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 동기가 딱 2명뿐이다. 그나마도 얘들은 다른 애들이랑 동기로 묶여 있는데, 나는 달랑 얘들 둘만 동기다. 그런데 심지어 1명은 얼마전 모사로 이직했다. 모사는 공교롭게도 내가 대학시절 잠깐 몸담았던 곳. 이것도 재밌는 인연이다 참. 

모사로 이직한 그 E와 오늘 만났다. 나머지 한 명 동기인 H도 함께. E는 광고실, 나는 전략기획실, 그리고 H는 테크실 소속. 모두 소속이 달라서 어쩌면 더 부담 없이 지냈을런지도 모르겠다. 테크실의 H는 애드마스터로 광고를 실제로 게재하는 업무를 맡고 있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쁘다. 그런데도 항상 친절하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해줘서 모두가 좋아하는 일명 '엔젤'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가씨. 거절할 줄 모르고, 누구에게든 뭐든 웃으며 손내미는 그녀는 3년 연속 올해의 우수사원으로 선정된 바 있다. 나도 H가 좋다.

E가 이직한 회사가 있는 동네는 참 횡하다. 하여 장소는 E가 골랐는데, 그녀는 신사동 가로수길에 가고 싶다 했다.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가 먼 신사동. 그치만 오케이한 이유는, 한번에 집으로 가는 버스가 있기 때문이지. ㅋㅋ H와 함께 버스를 타고 내려 가로수길 앞에 있는 T사 사옥 앞에서 E를 기다리는데 H의 전화가 울린다. 회사란다. 나는 "받지마~~~" 라고 말했으나, 우리의 천사 H는 전화를 받아 친절히 답하더니, 근처 PC방을 가야 한단다. 뒤늦게 도착한 소재가 있어 작업을 해줘야 한다는 것. H가 해주지 않으면 펑크나서 동동거리는 광고실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나는 광고실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님 천사가 아니어서인지 그냥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퇴근 후 시간에 애를 PC방으로 보내야 하다니. ㅠㅠ  

E와 나는 음식점으로 들어와 먼저 식사를 하고, H는 근처 PC방으로 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H가 오지 않는다. 걱정이 돼 물어보니 와야 할 소재 하나가 덜 도착해 대기중이란다. 난 또 마구 화를 내며 그 사람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둥, 마구 흥분한다. 결국 우리는 밥을 다 먹었고, 그 즈음해서 H에게 전화가 왔다.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선아야, 어떡해, 여기 불났어
뭐? 불? 넌 괜찮은 거야?
어떡해... %^$#^%
뭐라고? 안들려
@^%$&*^^&(%*&(%
H야, H야
내가 다시 전화할게

일단 목소리를 들어 안심이 되긴 했으나 심각한듯 하여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중, 얼른 계산을 마치고 나가 PC방 쪽으로 가니 매캐한 연기냄새. 그리고 소방차 3대.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놀라 울고 있는 H

어떻게 된 거야, 넌 또 왜 우는 거야
너무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H에게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PC방은 지하에 있었고, 불은 2층에서 났다. 비상벨이 울렸고 사람들이 나가려는 찰나, PC방 주인이 괜찮다며, 불은 지하까지 번지지 않는다며 하시던 일을 계속 하라고 했다. H는 무서웠으나 하필 그 순간 오지 않던 소재가 오는 바람에 하던 작업을 마쳤다. 그러던 중 위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아무래도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런데 그 PC방 주인은 계속해서 괜찮다고, 여기까지는 불길이 번지지 않는다고, 그냥 하시던 일을 계속 하시라고 안일한 태도를 보였단다. H는 무서워서 얼른 자리를 뜨려고 계산대 앞으로 가 카드를 반납했는데 주인은 카드를 받지도 않으며 계속 괜찮다는 말만 연발했다고 한다. H는 결국 돈을 떠밀어주고 나왔고, PC방을 나와 불길의 규모를 보며 너무 놀라, 아찔하고 무서워 그만 울어버렸다고 한다. 만약 소방차가 조금 늦게 오거나, 화재 진압이 안된 상황에서 지하에 있는 PC방으로 불길이 번졌다면- 아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 와중에도 우리 H는 울면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소재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문제는 없는지 확인했다. 우수사원은 괜히 우수사원이 아니다. 우리는 놀란 H에게 커피와 케잌을 사주며 달랬으나, 역시나 너무 놀라 잘 먹히지도 않는단다. 헤어질 때 쯤, 다음엔 아까 우리가 저녁 먹은 식당에서 같이 꼭 저녁을 먹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는 가로수길에 오지 않겠단다. 정말 그럴 만도 하다. 그래. 오지 말자.

여전히 그 PC방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리고 불길이 제법 큰 불길이었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사했을지 모르겠다. 일단 뉴스에 안난 걸 보니, 큰 불로 번지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사고 소식이 많이 들려오는 이 때에, 사고를 더 큰 사고로 만드는 건 저 PC방 주인과 같은, 눈앞의 이익에 더욱 급급한 무사안일주의같은 태도일 것이다. 이런 건 정말,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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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1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날 뻔 했네요. 지나친 워커홀릭과 방만한 안전불감증. 둘 다 넘흐 안 좋네요. -_-
(늦게 잤네요. 발표는 잘했죠?)

웽스북스 2008-01-11 12:43   좋아요 0 | URL
히히 그냥 또 초고속 스피드로 ㅋㅋ

마노아 2008-01-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찔한 순간이었어요. 전 예전에 저혼자 있을 때 집에서 불난 적 있어서 그 순간의 공황이 생생해요. 소화기도 있었는데 냅다 도망부터 쳤던 기억이...ㅠ.ㅠ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 피씨방 주인은 정말 생각도 없고 개념도 없고 뵈는 것도 없군요. 버럭!

웽스북스 2008-01-11 12:44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무서웠겠어요
우리 엄마는 가스불을 자주 안꺼서 내가 엄마 두손 꼭 붙잡고
엄마, 우리 화재보험 들자, 막 이래요. ㅋㅋ

Mephistopheles 2008-01-11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에서 제일 짜증나는 건 H라는 분에게 시간외에 일을 떠넘기는 그 전화 건 작자.
이건 당해 본 사람만이 아는 치떨림.. 우수사원...좋은 간판임에는 틀림없지만 쩝 뭐랄까요
동기인 H님이 당한 상황을 보면 좋다고만 말할 순 없어요. 성실하게 맡은 바 일을 100% 초과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일이라는게 적당히 댕기고 끌어야 서로가 덜 피곤한데. 저리 충성하면 10시간에 마칠 일을 5시간...5시간이 3시간...결국 촉박한 일정에 삐긋 하면서 한 번 어긋나면 그동안 잘했던 건 하나도 기억 못하고 바로 그 틈새를 물고 늘어지지요.

에잇 나는 너무 부정적으로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걸지도..^^

웽스북스 2008-01-11 13:08   좋아요 0 | URL
음 거기에 대해서 저도 일단 굉장히 짜증을 내긴 했지만
H의 업무롤상, 그런 경우가 좀 많은 게 사실이에요, 당장 매체에는 걸려야 하고, 대행사에서 소재는 늦게 오고 하면 중간에서 광고실 AE가 매우 동동거리거든요, 그 AE도 자신이 컨트롤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사고가 나고. 상황상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좀 짜증나는 상황이긴 하죠.

우수사원이라는 게 참 그래요. 실은 그 부분은 썼다가 어쩐지 H한테 미안해지는 것 같아 지우긴 했는데, 뭘 썼다가 왜 지웠는지 메피님은 아실 것 같네요- 직원들간의 관계가 대고객 서비스도 아니고 말이죠, 참.

무스탕 2008-01-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pc방 주인 정말 웃기네요? 뭔 일 나면 자기가 다 책임질건가? 어여 대피시킬 생각은 안하고 장사할 생각만 하다니.. -_-++

비로그인 2008-01-1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PC방 주인의 행동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랬을까? 불길이 번지는게 문제가 아니잖아. 허..참..

웽스북스 2008-01-1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 엘신님
그죠그죠 진짜 어이없어요 저 완전 PC방 이름 대라고 고소하겠다고 난리난리를 부렸잖아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