내 의견 몇 가지를 설명해 본 적이 있는데, 내 말을 듣고 있는 동안은 아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입으로 그것을 말할 때에는 거의 항상 다르게 변색이 되어 내 의견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버린 적이 잇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자리에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내가 직접 발표하지 않은 것은 결코 내 의견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P.228)



  <철학의 원리>의 불역판 서문용으로 데카르트가 피코 신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중에는 학문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순서'를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그 첫째는, 아직 완전히 지식 혹은 참된 지식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품행을 지도할 수 있는 '잠정적' 도덕 규칙을 절정해야 한다는 것이도, 둘째는 강단 논리학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게 해 주는 '참된'논리학을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는 이 발견의 논리학을 통해 '참된'철학, 즉 지혜의 탐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P.304)



철학함이 지헤의사랑과 다름아니라면, 참된 철학은 바로 이성의 올바른 지도에 달려 있다. 바로 여기에서 철학과 방법의 불가분성이 드러난다. 방법 없는 철학함은 맹목적이고, 지혜 없는 방법은 공허할 뿐이다. 맹목적인 철학함, 공허한 방법은 데카르트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이고, 이 비판은 당대 철학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P.306)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천천히 걷되 곧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뛰어 가되 곧은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먼저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둔한 정신을 갖고 있더라도 방법에 의해 올바로 지도되기만 하면 확실한 지식을 획득할수 있는 반면에, 방법이 없이 그저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은 결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입장이다.
(P.307)


  <방법서설>에서는 앞의 네 가지 규칙이 아주 짧게 언급되고 있는 반면에, <규칙들>에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이 두 책의 특성을 살펴 보면 금방 드러난다. 후자가 오직 방법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전자는 그 외에도 다른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법에 대한 데카르트는 논의는 <방법서설>보다는 <규칙들>에서 훨씬 자세하게 개진되어 있다. 규칙을 그저 제시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정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일, 나아가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 방식까지도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방법의 정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규칙들>의 내용에 대한 검토가 불가피하다.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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