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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 12층에서 11층으로 이전한 이후 120명의 인원이 한 공간에서 생활한 게 오늘로 이틀째다. 대략 공기는 화장실이 더 상쾌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놔도 더운 한겨울의 에너지낭비가 난무한 곳에서 앞으로 한달 가량을 더 살아야 하는 현실. 분명히 1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1년도 넘게 이 공간에서 근무했는데도 참 낯설고 어지럽다. 여기서 일하던 그 때, 일도 참 많고 야근도 많이 했었는데, 터가 안좋은지 내려오자마자 매우 심히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사람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야 되는데, 불쾌지수도 짜증도 증가하는 날들, 오늘은 내가 다시 목티를 입고 오면 사람이 아냐! 라고 큰소리 뻥뻥 치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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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집에 들어가니 엄마와 동생이 또 훌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다가 가족 오락이 될까 살짝 걱정이긴 하지만 아빠가 미동도 않으신다. 물론 꼬셔보지도 않았지만. 11시도 넘어서 집에 들어갔는데 훌라의 꼬임에 홀딱 넘어가 꽤 여러 게임을 했다. 아, 근데 슬픈 사실이... 엄마가 실력이 늘었다. 겨우겨우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나름 고스톱으로 몇십년 다져진 사람인데, 내가 너무 무시했구나 싶다. 그나저나 나의 테트리스는 이제 어디에 푼담.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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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대리가 포털사이트 지각도 조사를 수행하기 전 다차원척도분석을 하기 위해 우리 팀에 데모로 돌린 팀원지각도분석 결과를 놓고 같이 그래프를 만드는데, 오오오 이거 굉장히 재밌고 충격적인 결과. 제일 독특한 팀원이 내가 뽑힌 사건 -_- 제일 까칠한 팀원도 내가 뽑힌 사건 -_- 제일 접근하기 어려운 (광고실 입장에서) 팀원도 내가 뽑힌 사건 -_- 이봐이봐 내가 우리팀으로 온지 좀 얼마 안되긴 했지만 아니에요, 나 정말 안특이하고, 매우 부드럽고, 만만하고 비굴한 사람이라구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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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가끔 온다. 대행사 A가 하는 조사를 개발자 B에게 웹페이지 작업을 부탁해 업체 C의 패널을 빌려서 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까 조사가 필요한 건 A고, 개발에서 트러블이 생긴 건 시스템의 문제이고, C에게 돈을 내는 주체는 나(의 이름으로 의뢰)인데 왜이렇게 나는 뭘 하든 을의 마인드인지, 또 그래야만 하는 건지. 내 잘못이 아닌 것을, 중간자인 이유만으로 빌고 빌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한번만 더 체크해주세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는, 내 돈 내고 커피까지 사드려 가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초비굴 모드가 되야 하는. 다행히 뼛속까지 비굴한 인간이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의 말투가 심히 겸손하게 들리긴 하겠으나, 가끔 자문한다. 근데 도대체 뭐가 죄송한거지? 그래도 어쨌든 누군가는 계속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되는 상황이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건, 참 천성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다. 이것봐, 나 비굴하잖아! (3번에 대한 항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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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난 죄송한 상황에서는 죄송하다는 말을 할 줄 아는 게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 실수였다면, 실수였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멋지고 괜찮다는 얘기? 막이러고) 그게 사람이건 회사건. 이건 알라딘 고객 서비스센터에서의 오늘 공지를 보고나서 하는 말이다. 나는 분명 그 쪽의 실수로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고, 그 쪽의 커뮤니케이션 미스임이 판명됐다면, 나한테 굳이 따로 사과 메일을 챙겨보내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실은 내 성격이었으면 그렇게 따로 했을 거다) 공지글을 작성하면서 죄송했다거나 실수였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넣을 것 같은데, 그냥 재검토 후 다시 주는 방향으로 결정했단다. 이것도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다. (멋지고 괜찮긴, 뒤끝 백만년이야) 이런 상황엔 말 한마디가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적절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