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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 때는 꼭 크리스마스 캐롤 테이프같은 게 하나씩 구비가 돼 있어야 했었나보다. 오히려 지금은 캐롤을 살 일이 없는데 그 때는 집집마다 캐롤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만화 주제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기를 얻던 똑순이 캐롤집이 있었다. 똑순이 김민희가 부른 캐롤이 있는 음반이었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앙칼지고 또랑또랑하던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언젠가 아빠가 우리집에 새바람을 불고 온 캐롤 음반을 사왔으니, 그건 영구 캐롤이었다. 심형래가 영구 없다 버전으로 부르는, 그 유명한 '달릴까, 말까'가 담겨 있던 음반. 나는 동생과 그 테이프를 돌려놓고 깔깔깔깔대며 테이프가 끝날 때까지 웃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웃긴 버전의 노래는 두곡 정도였다는 거다. 달릴까, 말까, 이 곡이랑 산타할아버지 우리 마을에 오시네- '정말 오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아 그게 어찌나 웃겼는지 한번 터진 웃음보는 심형래가 느끼진지버전으로 심각하게 고요한밤 거룩한밤 같은 캐롤들을 부를 때까지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웃음이 웃음을 부른 거였지.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 나와 동생. 내 웃음이 동생이 웃음을 부르고, 동생의 웃음이 내 웃음을 부르던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 웃고 싶을 때 그 음반을 틀었지만, 그날만큼 웃긴 적도, 웃은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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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옛날에 이 노래를 좋아했어,라고 말하는 건 옛날에 좋아했던 부끄러운 책 제목을 말하게 되는 일만큼 화끈거리기도 한다. G언니가 이문열을 가리켜, 부인하고만 싶은 첫사랑,이라 표현했던 마음과 비슷할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저걸 좋아했던 걸 가능하면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는 마음. 실은 예전에 좋아했던 것 중에 또 그런 것들이 많다. 세월이 지나고 흐르니, 유치하게 느껴지는 것들. 그래서 꽁꽁 혼자만 알고 있는 것들. 물론 목록은 잘 기억도 안나거니와, 기억난다 해도 노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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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언젠가 부끄러워지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마냥 좋은 음반이 있으니 그건 자화상 1집.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에 함께 살던 우리는 토이와, 이승환과 자화상에 열광했었다. 컴퓨터로 음악 듣는 게 흔치 않던 시절, 음악 듣는 걸 좋아하던 C언니는 매 학기 힘들게 미니 컴포넌트를 택배로 날랐고, 우리는 덕분에 촉촉한 음악들을 매일 들을 수 있었다. 옆방 살던 W는 우리가 토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우리 방으로 와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러나 공교롭게도 우리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노래를 틀어놓고는 두 소절 듣고 아~ 너무 좋아! 하고는 나갔다. 그럼 우리는 벙- 한 표정으로 그 노래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 끝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와서는 어, 바뀌었네, 하면서 다시 틀어놓고 다시 두 소절 듣고 나갔다. 정말 특이한 녀석.

토이도 좋고 이승환도 좋고 자화상도 좋고, 그 때 비슷하게 다 좋아했지만 지금 자화상의 음반이 기억에 남는 건 일단 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 때는 막 갑자기 이 음반이 듣고 싶어져 한곡씩 검색해서 듣기도 했다. 귀할 수록 더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인 것 같다. 

내인생의OST라는 태그를 보자마자 난 이 세가지가 떠올랐다. 음악만 듣고도 미친듯이 웃던 철없는 시절, 그리고 다같이 음악에 돌돌 말리던 시절에 듣던 다시 구할 수 없는 음악이 주는 아련함. 그리고 가끔 과거에 내가 좋아했던 사실을 부인하고 싶게 만드는 음악들. 모두 나름 내 인생의 OST가 되어주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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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2-2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에 우리집 애들한테 심형래버전 징글벨을 불러줬더니 자지러지던데요. ㅎㅎ

웽스북스 2007-12-21 09:09   좋아요 0 | URL
그게 애들 시절일 땐 기절하게 좋은가봐요
저도 진짜 자지러지게 웃었었거든요
기억력이 나쁜 제가 그날의 기억은 정말 생생하다니까요 ^^
그 이후로는 어떤 코믹 캐롤이 나와도 안웃었었답니다

Mephistopheles 2007-12-21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참...페이퍼의 노래들을 듣고 있자니..완벽한 세대차이를 느끼는 중....

웽스북스 2007-12-21 09:09   좋아요 0 | URL
메피님은 어떤 캐롤을 듣고 자라셨나요? ㅋㅋ

깐따삐야 2007-12-21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달릴까아~ 마알~까아~ 기억난다. 리듬에 맞춰 엄지손가락을 살풋살풋 뒤집어주시는 쎈쓰! ㅋㅋ
2 난 뭐 소풍 가서 '담다디' 부른 적도 있는데. 어릴 때 18번은 '비 내리는 영동교'였구.
3 자화상 '나의 고백' 이 노래 무지 좋아했었음! 나원주는 '별이 빛나는 밤에' 고정 게스트로도 나왔었는데. 정말 모락모락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뻬빠에욤. 나 오늘 또 못 자게 생겼군.-_-

웽스북스 2007-12-21 09:12   좋아요 0 | URL
1. 흐흐흐 역시 깐따삐야님도 그세대였지. 아, 우리 동갑이지 ㅋㅋ
2. 우리반 애들은 막 룰라춤 투투춤 이런 거 추고 그랬어요 (나는 몸치)
3. 내가 바로 여기 연결하고 싶던 그 노래가 나의 고백,이에요-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못했어요. 엄한 남의 블로그 연결해놓을 수도 없고. ㅠ_ㅠ 나도 그 때 별밤 들으면서 자랐었지요- ㅎㅎ 나 그 때 막 별밤에 퀴즈풀러 나가고 그랬었는데, 혹시 인식하지 못하는 새 깐따삐야님 내목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라요 흐흐흐

깐따삐야 2007-12-21 19:14   좋아요 0 | URL
룰라, 투투. 키득키득. 기억난다. 김건모 춤도 한때 유행이었잖아요.
별밤 퀴즈 코너에 나왔었구나. 나 거의 꼬박꼬박 들었는데. 에펠탑이 미국에 있다고 말했던 여학생이 혹시 웬디양님은 아니겠져? ㅋㅋㅋ

마늘빵 2007-12-21 21:55   좋아요 0 | URL
또또또 둘이 신났어 신났어 (왜 둘이 신난게 못마땅한게냐!! -_- 글쎄다.)

웽스북스 2007-12-21 22:21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 홍홍 왜이래요 이래뵈도 나 우승 했었는데 (우옹~~~) 근데 에펠탑은 그럼, 영국에 있나요? ㅋ 런던에 있는 라인강 옆에? ㅋㅋㅋㅋㅋㅋ 김건모 유행해서 막 애들 김건모 바지, 이상한 할랑할랑한 바지 이런 거 입지 않았나요? 아 또 바지하니까 생각나는 건 소방차바지 ㅋㅋㅋ

아프님 // 글쎄, 왜 못마땅할까요 ㅋㅋㅋㅋㅋ 이런 투기쟁이. 투기는 내 전공인데 말이죠 ^^ (깐따삐야님 내 이름에 별표 두개 달았어요?)

깐따삐야 2007-12-21 23:25   좋아요 0 | URL
허걱! 우승? 대단허요. 그럼 목소리 들으면 기억 날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메멘토이므로. 어디 전화번호 불러바 불러바.
소방차 하니깐 또 우리 원관이 오빠 생각나네 그냥. 점프할 때 으찌나 귀여워 주시던지!
별표 달았지요. 원하면 색깔도 바꿔줄 수 있어.ㅋㅋㅋㅋ

웽스북스 2007-12-21 23:36   좋아요 0 | URL
그때 목소리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요- 라디오가 찢어질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우승은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잡은 격이랄까. 나한테 진사람이 매우 쪽팔려했어요. 내가 중2였으니까 ㅋㅋ 홍록기가 진행하던 시절- 실력은 1%정도였던 것 같아요 ㅋㅋㅋ
그리고 별표로 충분해요 별두개 보고 어찌나 헤벌쭉 됐는지, 스스로 미쳤어 미쳤어 막 이랬다니까요 ㅋㅋ

깐따삐야 2007-12-21 23:40   좋아요 0 | URL
중2 때 우승했음 정말로 대단허요! 별밤 퀴즈 코너는 수준도 상당했는데. 똘똘한 건 알았지만 오훙~ 정말 멋지당~^^
담엔 달도 달아주구 해도 달아줄게욤. 흐흐.(고마해라 고마해-_-)

웽스북스 2007-12-21 23:47   좋아요 0 | URL
나 나가던 날은 문제 수준이 이상했는지 객관식은 오답에 오답을 거듭하다 맞히고, 내가 진짜 알았던 건 두세문제 막 이랬어요 다 찍어서 맞히고 ㅋㅋ 그 때 녹음해놓은 테이프를 잃어버린 게 진짜 다행이라니까요 아님 쪽팔려서 죽어버렸을거야 ㅋㅋ

깐따삐야 2007-12-22 01:10   좋아요 0 | URL
이론이론. 이쁘다 못해 겸손하기까지 해. 어쩜!
잃어버렸다는 건 우째 그짓말 같기도...( ..)

웽스북스 2007-12-22 03: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제가 거짓말은 또 못하거든요-
정말 잃어버렸어요 ㅠㅠ

순오기 2007-12-2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깐따님 둘이 댓글놀이 하는거 보면 너무 즐거워용! ㅎㅎ
세대를 같이 간다는 건 이래서 좋구나!
나는 캐롤하면 초등6년때 담임선생님이 한글로 적어가며 가르쳐줬던 징글벨~~~
우린 30년만에 선생님 모시고 동창회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답니다.
아~~~~감동!!

웽스북스 2007-12-25 01:32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멋진 장면이네요
겪은 일도 아니면서,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스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