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로렌조의 밤, 체칠리아는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오래전 그날, 6살의 로렌조의 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들려준다.

독일군의 지배하에 있던 작은 마을. 미군이 진군하여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후퇴를 앞둔 독일군은 마을을 폭파시키겠다 위협하고, 성당의 안전만은 약속받은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성당으로 피신하자고 설득한다.

그러나 늙은 농부 갈바노는 독일군이 우리를 그냥 살려 둘리가 없다며,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다음날 새벽 서로 작별을 나눈다. 성당으로 향한 이들과, 검은 색옷으로 갈아입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

어린 체칠리아는 마을이 폭파된다는 것도 불꽃놀이처럼 느끼며, 그저 하나의 놀이처럼 즐거워한다.

드디어 폭음 소리가 들리고, 마을 사람들은 집의 열쇠를 버리고야 만다, 슬퍼하며. 영화는 마을이 폭파됨을 단지 소리와 무너진 시계탑(맞나?) 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날 밤이후, 다시 길을 떠난 그들은 수박 서리도 하고, 파시스트와 마주쳐 몇몇이 죽기도 한다.

산달이 가까워온 임산부는 다시 마을로 되돌아가고, 그녀를 데려다주려는 사람들과 다시 마을로 돌아가려는 사람들과의 또다른 이별을 뒤로하고 사람들은 길을 떠난다.

다시 마을로 돌아간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있다. 열려있던 성당의 문이 독일군에 의해 닫히고, 성당은 폭파당한다. 그리고 부상당한 이들과 죽은 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죽은 (다시 마을로 돌아온) 임산부를 부축하던 여인은 도와주려는 신부의 손을 냉정히 뿌리치고 수없는 말을 담고 있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돌아선다. 힘없이 주저 앉은 신부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 길을 떠난 사람들은 미군이 아닌 저항군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들을 찾아가 함께 한다.

그리고 노오란 추수가 한창이었던 그 밀밭에서 독일군과의 전투가 벌어진다. 서로 죽고 죽이고.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는 서로를 쏴 죽인 독일군과 저항군이 같이 쓰러져있는 곳으로 죽은 이들을 발견한 독일군과 저항군이 함께 슬퍼하다가 서로 싸우던 장면.

어린 체칠리아는 그 속에서 울며 귀를 막고 언젠가 길에서 엄마가 알려주던 주문을 외운다.

저항군과 싸우던 이들은 독일군이라기 보단 파시스트들이다. 같은 나라의 사람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아이를 잃은 파시스트가 괴로워 울부짓다가 결국은 스스로 총을 쏴 죽은 장면은 서로가 총구를 겨누던 그 시절을 대표하는 장면일 것이다.

전쟁을 다룬 영화이지만, 영화는 그렇게 잔인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아마도 오히려 영화가 즐겁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영화의 시점이 어린 6살의 체칠리아의 시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을 때까지 체칠리아는 그날의 성 로렌조의 밤을 잊지 못할 것이고, 나는 쉽사리 로렌조의 잠을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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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야, 포스터를 이해했다. 정확히는 마지막을 보고 나서.

이 영화에 대한 무수한 혹평들에도 불구하고, 난 좋았다. 무섭지 않아서 좋았다기 보단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어설픈 마무리와 연기력의 부재는 안타깝지만.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영언은 죽음을 맞이하고, 선민은 영언의 목소리를 너무나도 간단히 인정해 버리고 만다. 제대로 방황조차 하지 않고.

점점 사라져 가는 영언의 목소리는 선민이 점점 영언을 지워가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언은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선민이 안타깝고, 그렇게 멀어진 사이로 들어오는 초아가 밉다.

착하기만 한 귀신인줄 알았던 영언의 잃어버린 혹은, 지워버린 기억 속의 영언은 잔인하다. 너무나도 철저히 자신 밖에 모르는 철없는 아이.

'귀신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라던 초아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영언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버려버린 친구가 밉다. 결국은 그렇게 초아를 죽인다.

마지막 장면, 어쩌면 영언은 이제 선민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결말.

그리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지하실에 갇힌 초아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무섭진 않았지만, 약간은 섬칫했던 그렇지만 어설픈 연기로 인해 빛을 바래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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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매스컴에 대한 실랄한 비판을 함께 싣고 있다.'고들 하더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방송국은 ‘좋은나라 운동본부에서 추진하는 범죄없는 세상 만들기(?)의 일환으로 정유정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살해된 미모의 카피라이터 정유정. 그리고 현장에서 붙잡힌 범인 김영훈(혹은 정하연). 사건 발생 48시간 동안 계속되는 수사와 수사과정 생방송.

 

급기야 방송국은 굿 이라는 퍼포먼스(?)마저도 내세워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해 한다. 그리고 검찰은 그 쇼에 동참하게 된다.

 

수사극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확히 하자면 영화는 그렇게 하나의 부류로 매기기엔 너무나 다양한 장르의 형식을 띄우고 있다. 혹자는 영화가 호러로 끝나고 있다고 하지만,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연극처럼 막을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연극적이라는 사람들의 혹평은 조금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문제점은 영화가 자주 스스로 그 흐름을 끊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설이라는 막에선 최연기 검사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더군다나 (나에게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차승원이라는 배우보다 찬조출연(?)정재영의 존재감이 더 컸다는 게 문제다. 꾸러기의 대사나 상황들이 자꾸 떠오르면서 웃음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 발생 2시간 후, 하필이면 현장에서 붙잡혀 버린 범인(으로 예상되는) 김영훈과 그가 범인임을 확신한 검사 최연기의 대결, 정도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의 예고편과 포스터가 문제다. 확실히 영화의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김영훈 그가 범인 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도.

 

아홉군데나 칼에 찔려 죽었지만(맞나),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검시의 결과, 사인은 약물이다.

 

그때부터 수사는 난항에 부딪힌다. 점점 김영훈이 범인이 아닌 것처럼 나오는 증거와 정황들. 그리고 급선회된 수사의 방향.

 

영화를 보고나서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봐도 모르겠는건, 묘한 그 마지막의 미소. 도대체 김영훈은 왜, 정하연은 왜, 누이를 죽이려고 했을까? 왜 그는 누나가 아니라, 누이라고 부르는 걸까?

 

정하연은 왜 김영훈이 되어있는 것일까?

 

최검사와 성검사는 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증거가 너무 결정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도대체 왜 그것들을 제대로 써먹지 않았던 걸까?

 

생각하니 열받는다. 왜? 왜? 왜? 두번이나 보았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물음 들이란... 혹자는 김영훈의 마지막 미소가 돈때문이라 했지만, 난 그건 아니라고 보니까 해결되는 물음들이 없다.

 

어쨌든, 영화는 재미있었다. 마지막으로 씨네 21의 어느 블로거가 썼던 리뷰를 빌리자면..

 

'김지수씨,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그녀가 너무 좋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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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골을 상징하는 것은 여일이라는 인물이다. 영화는 이미 오프닝에서부터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떨어지는 스미스의 비행기를 해맑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여일 로부터 영화는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깊은 산골에 있는 동막골은 수많은 세월을 바깥의 사람들에게 숨겨져있다가 비행기 추락을 계기로 마을로 들어온 이방인 스미스와 여일과 만나게 된 인민군 리수화 상위 일행, 약초꾼을 따라 들어온 국군 탈영병 표영철 소위 일행에게 그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서로 융합되기 힘들었던 세 일행들은 점차 동막골 사람들로 인해 점점 동화되어 간다. 그리고 그들은 잃었던 순수를 되찾아 간다. 그리고 그렇게 영화는 순박한 동막골을 보여주며 마지막 장면의 이유를 해명하려 든다.

 

장진 감독의 원작을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는 장진 감독의 분위기를 약간 풍기기는 하지만, 사실은 신인인 박광현 감독의 분위기도 녹아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극에서 표현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동막골 바깥으로 유학다녀온 김선생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총이 뭔지, 전쟁이 뭔지, 전혀 모른다. ,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감독은 일..러 마을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적이 뭔지 모르기에, 싸움이 뭔지도 모르기에 그들은 인민군과 군군을 하나로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 일병 구하기의 일환으로 보내진 연합군 병사들은 마을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동막골의 상징인 여일이 그들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 그것이다. 우리의 국군과 인민군 연합군들이 목숨을 걸고 동막골을 지켰지만, 더 이상의 폭격이 없더라도(스미스의 노력으로 인해) 이미 동막골은 칩입해왔던 그들로 인해서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동막골의 주민들은 손들어!라는 말에 오른 손을 들어요? 왼 손을 들어요?라는 말을 내뱉지 못할 것이고, 총을 보고 그 앞에서 태연하게 서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동막골의 상징인 순수함이 깨어짐을 의미한다.

 

죽은 5명의 군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노력했던 동막골은 이미 그들의 죽음과 동시에 동막골의 순수함도 죽었던 것이다.

 

작위적이라고 말들이 많았지만, 애초부터 이 영화는 판타지였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판타지. 그러므로 마지막이 작위적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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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전 별다른 기대없이 아이스 에이지를 보았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난 정말 너무나 감동했었고, 마구 마구 홍보하고 다녔었다. 아이스 에이지의 제작진이 만든 영화기에 기대하고 있었다. 홍보포스터의 이완 맥그리거니, 문대성이니,는 나완 상관이 없었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보았지만, 뭐랄까? 아쉬운 점도 많이 남는다. 유명한 패러디 장면도 많이 나오지만, 중요한 것은 그 두가지 패러디의 주인공 팬더가 로빈 윌리암스가 아니었다면 빛을 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로드니는 식당 접시닦이 로봇의 아들이지만, 로봇시티의 빅웰드처럼 발명가를 꿈꾼다. 그러나 작은 마을에선 자신의 꿈을 펼치기 힘들고 좌절(?)끝에 로봇시티에 가기로 한다. 아버지의 격려와 믿음을 받고.

 

그러나 힘겹게 도착한 로봇시티는 로드니에겐 정말 별세계 같은 곳이다. 마치 청룡열차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스릴이 있는 대중교통(?)을 타고 드디어 빅웰드사에 도착했지만, 기다리고 존경하는 빅웰드씨는 없고, 욕심많고 돈만아는 마마보이 라쳇이 빅웰드를 움직이고 있다.

 

라쳇의 혹은, 그의 어머니 가스켓에 의해 이제는 폐기될 위기에 처한 고물 로봇들을 구하려고 로드니와 친구들은 힘겹게 싸우지만, 캐피의 도움을 받아 찾아간 빅웰드의 패기를 잃어버린 모습에 자신조차도 좌절하고만다(부모의 믿음 만큼, 아이에게 소중하고 격려가 되는 것이 어디있으랴). 결국,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아버지로 인해 자신감을 되찾는다. 그리고 빅웰드의 참여로 인하여 로드니 일행은 더 자신감에 차있다. 그리고 로봇 세계는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머리아프게 애니메이션이 현실을 비판하고 어쩌고는 생각하지 말자. 사실은 귀찮다.

 

영화는 완..히 전형적인 영웅물이지만, 아이들을 위한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흠이라고 볼 것도 없다.

 

, 이완 맥그리거의 로드니, 목소리를 들으면서 아일랜드의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겨우 얼마전에 본 영화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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