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꼼시절 알던 S님을 만났다. 당시 나는 문학동을 맡고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리뷰어들 리스트가 몇 있었는데 S님도 그중 한명이었다. 정갈하면서도 핵심을 콕콕 찌르는 글을 써서, 콕 찍어놨던 리뷰어였는데, 블로그에 들어가 이런저런 글을 읽다가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국문과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난 글을 정갈하게 쓰는 사람들은 일단 좋아하고 보니까, (하하!) 이웃을 맺고 블로그에 자주 드나들며 지내고 있었는데 언젠가 블로그에 소설을 쓰기 위해 '을'인 회사에 다니는 사람과의 인터뷰가 필요하다고 써놨기에, 그녀가 최근 알바로 일을 하고 있는 곳이 우리 회사와 가까운 곳이라는 걸 알고 근처에서 한번 보자는 약속을 잡았고, 그 날이 오늘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환경과 내가 처해있는 환경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좀 '안좋은 상황' 위주로 직장인으로서의 경험을 애기하다보니 어훗, 정말 굉장히 괴로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즐거운 게 어딨겠냐만은, 얘기하다보니 혼자 '비참 배틀'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하하.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될 것 같다는 문자를 돌아오는 길에 받았는데,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할 내 일부를 과연 내가 알아볼 수 있을까? (실제로 그녀가 등장시킨 자신의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못알아봤다고 한다) 물론 나는 나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답변을 보내긴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내 모습을 못알아보는 나란 상상할 수 없지만, 또 그건 나에게는 내가 아닐 확률이 높기에, 잘 모르겠다. (그래도 뭐, 내가 얘기해준 건데, 알아볼 수야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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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런 얘기는 매우 짧게 하고, 김연수와 히라노게이치로를 심히 좋아하는 그녀와 이런저런 애기들을 나눴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던 그녀가 학교에서 있었던 김연수 특강 이후 있었던 뒷풀이에서 옆자리에 앉아 맡았던 김연수의 담배 연기 냄새가 향기롭게 느껴지던 이후로 담배냄새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는, '나보다 한술 더 뜨는'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맞다, 맞다, 우리는 왠만한 연예인들 길에서 만나도 꿈쩍도 안하지만, 좋아하는 작가에게는 광분하게 되는. 서태지와 김연수가 지나간다면 김연수에게 사인을 받는, 신해철과 지승호의 간담회에 가면 지승호에게 사인을 받을 (믿어줘요 시비돌이님) 감우성과 최규석이 지나간다면? 어후, 그런 건 물어보지 마시길. 하하하. (뭥미, 왜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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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에 쓴 내용에 대해 깔깔 웃으며 막 이야기하다가 지난 주에 겪었던 일을 얘기해줬더니 그녀도 막 웃는다. 그 일인 즉슨 이러하다.
요가를 가기 위해 회사에서 나온 웬디는 회사 뒷골목에 밴이 있고, 그 밴 주변을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오훗, 굉장한 인물의 출현인가보다. 실은 왠만하면 이 동네는 연예인을 보기 위해 이정도까지는 몰리지 않거든. 게다가 밴에 아무도 없고, 연예인은 어딘가로 들어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만큼 남아있다는 건 보통은 아닌가보다. 누구에요? 라고 물어보고싶은 걸 꾹 참고 머리를 쓴다고 쓴 게, 차에 낙서돼있는 걸 보는 것이었다. 먼지위에 손으로 쓴 낙서엔 도무지 누군지 모르겠는 이름들이 있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요가나 가자.
다음날
과장님 : 어제 강남역에 빅뱅 왔었는데 봤어?
웬디 : 아, 그차가 빅뱅 차였어요? 어쩐지 사람이 좀 심하게 많더라.
막내 : 아, 조금만 늦게 나왔으면 봤을텐데 너무 아쉬워요
웬디 : 거기 '지용'이라는 사람이 멤버로 있어요?
다들 여기서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한번 나를 바라본다
웬디 : 왜요? 없어요? 유일하게 기억나는 이름이 그건데
막내 : 있어요, 우리 지 드래곤
웬디 : 그렇구나, 난 또 지용이라길래, 젝키 고지용인가 했지요
쏟아지는 폭소, 순간 바보된 웬디. 젝키 고지용이라니,
그래... 나같아도 웃었겠다
사실 길에서 1초동안 눈마주치고 있어도, 나는 한명도 못알아봤을 거지만...
4
펭귄뉴스에 나오는 소설 중 하나에, (제목은 기억 안나면서 바로 옆에 있는 책도 안들춰보는 뻔뻔함 ㅋ) 해커들이 작전을 실행하는 날로 '휴가 기간의 비오는 금요일'을 선택하는 얘기가 나온다. 우훗, 그마음 너무 알겠는 나는, 그 해이함 너무 이해하는 나는, 그게 꽤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작전이라 여긴다.
그래도 나는 회사의 보안을 염려하며 금요일의 여유롭게 풀어진 마음을 포기할 사람은 아닌 거다. 그러니까, 오늘도 한껏 나사풀린 금요일이었다. 하핫!
5
가끔 내가 뭘 위해 살고 있는가를 곰곰히 되짚어보면 어깨에서 힘이 탁 풀릴 때가 있다. 그래서 오늘, 초롱초롱 숨쉴 때마다 하고 싶은 게 바뀌어서 여전히 세갈래 길을 놓고 그 앞에 잔곁가지들을 치며 고민중이라는 S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랑일랑이는 마음 한켠이 좀 허했는지도 모르겠다.
6
친구 I의 생일이라 조금 전 페이퍼를 쓰며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 문자를 보냈다.
20대의 마지막 생일이구나, 라고 놀리고 나니, 마치 너무 남일처럼 어리석은 비수를 꽂았다는 생각이 든다. 곧 나에게도 적용될 말인 것을. 하하.
물론 녀석의 복수는 나의 생일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공생애를 잘 준비해보자고...'라니 으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