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전처럼 읽기
정희진 / 교양인 / 312쪽 / 2014
(2016. 08. 08.)




  나에게 책 읽기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임을 주는, 말하기 치료와 비슷한 '읽기 치료'다. 간혹 내글이 다소 어둡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읽는 책은 상처에만 관여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삶에서 기쁨이나 행복은 없냐고 묻는다. 왜 없겠는가.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냐는 것이겠지. 행복과 불행은 사실이라기보다 자기 해석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독서는 이 해석에 결정적으로 관여한다.
(P.14)



  책은 중립적이다. 중요한 것은 무관해 보이는 책들 간의 관련성을 읽는 이가 어떠게 판단하느냐이다. 독자의생각에 다라 무관한 책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는 방법이 아는 내용을 결정한다. 별개로 존재하는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의 구분도 없고 개별 학문의 구별은 더더욱 없다.
(P.15)



  자기 전공보다 자기가 공부하는 학문이 생겨난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먼저다. 학문이 생겨난 이유와 문제의식에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전공의 전제와 맥락을 모르게 된다. 이때 지식의목적은 해결로 전락하고 앎이 아니라 정보만 소유하게 된다.
(P.16)



  좋은 글, 빼어난 글, 읽을 만한 글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논문(학문?)과 '잡문'의 구별을 지양한다. 그리고 이를 구분하는 사람이수록 그 지성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다. 글은 정치적 입장과 문장력으로 구별되는 것이지 학문, 잡문, 예술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트로트와 클래식에는 위계가 없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수준이 아니라 기호의차이다. 이와 달리 글은 질적 차이, 수준의 차이가 크다. 좋은 글은 읽는 이의 정치적 입장이나 기호와 상관없이 합의된다.
(P.17)



  독서는 내 몸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 텍스트를 통과하기 전의 내가 있고, 통과한 후의 내가 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해 독후의 감이다. 통과 전후 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경우도 있고, 다치고 아프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고전'이다.
(P.19)



  어떤 책은 읽는 동안 그러저럭 시간이 잘 가지만 읽고 난 후 별 다른 변화가 없다. 이런 경우를 킬링 타임용이라고 한다. 반면, 다양한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는 통과 의례도 있다. 여운이 남고, 머리속을 떠나지 않으며, 괴롭고, 슬프고, 마침내 사고방식에 변화가 오거나 인생관이 바뀌는 책이 잇다. 즉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책이 있다. 이것이 자극적인 책이다. 그런 책은 여러 번 읽고 필사를 한다. 번역서인 경우에는 원서를 구해서 역시 필사한다. 필사를 하면, 최소 네번 정도 읽게 된다. 당연히, 읽을 때마다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내 몸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책을 쓴 작가보다 더 '내 것'이 된다.
(P.19)



  모든 책은 각각의 위치에 쓰인 것이지, 조감도는 없다. 따라서 책의 내용은 진리도 진실도 사실도 아니다. 아니, 사실이나 진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독자는 사용자가 되었다. 원래 지식은 쓰고 없어지는 소비재지, 간직해야 할 보물이 아니다. 사용자는 지식을 습득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할 뿐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지식을 몸에 구조화하는 데 사용하면 된다.
(P.23)



  내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을 요약해 본다.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epoche).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P.24)



  책 읽기는 책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입체화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어느 순간/어떤 내용과 접속하는가에 다라 다양한 사건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한 권을 읽어도 열 권을 읽는 사람이 있고, 열 권을 읽어도 한 권도 못 읽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P.27)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극중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도적인 시점이 있다. 대부분의 관객은 그러한 시선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작가가 비교적 집중하지 않는, 그러니까 그 자체가 아니라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인 주변인, 조연, 엑스트라에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환기하고 동일시하는 관객은 드물다. 그러나, 주인공만이 아니라 주인공을 주인공이게 하는 주인공과 타자(다른 인물, 동물, 사물, 자연)의 관계에 집중해서 텍스트를 읽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주제와 줄거리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근본적으로는 다른 정치적 세계(범주)가 만들어진다. 텍스트 자체도 감상문도 달라진다.
(P.298)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될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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