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철학사상』별책 제2권 제3호)
2003년 / 윤선구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 / 90쪽
데카르트의 많은 저서 중에서도 <방법서설>은 가장 기본적인 저서에 속한다. 이 책은 철학만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학문 전체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고, 무엇보다 절대적인 진리의 가능성을 확신하는 합리론자로서 데카르트의 신념과 이성을 신뢰하고 자신의 이성에만 의지하겠다는 근대적 정신이 명확히 표출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포함한 일반 학문의 연구자 그리고 일반교양인들 까지도 반드시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다.
<방법서설>은 데카르트가 1636년에 쓴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라는 다소 긴 제목이 붙어 있는 책의 첫 번째 부분이다. 통상 첫 번째 부분만 독립적으로 떼어내어 <방법서설>이라 이름하여 출판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방법서설>의 원 제목은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인 셈이다. 책의 제목으로만 보면 이 책은 방법에 관한 논고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히 방법에 관한 논고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까닭은 이 책이 6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학의 방법, 즉 이성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규칙에 관한 내용은 2부에서만 다루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P.3)
제1부에서는 기존학문과 관습에 대하여 비판하고, 참된 인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2부에서는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해 이성을 인도하는데 적용되어야 할 규칙, 즉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방법과 이 방법을 어떻게 고안하였는지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고, 3부에서는 이 방법을 적용하여 참된 지식을 얻기 전에라도 실천적인 행동은 해야 하므로 이때 필요한 임시방편적인 행동원칙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4부에서는 후에 <성찰> 에서 상세히 서술하게 될 철학의 제일원리, 정신으로서 자아의 존재, 그리고 신존재 등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인식과정이 간략히 서술되고 있고, 5부에서는 <방법서설>저술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지만 이미 저술이 완료되어 있던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에 대한 내용과 혈액순환 등 동물학 관한 내용 및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한 내용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6부에서는 <세계와 빛에 관한 논고>는 출판하지 않았으면서, 마찬가지로 자연학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책인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이라는 책은 왜 출판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이 담겨있다.
(P.3)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좁은 의미에서 철학에 대한 방법론이 아니라 자연학 나아가 학문 일반의 방법론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이성을 인도하는 규칙에 따라,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철학의 제일원리로 불리는 최초의 확실한 인식인 자아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과, 자아의 존재와 정신 안에 존재하는 신과 물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와 본질에 관한 인식, 그리고 물질세계의 존재와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도출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확실한 인식으로서의 자연에 관한 인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P.4)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오류에 빠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인간은 누구나 이성사용을 올바로 인도하기만 하면 확실한 진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고, 이성 사용을 인도하는 규칙을 마련하고 이를 진리를 인식하는 방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P.20)
데카르트의 학문탐구 방법은 그의 기존학문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개발되었다. 즉 그의 방법론은 기존학문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따라서 그의 기존 학문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면 방법에 대한 데카르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기존 학문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세 가지의 기준에 따른다. 첫 번째 기준은 일상적 삶에의 유용성이고, 두 번째 기준은 이성을 통한 학습가능성, 그리고 세 번 째 기준은 확실성이다.
(P.23)
데카르트는 도덕을 중요시하였던 까닭에 보편적인 회의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도덕적 실천은 한시도 중단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잠정적인 도덕규칙을 설정하기도 했다. 그가 세운 잠정적 도덕규칙은 네 가지인데, 첫 번째 규칙은 자기 나라의 법률과 관습, 그리고 종교를 존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 실 생활에서 취하는 온건한 입장을 따르자는 것이고, 두 번째 규칙은 아무리 의심스런 것이라도 일단 따르기로 결정했으면, 확고하고 결연한 태도를 취할 것, 세째 운명이나 세계의 질서보다는 나 자신과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 네 째는 세상 사람들이 종사하는 직업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자는 것 등이었다.
(P.27)
데카르트는 기존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혹시 실생활에 속하는 것에서 확실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실생활에 속하는 것은 잘 못되면 즉시 손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잘 못된 추리에 대해서는 즉시 시정하려고 할 것이며, 따라서 학문에서 보다 실생활에 속한 것에서 더 확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학교를 마친 후 세상을 여행하면서 여러 나라와 지방의 생활관습들을 경험하게 되는 데, 이를 통해 그가 얻은 결론은 나라나 지방마다 생활 관습이 다르다는 것이었고,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이며, 따라서 확실하게 보이는 관습이나 선례도 실은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려면 전통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이성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P.30)
데카르트가 의미하는 양식이란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능력, 다시 말하면, 참된 것, 즉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누구나 이 인식능력을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누
구나 진리를 인식하기에 충분한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학자들이 지금까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식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성이란 소유하고 있는가 소유하지 않는가를 구별할 수 있을 뿐 더 많이 소유하는가 더 적게 소유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성은 지능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P.32)
데카르트에 의하면 인간은 인식능력도 가지고 있고 인식대상도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인도할 규칙 또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P.36)
데카르트는 인간은 누구나 진리를 인식하기에 적합한 인식능력인 이성을 가지고 있고, 흔하지 않기는 하지만 이 이성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대상도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종종 진리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류에 빠지는 거나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의심스러운 이유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따라서 진리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인식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진리 인식의 충분 조건은 아니며, 진리를 인식하기위해서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장은 합리론의 특징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P.37)
데카르트는 <방법서설>보다 8년이나 앞서 집필했던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에서는 21개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원래 이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장은 12개씩의 규칙을 포함하여 총 36개의 규칙을 제시하려고 했었는데, 저술이 미완성으로 끝나, 21개의 규칙만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는 단지 4개의 규칙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데카르트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규칙이 필요하지 않고 단지 4개의 규칙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P.39)
데카르트의 학문체계에 있어서 형이상학은 가장 근본적인 토대에 해당한다. ꡔ철학의 원리ꡕ 불어 판 서문에서 언급한 나무의 비유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나무의 뿌리에 해당한다.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내용은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은 인식의 측면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문제이다. 여
기서 데카르트는 자아와, 신, 세계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는 이 세 가지 대상에 대한 관념이 정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에 대응하는 외적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두번 째 측면은 존재론적 측면으로 무엇이 실체인가 하는 문제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과 <성찰>에서 실체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는데, <철학의 원리>에서 비로소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방법서설>, 1부 51절)이라고 규정되며, 이러한
실체는 정신과 물체 두 가지라고 보는 실체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P.46)
방법적 회의란 데카르트가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인식을 제거하고 확실한 인식만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의 인식에 대해 의도적으로 제기하는 의심을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인 근거를 추구하여 그 결론으로서 모든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는 결론적 회의와 구별된다. 방법적 회의는 오히려 결과로서 아무리 의심하려고 해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을 추구하려는 의심이기 때문이다.
(P.49)
방법적 회의란 확실한 인식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불확실해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봄으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확실한 인식을 쌓아가려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방법적 회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불확실한 기존 학문 전체를 허물고 확실한 철학, 즉 형이상학의 토대 위에 확실한 인식체계로서의 보편학문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기존 학문 및 선례와 관습 모두를 의심하는 것이고, 또 다른 차원의 방법적 회의는 좁은 의미의 철학, 즉 형이상학을 확고한 토대 위에 구축하기 위해 불확실한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이다.
(P.49)
나의 존재에 관한 인식은 최초의 확실한 인식이며, 악마의 존재 가정 하에서도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인식이다. 만일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데카르트의 확실한 인식만으로 이루어진 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철학의 제일원리”라고 부른다.
(P.57)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신 관념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신을 “무한하고 영원하며 불변하고 전지전능한 존재”란 전통적인 신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러한 존재를 “완전한 존재”라고 이해하고 있다. 완전한 존재란 표현은 이의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모든 종류의 완전성을 다 가지고 있는 존재란 의미에서 완전한 존재라는 것과,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각각의 종류의 완전성을 최고의 정도로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완전한 존재라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완전성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안 된다.
(P.59)
데카르트가 신 존재 증명을 위해 확실하게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정신으로서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정신 안에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사실이다.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