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하고 있던 약속 2개가 모두 취소가 됐다. 아니 엄밀히는 하나는 취소가 된 거고, 또 하나는 갈 수 없는 사정이 돼버렸다. 그래서 교회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10시간동안 자유라며 혼자 놀랑놀랑 신나게 데굴데굴 모드로 책도보고 잠깐 잠도 들고 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심심할 틈 없이 봐야할 책도 많고, 영화도 보고 싶고 했지만, 또 내심은 심심했나보다. 위화의 형제를 준다는 H의 말에 바로 "그럼 내가 너희집으로 갈까?" 라고 답한 걸 보니. 오, 그책 엄청 보고싶었나보네, 라는 우스개로 H는 답했지만 정작 그 책은 펴보지도 않았다. 그냥 비도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H의 집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미안해 너희 집앞이야 --> 추억의 노래 ㅋㅋ) 가장 큰 메리트는 H가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라는 점이다. 동네에서 만난 건 아닌데, 우린 우연히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H의 침대에 누워 데굴데굴거리며 수다를 떨며 좀 생각없이 있다가 오고 싶었다. 하지만 실은 문자를 보내고는 이내 후회했다, 좀 귀찮긴 하다며 -_- 하지만 마침 알라딘 중고책방에 팔 책을 정리중이었던 H는 그럼 자기집에 와서 보고싶은 책 있으면 가져가란다.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ㅎㅎ (아, 나에게 알라딘을 소개해준 건 H였다. 물론 그녀는 서재는 이용하지 않는다)
H는 나와 제일 친한 친구이다. 사실 '제일 친한 친구' 라는 걸 정해놓는 게 참 유치하다는 생각은 든다. 게다가 내가 가장 자주 만나고 일상적으로 지내는 사람은 H가 아니다. H를 만나는 건 기껏해야 1년에 서너번 정도. 우리가 가까이 살면서도 어찌하다보니 자주 못만나는 사이가 됐는데, 그럼에도 나는 H를 제일 친한 친구로 '정했다' 그래서 C와 같이 살고 있을 때도, 여전히 그녀를 가장 많이 만나고 있는 지금도, 어쩌면 나의 얘기를 C에게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지금도 H는 나에게 제일 친한 친구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매력과 후광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여는 마음은 인색했던 H에게도 여전히 내가 그럴 거라 의심 없이 믿는다. '얘가 내 베프에요' 라고 유치하게 말하는 고등학생에게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니?'라며 쿨한척 말하듯, 스스로의 생각을 좀 쿨하고 고차원적으로 조절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내심 유치한 속내는 어쩔 수 없나보다. 암튼 H는 나와 제일 친한 친구이다. 아마도 만약에만약에만약에 H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조금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우리가 지난 9월 내 생일 이후로 처음 만나긴 했지만.
택시를 타면 5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일부러 버스정류장까지 10분 정도를 걸었다. 혼자 우산을 쓰고 이승훈의 비오는 거리를 흥얼흥얼 거리며. 마을버스요금이 800원이 되다니, 도대체 마을버스를 얼마만에 탄 걸까. 그러고보니 '마을'의 영역에서는 별로 움직이지 않았구나. 서울로 가는 지하철, 좌석버스가 더 익숙한 걸 보니.
H가 알라딘에 내놓을 책들을 보며, 이렇게 헐값에 내놓기는 진정 아까운 책이라며 성토하기도 하고, (으흑, 정말 아까웠다. 게다가 그녀의 책은 다 빳빳한 새책이었거든. 물론 나는 형제1-3권 이외에도 미셸투르니에의 '뒷모습'과 커트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을 공짜로 뺏어왔지만. 더 가져오고싶은 거 꾹 참았지만. 알라딘에서 매입해주지 않은 그녀의 책들은 역시나 오늘 내놓자마자 샤샤샥 나갔다고 한다. 누군지 봉잡으셨다.) 윗사람 욕도 실컷 하고 (목아프다 -_-) 또 그만큼 실컷 듣고. H가 새로 들인 인형 세마리에 완전 뿅반해서 뒤집힌 눈으로 침흘리다가 오고. H의 어머니가 구워주시는 더덕과 삶은 양배추에 밥도 뚝딱 맛있게 먹고 왔다. (음, 그러니까 오늘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의 최후의 만찬이었다. 물론 나는 지난 3일간 저녁마다 '최후의 만찬'을 먹긴 했지만)
굳이 카페에 있지 않아도, 인형 껴안고 딩굴뎅굴하며 맛있게 밥먹고 수다떨며, 이 얘기 해도 될까? 라는 자체필터링따위는 하지 않아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물론 H는 까칠해서 나름의 필터링이 좀 필요하기는 하다) 친구와 한동네에 산다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다. 그녀에게 가기 위해 굳이 파우더를 고쳐바르지 않아도, 굳이 렌즈를 다시 끼지 않아도, 굳이 예쁜 옷을 골라 입지 않아도, 그저 편안히 있는 모습 그대로 가서 편안히 있다가 올 수 있다는 것. 덕분에 심심하지 않고도 불편하지 않은, 퍽 고마운 일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