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내가 명동을 좀 많이 사랑해주신다. 사람 많은 명동은 질색이긴 하지만 대략 회사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인데다가 집에도 한번에 갈 수 있는 4호선 라인이니, 그깟 사람수는 타협! 12월 31일부터 오늘, 그니까 8일까지 약 9일간, 오늘이 4번째 명동 방문이다. 거의 이틀에 한번 꼴인 셈인가?
* 명동의 비꼴로는 M언니가 소개해줘서 한번 가고 오늘이 두번째 방문. 실은 지난 번 E를 만났을 때도 여기에 가고 싶었는데 못찾았다. (굴욕) 외근 다녀오면서 실장님이 우동에 초밥을 먹자고 하시는 바람에 B를 만났을 때는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다. 그치만 난 또 먹었다. -_-v (자랑이다)
명동 골목 한 구석에 있는 비꼴로는, 잘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가게. 명동이지만 명동스럽지 않다는 게 이 가게의 매력이다. M언니의 말에 의하면 즐겁고 맛있게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기 좋아하는 마인드의 사람들이 만들었다는데 음식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 있다.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것보다는 최고의 음식을 주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매출이 최고인 크리스마스나 일요일 장사를 하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고, 좋은 치즈가 없을 땐 티라미수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 또한 독특하다. 티라미수는 하루에 몇 개만 한정적으로 만드는데, 구할 수 있는 좋은 치즈의 분량이 한정돼 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오늘은 다행히 티라미수가 남아 있어 저녁을 다 먹고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여전히 맛있다. 티라미수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이 있어서 티라미수를 시킬 때면 꼭 와서 맛있게 드셨는지, 지배인님 직접 오셔서 확인해 주신다.
그런데 난 또 커피맛에 홀딱 반해버렸다. 지난 번에는 라떼를 마셔서 커피가 그렇게 맛있었는지 잘 몰랐었는데 오늘은 스트레이트 커피를 마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란 것이지. 지배인이 직접 내린다는 핸드드립 커피.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B도 마셔보더니 맛있다며 너무 좋아했다. 조금 진한 커피를 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커피컵에 뜨거운 물 들고 직접 오셔서 어느 정도가 적절한 지 물어봐가며 물을 맞춰주신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우리테이블에 서빙해줬던 직원이 여기서 자신이 일하는 동안 스트레이트 커피를 시킨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고 하신다. 윗쪽에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 메뉴는 많이 시켜도 스트레이트 커피 메뉴를 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나보다. 난 별 생각 없이 요즘 아메리카노를 별로 안마시고, 에스프레소는 잘 못마셔서 시킨 거였는데. 내가 또 오버하며 너무너무 맛있었다고, 커피 마시러 또 오겠다고 하니 그들도 기뻐하고, 뿌듯해하고 ^^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맛있었다고 얘기해주는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이라니. 흐흐 (단순해 단순해)
비꼴로는 따로 홈페이지가 없는듯 하고, 블로거들 사이에 조금씩 입소문이 있나본데, 나이가 들어서 귀찮아 음식 사진 같은 건 안찍고, 대신 다른 블로거가 포스팅해둔 것을 연결해 놓는다. (http://blog.empas.com/dive2blue/24645402) 너무 소문나서 사람이 많아지면 안되는데 말이지. 흐흐흐.
* 비꼴로에서 오늘 만난 B는 대학 시절 동기다. 이나이 먹어서 말하긴 좀 부끄러운 여고생스런 사정으로 B와 내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기간은 4학년 1학기 딱 1학기 뿐. 2학기 때부터는 물리적으로 친하게 지내기가 조금 어려웠고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친했고) 졸업한 이후로는 일년에 한두번 정도를 보는 게 전부이다. 오늘 B를 만난 건 1년만이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날 때는 과거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옛날 이야기 밖에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 질긴 추억들을 말랑말랑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곱씹고 또 곱씹은 뒤 허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B와의 관계를 좋아하는 건,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함께 현재를 이야기할 수 있고, 불투명하지만 앞으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으며, 현재의 삶에 비추어 우리의 과거를 재평가하며 심지어 함께 반성하는 일까지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리고 기숙사 친구였던 관계로, 빨간 뿔테 안경에 아침에 머리도 못감고 나갔는데 하나도 안부끄러웠다. 흐흐흐. (이게 다 짱꼴라 때문이다? ㅋㅋ) 분명 9시까지만 얘기하다가 와야지, 했는데 어느덧 시간은 10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맛있는 음식 먹고, 맛있는 대화 나누는 일은 참 행복한 일이라고, 뭔가 그렇게 뜨겁고 복잡했던 그 때보다 훨씬 사회화되고, 그만큼 단순해진 우리는 흐흐흐 웃으며 기약 없는 '다시 언제 한 번'을 이야기한다. 하튼, B는 나랑 정말 비슷해.
* 돌아오는 길 명동역에서 잡지를 사는데 가판대 아주머니께서 자일리톨 껌 하나를 주신다. (낱개) 나름의 프로모션인 것 같은데 나 또 괜히 마음이 훈훈해진다. 껌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으며 한쪽 눈은 잡지를, 한쪽 눈은 의자를 두리번 거리고, 서울역에서 자리가 나 잽싸게 앉았다. 흐흐. 다음 역에서 또 하나의 자리가 났고, 젊은 아가씨 둘 중에 한 명이 와서 잽싸게 앉는다. 그러자 친구로 보이는 듯한 다른 아가씨가 어머 얘 부끄러, 라며 면박을 준다. 난 괜히 내가 면박을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더욱 건방지게 껌을 씹으며 비굴하게 속으로만 생각한다. 너도 나이 들어봐라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