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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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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없는 제자는 없다’ 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자전적 소설《페터 카멘친트》를 시작으로,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등 수많은 작품으로 전 세계인의 정신적 스승이라 불리는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헤르만 헤세의 실제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책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고 있으면 헤르만 헤세의 숨겨진 스승은 ‘자연’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해에 걸친 망명 기간 동안 기나긴 겨울이면 추운 방 안에 있는 작은 벽난로 앞에 앉아 편지와 선물들을 불태웠다. 장작을 불 속에 밀어 넣기 전에 그 주머니칼로 이리저리 다듬기도 하고, 불꽃 속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의 삶과 나의 야망, 나의 지식과 나의 자아가 천천히 송두리째 타들어가 순수한 재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훗날 그 자아나 야망, 허영과 인생의 온갖 혼탁한 마력이 또다시 나를 얽어매더라도 그것에 흔들리지 않을 하나의 은신처를 이제는 찾았다. 한 가지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터전을 만들고 소유하는 일이 나한테는 평생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 고향이 바로 내 가슴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p.32)

 

 

그에게 ‘자연’은, 유년 시절부터 인간과 자연의 근원에 대해 사색하게 해준 공간이었고, 양대 세계대전 사이에서 독일 내부의 애국주의를 거부하면서 살게 된 준망명의 삶에서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해준 공간이었다. 훗날 자아나 야망, 허영과 인생의 온갖 혼탁한 마력이 또다시 자신을 얽어매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은신처가 존재한다는 진리를 말이다.

 

그가 ‘자연’이라는 스승에게서 배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인간 헤르만 헤세를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긴 삶의 여정을 나와 함께 지나온 주머니칼이 없어진 것을 이토록 아쉬워하니, 나는 영웅적이지도 현명한 이도 못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 영웅도 현자도 되고 싶지 않다. 그런 걸 위해서라면 내일도 시간은 있을 테니까. (p.32)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p.218-219)

 

영웅이나 현자를 위해서라면 내일도 시간이 있으니 오늘의 시간은 정원에서 보내고, 아름답게 사는 것, 바로 이 한 가지만은 늘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정원사의 일을 놓지 않았던 인간 헤르만 헤세. 어쩌면, 그가 평생 정원사의 일을 놓지 않으면서 가꿨던 것은 정원을 넘어 그의 내면이 아니었을까. ‘자연’이라는 은신처 속에서 ‘원예’라는 단순한 노동을 통해 찾아낸 삶에 대한 놀라운 성찰들이 그의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다져진 그의 내면이 바탕이 되어 <데미안>이라는 명작으로 대표되는 여러 작품들을 쓰는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이라는 스승을 둔 헤르만 헤세와 대문호 헤르만 헤세를 제자로 둔 ‘자연’을 생각하면, 그가 ‘정원에서 보냈을 시간’들을 탐하고 싶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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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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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독서 방법이 다양하듯, 책을 다루는 법 역시 다양하다. 나로 예를 들자면, 새책은 정말이지 새책처럼 읽는다. 책 표지가 때 타지 않게 책 포장지로 싸고, 책장을 접지 않고 책갈피를 이용하며, 메모는 포스트잇을 이용해서 메모해 붙여둔다. 물론 책 앞장에 책에 대해 기록할 때도 있고, 특히 선물을 하거나 받은 책에는 글을 남기는 편이지만 대부분의 책은 이렇게 다뤄서 읽고, 보관한다. 헌책도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새책에 가깝게 손질해서 새책처럼 읽고 보관한다. 책에 밑줄 쳐가며, 접어가며, 메모해가며 읽어야만 진정한 책 읽기가 아니며, 책을 깨끗이 본다고 해서 진정한 책 읽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건 어디까지나 책을 대하는 개인의 성향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읽고 있노라면, 내 책 보관 방법이 어떠하건 간에 당장이라도 읽고 있는 책의 앞장을 펼쳐서 글을 쓰고 싶어진다.

 

 

때로는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란 말에 대답하는 대신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에 대답할 수 없어서, 라고 책장 앞에 글을 씀으로써 대답을 대신하고, 때로는 나를 공정하게 인도해달라고 진리에게 소원하고, 때로는 밥값으로 책을 샀다, 이틀간 밥 안 먹기, 책 읽기 두렵지만 그래도 읽고 싶다 쓰고, 때로는 많이 공부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용기있게 뜻을 펴는 사람이 선비라고, 선비에 대해 쓰는 그런 글 말이다.

 

이름을 다 알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전 책 속에 남긴 진실한 고백의 글씨들이 없었다면 이 책 역시 단 한 쪽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엄밀히 말해 내 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책이다. (p.23)

 

저자의 말이 맞다. 이 책이 있기 까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권 한 권에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진실한 고백이 담긴 헌책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을 이렇게 오롯이, 한 권의 책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히 저자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헌책들을 지나치지 않고 모으고, 생각하고, 남긴 저자의 헌책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가격을 비교하며 책을 산다. 그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서점에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껴본 다음 산다. 그보다 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헌책방에 모인다. 헌책방은 오래된 책을 사는 곳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곳은 책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소다. (p.14)

 

인터넷으로 가격을 비교해가며 책을 살지라도 한 권의 책을 더 사고 싶은 나로서는 조금 억울해했던 구절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나서는 저자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아,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던 거구나. 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헌책방에 모여 책만 보는게 아니었다. 헌책이 새책이던 시절, 이름 모를 누군가에 의해 읽히고, 청춘과 열정과 진심이 손글씨로 쓰였다가 시간이 흘러 헌책방에서 마주하게 된 헌책을 본다. 그 헌책 속에서, 책의 본래 주인이 책에 글을 남기던 그 찰나의 청춘을, 열정을, 진심을 읽는 것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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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 다시, 독서의 계절이 왔다. 

책을 가장 많이 읽는 달이어서가 아니라, 산책하기 딱 좋은 가을 날씨 덕분에 너도 나도 외출하기 바쁘다보니, 가장 안 읽어서 '독서의 계절'이라는 9월.

그런 9월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은 3권의 책을 꼽아봤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윽고 슬픈 외국어』

 

- 1996년에 발행된 하루키의 에세이. 원제 <슬픈 외국어> 앞에 '이윽고'가 붙고,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가 함께 수록되어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하루키가 번역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태엽 감는 새 1~4>의 집필을 위해 말 못할 고통을 자초했던 4년 반의 미국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라던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터키어, 스페인어까지 배워가며 유렵 여러 나라와 미국 등 외국을 전전하면서

그 힘들고 고통스런 방랑 생활을 왜 계속 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는 과연 슬픈 외국어에 둘러싸여 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경험들을 얻었을까.

또, 그 과정에서 하루키는 어떠한 철학적 명상을 했을지도 궁금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하루키의 에세이는 하루키의 소설만큼이나 재밌다.

 

 

김서령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 

 

- 지난해 읽은 장편소설 <티타티타>로 기억되는 소설가 김서령님의 에세이.

그녀의 소설 속에 깃들었을, 그녀의 쫄깃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책에 관심이 갔다.

오로지 추억에 기댄 글들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늘 떠돌았다는 작가의 말 역시 흥미로웠다.

책 표지를 보고 있노라면, 건조한 우리네 일상에 어떤 일요일이 다가와 촉촉하게 해줄지 궁금해진다.

 

헤르만 헤세『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꿨던 헤세의 에세이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에 이어서, 이번엔 지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한

에세이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다. 보기에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한 에세이라 그런지, 두 권을 함께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이 끌렸다.

헤르만 헤세가 평생 동안 자연, 향수, 인간, 예술, 여행에 관해 쓴 글을 추려서 묶은 이 책은, 평생을 고향과 자연에 대한 사색, 인간과 예술에 대한 고뇌

사이에서 살았던 작가이자 자연인임을 느낄 수 있게 해줄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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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혜영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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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속죄>, <N을 위해서>, <야행관람차> 등의 작품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작가, 미나토 가나에. 이번엔 ‘엄마와 딸’이다. 작가는 과연, 엄마와 딸에 대해 어떻게 썼기에 “이 작품 이후 작가를 그만 두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쓴 소설이다”라고 말한 걸까 궁금해 하며 이 작품을 읽었다. 읽고 나서는, 읽는 것도 불편했던 이 소설을 작가는 어떻게 썼을지 궁금해졌다.

 

한 여고생이 다세대 주택 정원에 쓰려져 있는 것을 어머니가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사고와 자살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조사에 착수했다는 신문 기사로 소설은 시작된다. 신문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어머니는 “금지옥엽으로 소중하게 기른 딸이 이렇게 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는 문장인데, 이어지는 ‘엄마의 고백’에서 엄마가 앞서 기사의 마지막 문장을 되풀이한다. ‘저는 딸아이를 금지옥엽으로 소중하게 키웠습니다.’라고. 흔히들 강한 부정의 표현을 강한 긍정의 표현이라며 받아들이곤 하는데, 강한 부정의 표현이 강한 긍정의 표현이 된다는 사실은 반대로 강한 긍정 또한 강한 부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뜻에서 신문 기사 속 엄마의 말과 ‘엄마의 고백’ 속 엄마의 말은 내게 강한 부정으로 들렸다. 그렇게 ‘강한 부정’이라 생각하며 ‘엄마의 고백’을 읽어나가는데, 이어서 ‘딸의 회상’이 이어진다. 엄마는 ‘고백’을 하고, 딸은 ‘회상’을 하는 두 사람의 시점이 교차되며 전개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엄마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성과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모성, 그리고 딸이 생각하는 모성이 전부 그려진 덕분에 모성에 관해 넓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읽는 내내 엄마의 고백에 드러난 모성이 불편했지만, 엄마가 된 딸이 ‘나와 이 아이가 같은 입장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문장에서, 나 역시 내가 가진 모성이 무조건적인 모성일 것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거창한 얘기는 못하고요. 그저 여자에게는 두 종류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오호라, 두 종류라니, 천사와 악마?”“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믿지 않는다고요. 더 간단한 존재, 엄마와 딸이에요.”“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p.228-229)

 

맞다. 우리는 ‘모성’에 관해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모성에 관해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스에서 접하는 부도덕한 모성에 관한 사건을 접하면서, 모성이 다 같은 모성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소설 속 엄마였다면, 나는 소설 속 엄마와는 다른 엄마였을까. 나의 엄마와 나의 딸 중 한 명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나는 주저 않고 딸을 구할까. 이 소설이 불편했던 이유는 바로 이거다. 모성에 대한 엄마의 고백과 딸의 회상 속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는 것.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모성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을까.

 

“아이를 낳은 여자가 전부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니에요. 모성이란 게, 여자라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성질도 아니고, 모성이 없어도 아이는 낳을 수 있으니까요. 아이가 태어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모성애가 싹트는 사람도 있을 게 분명하고요. 거꾸로 모성이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딸이고 싶고, 보호를 받는 입장이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무의식중에 자기 안의 모성을 배제하는 여성도 있어요.”“아하, 네가 말하는 엄마와 딸이란, 모성을 지닌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란 말이네. 그래서 미묘한 코멘트를 남긴 어머니 밑에서 자살을 시도한 딸에게 <만에 하나 운 나쁘게 모성이 없는 여자의 딸로 태어났어도 비관하지 말고 힘내라>, 뭐 그런 말이라도 해주려는 거야?”

“……그렇게 간단한 해답이 있었네요.” (p.229)

 

시간은 흐른다. 흐르기 때문에 엄마를 향한 마음도 변한다. 그럼에도 사랑을 애타게 원하는 존재가 딸이고, 자기가 애타게 원하던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주려는 마음이 모성이란 것 아닐까. (p.282)

 

이렇게 모성에 대한 작가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모성에 관한 치열한 생각과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모성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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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배진수 글.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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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이전에 웹툰으로 금요일을 처음 접했을 때, 떠오른 영화 대사가 있다.

 

“니, 감당이나 할 수 있겠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이끼> 속 이장 천용덕의 대사다. ‘감당이나’라는 말에서부터 감춰진 진실의 어마어마한 무게가 느껴지지만, 왠지 그 진실, 파헤치고 싶어진다. <禁曜日>을 처음 접했을 때, 내 느낌이 딱 이랬다. 감춰졌던 진실이 주는 그 불편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

 

꽤나 그로테스크한 그림체에 담긴 불편한 공포. 스토리는 궁금한데, 그림체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질 않았던 작품이었는데 그림체 때문에 스토리를 포기할 순 없다고 판단하고는 1회 ‘원룸’을 감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그림체는 더욱 그로테스크했고, 스토리 역시 기대 이상으로 탄탄했다.

 

감히, 누군가의 정서나 철학에 작디작은 파문이라도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 배진수 『禁曜日』작가의 말 中

 

작가의 말에 드러난 작가의 바람처럼, <禁曜日>은 불편한 공포와 기괴한 그림체로 다가와서 내 정서를 마구 헤집었다.

 

“꼭 나가야 하나? (중략) 어쩌면 난 동물이었을지도…….” (원룸 中)

“잘 선택해봐. 선택은 사소할지 몰라도 결과는 사소하지 않으니까.” (역행 中)

“그러다 문득, 문득 깨달았다. 내 삶에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지든, 나라는 놈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서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변할 리는 없다는 너무나 슬프고 또 무서운 사실을.” (역행 中)

“불현듯 내가 빠져 있는 딜레마의 정체를 깨달았다. ‘행복’이나 ‘만족’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불행’과 ‘불만’이 해소될 때 주어지는 반대급부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말이다. 즉,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은 결국엔 모든 소원이 사라진다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 (퍼펙트 월드 中)

“학생은, 언제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네요.” (카르마 中)

 

지극히 극단적이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바로 이 불편함이 ‘진실’이 아닐까. 마주하기 두려워서, 혹은 영원히 외면하고 싶은 진실.

 

무엇보다 이 만화가 무서운 이유는 이거다. 만화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이 만화를 읽음으로써 우리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나라고, 『禁曜日』 속 캐릭터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선택을 했을까. 이 책의 홍보 문구처럼, 생의 이면을 들출 용기가 없다면 이 책을 금(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정말이지, 니, 감당이나 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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