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
장강명 / 문학동네 / 188쪽
(2016.  8.  04.)


순서가 뒤섞인 순서 없는 이야기들 속에 자신만의 순서를 찾는 흥미로운 소설




  인간이란 건 결국 패턴이야. 남자가 설명했다. 앞에는 새장을, 뒤에는 새를 그린 부채를 상상해봐. 부채를 빠르게 돌리면 새장 속에 갇힌 새가 생겨. 신경회로 위에 의식이 떠오르는 과정도 그와 비슷해 전기신호들이 회로 속을 바르게 다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불쑥, 유령처럼, 밤거리의 네온사인들이 제각각 깜박이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동시에 켜지고는, 그 다음부터 함께 점멸하는 광경을 상상해봐.
(P.8)



  우주에는 시작이 없어. 남자가 대답했다. 우주는 마치 볼펜과 같은 거야. 그냥 하나의 덩어리이야. 볼펜은 길쭉하게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볼펜에 양끝이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사실은 볼펜이 공기와 닿는 모든 면이 다 볼펜의 끝이야. 그 모든 접점에서 볼펜이 시작하고 끝나는 거야. 우주도 비슷해. 시공간연속체가 무와 만나는 지점이 있지. 거기서 우주는 시작하고 끝나. 그 안쪽에는 우주 알이 있어. 그 바깥쪽에는 우주 알이 없고.
(P.10)



  학생들은 학교에 있을 때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나 벌을 더 닮았다. 교사들은 지친 로봇 같았다. 운동장은 재래시장의 늙은 상인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대낮을 견디다 하교시간 즈음애서 제 혈색을 되찾았다. 운동장의 성별은 아마 남성인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친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 즐거워했으니까. 운동장은 신화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해 질 무렵부터 슬슬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해 밤이 되면 귀기를 몸에 둘렀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다시 사소하고 조잡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P.30)



  마지막에 아버지랑 딸이 꼭 만나야 하는 거야?
  만나야지.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이런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니면 좀 곤란하잖아.
  하지만 생각해봐. 그 아버지와 따른 서로 못 본 채로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았어. 그러다가 마지막에 만나는 건 겨우 십 분 정도야. 그 십분으로 인생이 해피엔딩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되는 거야?
(P.86)


  전망대도 운동자과 비슷했다. 바깥 하늘이 붉어지자 조금씩 마력을 얻었다. 여자의 시간이 제 속도를 조금 잃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인간들의 현재와 미래는 기묘하고 쓸쓸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와 벌을 더 닮았다. 여자는 제대로 된 순서에 대해 생각했다. 도시는 점점 빛으로 된 암호가 되어 갔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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