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읽고 있다
이번 주 일요일까지 읽어야 하는데, 출퇴근길의 집중력 저하에 의한 압박이 만만치 않다

다 못읽는 한이 있더라도 꼭꼭 씹어 읽어야겠다고 생각중인데,
이런 구절들을 놓치기가 싫어서이다

   
 

덜 인간적인 상태는 완전한 인간성의 왜곡이므로 조만간 피억압자로 하여금 그런 상태를 만든 자에 대한 투쟁에 나서도록 만든다. 이 투쟁이 의미를 가지려면 피억압자는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바꿔 말해 인간성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억압자를 억압하는 위치에 있어서는 안되며, 양측의 인간성을 모두 회복하려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억압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피억압자의 역사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억압과 착취와 강간을 저지르는 억압자는 그 권력을 피억압자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힘으로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피억압자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 권력만이 양측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p55>

그러나 언제나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는 피억압자가 해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억압자나 '아류 억압자'가 되기 위해 애쓰게 마련이다. 그들의 사고구조는 그것을 낳은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의 모순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이 되는 것을 이념으로 삼지만 그들에게 인간이 된다는 건 곧 억압자가 된다는 뜻이다. <p56>

피억압자는 억압자의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그 지침을 채택하고 있으므로 자유를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자유는 피억압자에게 그 이미지를 거부하고 자율성과 책임성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중략) 비록 억압의 상황은 비인간적이고, 억압자와 피억압자 양측에게 영향을 주는 총체적인 비인간성을 띠고 있지만, 그 강압적인 인간성에서 벗어나 더 완전한 인간성을 향해 투쟁해야 하는 쪽은 억압자가 아니라 피억압자다. 스스로가 비인간화되어 있는 억압자는 다른 사람들도 비인간화하므로 이 투쟁을 이끌 수 없다 <p58>

자유를 위한 투쟁은 단지 억압자에게만 위협이 될 뿐 아니라 피억압자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더 큰 위협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만든다. 자기 내부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을 발견했을 때 피억압자는 이 열망을 동료들과도 공유해야만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자유의 공포에 압도되어 있다면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따를 수도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를 수조차 없다. 따라서 피억압자는 참된 동료애보다 집단성을 더 선호하게 되며, 자유가 만들어주는 창조적인 친교, 혹은 자유 자체를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부자유한 상태에 적응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된다. <p59>

답은 하나뿐이다. 피억압자는 자신을 억압자의 숙주로 인식해야만 해방적인 교육학을 낳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지금의 나와 되고싶은 나의 이중성에 머무는 한, 그리고 그 되고 싶은 나가 실은 억압자로서의 나인 한, 그러한 기여는 불가능하다. 피억압자의 교육학은 피억압자와 억압자 모두가 비인간화의 발현이라는 점을 피억압자가 비판적으로 발견하기 위한 도구이다. <p6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네꼬 2008-05-1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로 프레이리, 교육학자가 이렇게 전복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약간 전율을 느껴요. 멋쪄.

-

루나의 티타임 볼 때마다 웬디양님 생각 나요. 루나=만화가=웬디양님. 자꾸 헷갈려요.

웽스북스 2008-05-16 00:04   좋아요 0 | URL
피억압자의 해방을 위한 교육이어서 그런가봐요 멋쪄2

ㅋㅋㅋ이제 제가 루나를 내면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를 타인에게 막 루나화하고 있나봅니다. 하하하. 대문사진 바꿔야하나 ㅋㅋㅋ

turnleft 2008-05-16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잌후, 이 책 읽은지가 10년도 더 지났군요.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ㅠ_ㅠ (털썩)

웽스북스 2008-05-21 19:46   좋아요 0 | URL
다시 읽으세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