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라고 묻는 내가 어쩌면 속물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왜 저 사만다라는 여인은 시릴이라는 생면부지의 아이를 온 마음을 다해 돌보고, 거두고, 건사하는가, 통속적인 고정관념으로 저 여인의 무슨 사연이라도 좀 나와 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세련된 문법을 가진 이런 영화에선 원래 안나와. 알아. 안나올거야.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그녀의 모습은 내게 너무 낯설다. 뭐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온전히 주는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신뢰가 필요하다고 믿는 나는, 저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호의를 베푸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실은 그렇게 그녀에게 자꾸만 이유를 묻는 내가 조금은 서글프다. 나의 마음의 결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악물듯, 눈물을 삼키며 페달을 밟는 소년이 있다. 자신을 떠났을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자전거를 팔아버렸을 리가 없다는 믿음이, 자신을 외면할 리가 없다는 믿음이 차례로 무너질 때마다 소년은 의연한 척 하지만 너무나 속상하다. '속상해 죽겠어' 라고 말하는 대신 '괜찮아'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리는 대신 페달을 밟는다. 표현하는 일에 서툴고, 웃는 방법을 잊었고, 상대방을 씩씩거리며 물어뜯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던 소년에게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냥' 사랑이다.
영화는 과장스럽게 그녀의 사랑을 미화하지도, 호들갑스럽게 그녀의 희생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흐르고, 견디고, 싸우고, 이해하며, 그 때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저 보여준다. 얻을 것 없는 사랑을 위해, 그녀가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적지 않은데도, 그녀는 묵묵히 감내하며, 자신의 사랑을 보라고 생색을 내지도 않는다.
세상에, 이런 사랑이라니.
그런데 그 사랑이 결국엔 누군가의 삶을 바꾸어내는 것이다. 세계의 일부이지만, 누군가에겐 세계의 전부인 삶이다. 단 한 사람의 삶이지만, 그것을 바꾸어 내는 일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닌 것이다. 돌이켜보면 세상이 그나마 좋은 쪽으로 움직이던 순간은 이렇게 누군가 묵묵히 어떤 것을 감당해주던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그 와중에 그러한 그녀의 사랑 앞에 '도대체 왜?' 라며, 자꾸만 물음표를 들이대는 나는, 아무래도 함량 미달로 아직 갈 길이 먼 사람이 아닐까. 혹은 함량 미달이라는 말로, 스스로에게 자꾸만 도망갈 길을 내어 주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