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할 차례라고 하던데, 맞아?
시는,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려고 있는 거야.
살면서 외롭거나 힘들거나 혹은 내가 하찮다고 느껴지거나 할 때,
아무 시집이나 한 번 읽어봐.
그럼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누가 본문 좀 읽어볼까?”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는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박인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