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가 되는 데 실패하고 음악원 피아노 선생으로 남게 된 에리카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도 어머니에게 ‘내 귀여운 회오리바람’이라고 불린다. 어머니에게 있어 딸은 남편(남근)의 부재를 채워주고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줄 유일한 존재이다. 어머니는 에리카의 생활 전체를 통제하고, 딸에게 ‘유일하고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될 것을 역설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한다. 자신과 딸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에리카가 옷, 구두, 장신구 따위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딸이 예쁘게 꾸미고 다녀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딸이 오로지 ‘자신만의 에리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어머니의 통제는 어려서부터 에리카에게 남들이 가진 물건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했고, 그것은 곧 자신이 갖지 못한 물건들을 파괴하고 그 소유자들을 학대하려는 사디즘 성향으로 이어진다.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지배로 인해 에리카는 사디즘뿐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마조히즘 성향도 갖게 된다.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면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기 몸을 베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그녀는 자해를 하는 권력자와 그 고통을 감수하는 순종적인 피지배자라는 두 가지 자아를 연출하며 사도마조히즘 성향을 드러낸다. 이런 에리카에게, 어느 날 제자인 대학생 클레머가 남성으로서 접근해오기 시작하는데……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한 건, '정한아(소설가)가 읽은 <피아노 치는 여자>라는 글 때문이었다.

 

 

*

 

20대의 어느 날, 이 책을 읽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입속에는 침묵이 가득찼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고, 나 자신조차 무서워 들여다본 적 없는 스스로의 심연을 보아보린 느낌이었다.

 

어떤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험이 된다.

감당할 힘 없이 진실을 마주했다가, 우리는 자멸해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미쳐버린 사람들도 알고 있다.

경고하건대 이 소설은 함부로 첫 장을 넘길 책이 아니다.

 

*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입속으로 침묵이 가득차게 만들었던 책을 경험해본 나로서는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알아서 선뜻 도전하기 어렵지만

그런데 또,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알기에 궁금하다.

 

과연 나는 함부로 첫 장을 넘길 책이 아니라는, 경고를 뒤로하고 시험에 빠져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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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화 '별은 어째서 떨어지지 않는 걸까?'에서 엄마 테라다와 아들 나오의 대화.


-(어린이집 앞)
-테라다인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엄마!
-맨날 늦게 데리러 와서 죄송해요.
자, 집에 가자.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안녕히 계세요.
-(밤하늘)
-나오, 저기 좀 봐. 별님이 참 예쁘네.
-엄마. 별님은 왜 하늘에서 안 떨어져?
-음... 글쎄, 왜 그럴까? 알았다!
떨어지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까봐 그런 거 아닐까?
-그렇구나~ 근데 만약에 떨어지면 어떻게 해?
-뛰어서 도망쳐야지~
-소중한 거 들고?
-그렇지~
-그럼 난 장난감 많이 들고 갈래.
과자도 이~따만큼 들고 갈 거야. 엄마는?
-엄마한테는 나오가 제일 소중하니까 나오를 데려갈거야. 그러니까 나오 짐이 많으면 엄마가 힘들어.
-그럼 내가 조금만 들고 갈게.
-그래, 착하구나.
-나오야,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기억해야 돼. 언제든 달아날 때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돼.

살아 있는 게 중요하니까. 별이 떨어져도 무조건 뛰어야 돼!
-알았어~~~
-자 얼른 집에 가자. 오늘 저녁밥은 햄버그스테이크야.

 

 


그리고 다음 화에서, 사표는 어떻게 쓰는 거지? 하고 고민하는 직장인이 나온다.

마음 같아선 쌓이고 쌓인 온갖 분한 일들을 다 써서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라고 한소리 내뱉은 다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보다 회사를 그만둬도 되는지가 문제라며 고민한다.

안 그래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직장. 자신마저 그만두면 다른 누군가에게 불똥이 튈 테고,

무책임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만 같다. 약삭빠르게 옮길 곳까지 정해뒀다고 하면 더더욱...
이런 생각 끝에 그는 그냥 꾹 참고 더 다닐까? 한다.

계속 잠을 깊이 못 자거나 식욕이 없다거나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회사원이라면 누구한테나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남은 동료들을 생각해서라도, 자신도 조금 더 힘을 내고 힘을 내서... 하는데 어느 날 밤의 하늘이 떠오른다.

 

"나오야,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기억해야 돼. 언제든 달아날 때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돼."

 

하던 엄마의 말씀이 떠오르는 남자. 그는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된 나오였다.

어릴 땐 그 얘기가 별이 떨어지면 도망치라는 얘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달아날 땐 뒤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날밤, 신문에 실린 작은 기사가 우연히 나오의 눈에 띄었다.

우주를 떠도는 떠돌이 행성이 발견되었다는 내용.

원래는 지구처럼 붙박이별 주위를 공전하는 별이었는데 다른 행성 중력으로 인해,

궤도에서 튕겨져나가버렸다는 떠돌이 행성. 둥

 

실둥실 자유롭게 떠도는 행성이 이 밤하늘 어딘가를 날고 있을 거라고 나오는 상상한다.

그리고 다시금 떠오르는 엄마의 말.

 

"살아 있는 게 중요하니까."

 

가끔은 엄마한테 얼굴 보여 드리러 집에 가야겠다고 혼잣말하고는, 나오는 사직서를 마저 쓴다.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나오를 데려갈 거라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생각해 조금만 들고 간다는 나오.

지혜롭게 교육하고, 그 교육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모자지간. <밤하늘 아래>에서 내가 제일 손에 꼽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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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라는 시에서, 가장 마지막 구절을 남겨두고 싶다.

전문을 남기려다, 마지막 구절만 맴돌기에 괜찮을 것 같다 싶어서.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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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10권을 한데 담아 반납하고 왔다.

몇권을 반납하고 또 몇권을 새로 빌려오던 내게는 다소 극단적인 반납이었다.

이젠 정말 계획한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도 있고,

집에 사둔 책들을 읽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도서관과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잘 읽으면 좋으련만. 이상하게 내 책 아닌 책들은 그리도 잘 읽으면서,

내 책에는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읽지 않고 쌓여가는 책들을 보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컸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와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 그리고 이영희의 어쩌다 어른은

사서 볼 생각으로 마저 완독하지 않았는데,

다음 주에 도서전에 가게 되면 전부는 아니어도 내 책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고 반납했다.

이러니 집에 책이 늘지,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연초에 읽기로 마음먹었던 책들과, 선물로 받은 책 그리고 내가 사둔 많은 책들을 읽을 시간이다.

9개월간 열심히 달려온 그 힘으로, 남은 3개월은 쉬엄쉬엄 읽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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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5-10-0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이예요. 저도 도서관 책은 반납해야하니깐 열심히 읽으면서, 막상 집에 있는 내 책은 멀리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당분간 도서관 책보다 제 책 위주로 읽으려 노력중이랍니다. ^^

해밀 2015-10-07 15:28   좋아요 0 | URL
집에 있는 책은 아무때나 읽어도 된다는 생각에 급한 마음이 없다보니...
한없이 멀리하게 되는 거 있죠ㅜㅜ 도서관 책은 반납일 맞춰 꼬박꼬박 읽고,
또 반납하러 갔다가 또 빌려오고... 그걸 또 반납일에 맞춰 읽고 반복이었는데
그걸 확 끊었더니 드디어 제 책을 읽게 되었네요... :)ㅎㅎ

제 책 읽다가 어느 날 다시 도서관 책 빌려 읽기 바쁠지도 모르지만,
제 책 읽으려고 노력 해야겠어요^^
 

 

시 할 차례라고 하던데, 맞아?

시는,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려고 있는 거야.

살면서 외롭거나 힘들거나 혹은 내가 하찮다고 느껴지거나 할 때,

아무 시집이나 한 번 읽어봐.

그럼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누가 본문 좀 읽어볼까?”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는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박인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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