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비상식적인 것들이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존재해온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같은 크기를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비상식적인 상식이 상식을 비상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지극히 정상적인 한 사람을 미치광이로, 지극히 비정상적인 누군가를 사회에서 성공한 누군가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이 모순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예들을 극단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우리 옆에서도 버젓이 이러한 것들이 여전히 권력을 등에 업은 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답답해서 여러 번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후진 안양 CGV가 영화관 실내 공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안양 CGV는 극장 내 공기를 개선하라!) 경찰에 반항한다고 정신병동에 보내는 것이나, 유모차로 물대포를 막아섰다고 구속하는 것이나. 비상식적이긴 마찬가지. 다만 그것을 둘러싼 합리라는 허울이 좀 더 교묘해지고 있으니,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현실.
결국에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면에서 해피엔딩으로 보는 사람도 있건만, 나에게는 결코 이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평생 아들을 찾아 헤맬 수 밖에 없는 엄마에게는 그가 쟁취한 정의가 가져다주는 기쁨보다는 잃어버린 생명이 주는 안타까움이 더 클 수 밖에 없음을 알기에. 정신병동에서 나오자마자 자식의 사망 추정 소식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마음은 정신병원 안에서보다 더욱 처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참, 체인지링이라는, 동일 제목의 책이 있다. 오에겐자부로 작품인데, 처음에는 이 영화가 이 책을 작품화한건가 했었다는. (음, 영화화하기엔 좀 적절치 않을텐데. 하기도 했었지만) changeling이라는, '뒤바뀐 아이'라는 개념의 단어에서 착안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두 작품이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 영화 체인질링은 죽은 아이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평생 그 아이를 찾아다님으로서, 소설 체인지링은 새로 태어날 아이가 죽은 오빠가 뒤바뀌어서 다시 우리 앞에 올 선물같은 아이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죽은 자는 잊고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산자를 향해주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전자는 너무 처연해서, 후자는 너무 씩씩해서 슬픈 이야기. 망각의 은사가 절대 미칠 수 없는 우리 삶의 크디큰 상실들은 결국 이렇게 어떤 방식으로도 극복되기는 어려운 것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