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엔 연극이나 공연 등을 작년에 비해 많이 보지 못했는데, 어찌하다보니 새 팀에 온 후 몇 주 안돼 이틀 연속으로 문화생활을 이유로 칼퇴근을 하게 됐다. 어제는 백건우 피아노소나타 연주회, 그리고 오늘은 반고흐 전시회. 그러니까 마치 웰빙주의 문화소비형 웬디가 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걸. 그저 그간 힘들었던 것에 대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어쩐지 민망하고 미안해서 미술관 간다는 얘기도 안하고 퇴근했다. 어제 피아노 연주회를 간다니 다들 '우아 선아'라고 놀렸다. 우아00은 예전에 페이퍼에서 소개한 바 있는 우리 우아한 L대리님의 수식어다. 난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필 이틀 연속이었던 건, 하필 월광이 어제고, 반고흐전이 40% 할인되는 T클럽데이가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우아는 커녕 대중적 취향인지라, 제일 유명한 월광이 제일 좋고, 할인에 집착하는지라 40% 할인되는 날 간 거다. 하필 이어진 이틀. 같은 날이 아니라 다행이다. 흐흐.

연주회장 1층에는 로렌초의 시종 님이 있었다. 시작 전에 문자를 보냈더니 인터미션 때 답이 왔다. 그리고 연주회를 마치고 '급 감동의 물결이 메아리쳐요'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려는 내게 로렌초님은 '상서로운 불길함'이라는 소감을 보내줬다. 갑자기 급 감동의 물결이 메아리친다는 나의 감상이 초유치버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 내가 이렇다. 하하하. 그치만 정말 마음 속에서 감동의 물결이 메아리를 친 걸 날더러 어쩌란 말인지. ㅋㅋ

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소리가 제일 좋았다. 나이를 조금씩 들어가면서, 조금씩 첼로, 플룻, 등의 그럴듯하고 멋져보이는 악기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악기소리를 바꾸는 친구들이 생길 때에도, 난 여전히 피아노를 제일 좋아했다. 첼로를 켜거나 플룻을 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나,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여러가지 의미로)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하는데, 올 초 다시 M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반주'를 배우겠다고 했다. 두달쯤 지나 서로의 사정으로 그만 뒀지만. 근데 어제 음악회장을 나오면서 난 외쳤다. '연주'를 배울 거야. 무조건 '연주'를 할 거야. 월광 1악장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연주회장에서 직접 연주를 듣는 기쁨은 물론 음악 그 자체가 주는 것도 있지만, 하나 하나 곡이 바뀔 때, 악장이 바뀔 때의 그 짧은 시간마다 그 곡의 연주를 준비하는 연주자의 자세를 볼 수 있다는 데에도 있는 듯 하다. 베토벤의 장송곡으로 쓰였다는 곡을 준비할 때, 월광 연주를 시작하기 전의 잠깐의 '가다듬음'을 위한 텀을 보고 느끼며, 나도 함께 준비하면서 들을 수 있어 더 좋았고, 연주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도 좋았다. 물론 난 3층 맨앞 구석 자리에서 있어서 상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계단을 내려와서는, 아아아~ 저기는 소리도 다를 거야, 라며 울부짖었다는 거.

반고흐전은, 그냥 계속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고흐의 삶이야 뭐 워낙 유명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전시회장을 하나씩 다닐 때마다 적혀 있는 그의 삶의 행적들을 보며, 당신 정말 힘들었군요, 라는 말이 계속 절로 나온다. 저런 삶이 또 어디 있담, 정말. 심리학 공부를 좋아하는 민정언니의 나름 심리학적 그림 해석들도 재밌었다. 미술치료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반고흐의 그림으로 제일 처음 시작하지 않을까 싶었다.

2

발표는 잘 마친 편이다. 실은 내일 하나 더 남았는데, 이렇게 페이퍼 쓰며 놀고 있는 사건. 어제 팀 대상 리허설 때 어렵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어서 '대중의 언어'를 습득해야겠다며, 쉬운 부분만 설명하고 어려운 부분은 넘어갔다. 내 보고서가 깊이 들어갈수록 좀 헷갈린다. 실은 나도 가끔. 덕분에 후배 혜진씨는 동기에게 오늘 교육이 무지 어렵다며 겁을 주었다가 이내 민망해졌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잔머리만 는다고, 오늘은 뽀대나는 부분까지만 설명하고, 질문은 내일 한꺼번에 받겠다고 했다. 버벅대든 어쩌든, 내일 하자고. 아무도 내 속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일은 윗분들이 아무도 안계신 날이다. 하하하!

요즘 교육에 잘 안들어오시는 전무님께서 들어오셨다. 이번 보고서는 전무님께 두번이나 기안을 올리고 바쁜데 굳이 하지 말라,고 한 걸 우겨서 한 것이니, 실은 들어오실 줄 알았다. 들어오시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려 했으나 곱지 않은 전무님의 표정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나가시면서 한마디 하시려는 것 같길래 뭐라고 하시려나, 각오하는 순간, 옆방에서 교육을 듣던 이국장님이 건너오셔서 '선아야 정말 대단하구나!' 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사내에서는 이국장님이 전무님보다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이시기에, 국장님이 칭찬한 부분을 전무님이 뒤집을 경우엔 전무님이 잘 이해를 못하신 게 되버리는 상황이다. 이 묘함이라니. 결국 점심시간에 마주친 전무님께서 '고생 많았다. 선수가 다 되간다'고 칭찬을 하신다. 앗싸. 마음은 늘 고고한척 회사에 다녀도 결국 칭찬 한두마디에 녹아버리는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인가보다 나도. 전무님이야 뭐 어쩔 수 없이 칭찬을 하신 것 같지만, 일단은 넘어갔으므로 안심.

내일 교육은 아예 간략한 스크립트를 썼다. 어려운 걸 혹시나 실수로 설명하게 되는 우를 범할까봐, 최대한 간단하게, 숭덩숭덩 넘어간다는 게 내일의 전략이다. 부족한 시간을 핑계삼아. 전시회 가기 전 덕수궁 앞에서 혼자 스크립트를 펴놓고 연습했다. 생각해보니 코미디다. 하하하.

3

이번주말에 있을 송년모임을 좀 유난스럽게 준비중이다. 흐흐. 그럴만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긴 하다. 올해의 나를 설명하는 책, 영화, 음반 중 한가지를 들고가 선물해야 하고, 내년에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노래를 찾아가 같이 들으며, 그게 누가 선택한 노래인지를 맞히는 퀴즈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가장 많이 맞힌 사람들에게 저 책, 영화, 음반들이 상품으로 돌아간다.

디제이를 맡은 웬디양은 노래를 취합해가 씨디로 구워, 모두의 내년 소망을 담은 노래를 선물할 계획이다. 물론 나를 나타내는 노래도 뽑아야 되는데, 이게 은근 머리가 아프다. 내가 바라는 나의 내년 모습은 어느 노래에 담겨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내가 바라는 내년 나의 모습은 뭘까. 내일 좀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뭐든 하나만 고르는 걸 어려워하는지라, 책이든, 음반이든, 영화든 고민이 좀 되긴 하지만, 일단은 좀 설렌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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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13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치아카 센빠이를 어서 빨리 찾기 바래요 노다메 웬디양님.
2. 대체 하시는 일의 정체가 뭘까 궁금해지는군요. 혹시 페인트모션으로 일관된 페이퍼의 내용 이면엔 국정원 직원이라는 반전이.?
3. 결정되어지면 그 음악과 영화와 책을 좀 알려주시길..^^

웽스북스 2007-12-13 10:03   좋아요 0 | URL
1. 남자는 피아노를 잘치면 500점쯤 따고 들어가죠 ^^
2. 뭐 합법적인 사기꾼 비슷한 겁니다
3. 흐흐 일단 오늘 좀 열심히 서치해보려고요
4. 메피님, 하루에 2시간 주무시죠?

마늘빵 2007-12-1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왠지 웬디양님의 발표를 듣고 싶은...

웽스북스 2007-12-13 10:44   좋아요 0 | URL
제 발표를 듣고 대학시절 친구는 쇼핑호스트같다고 얘기했고요 -_-
어떤 선생님은 코미디언의 기질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
앞에 나가면 꼭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유머 코드가 대중적이지 못해서 꼭 혼자 실실거리면서 발표를 합니다 ;;
사람들은 황당해해요 ㅋㅋㅋㅋ
얼른 끝내고 싶어서 말은 속사포처럼 빨리하지요 ㅋㅋ
오늘 발표를 들은 후배는 랩하셨어요 -_- 라고 하시던데요

마늘빵 2007-12-14 10:41   좋아요 0 | URL
오 그만큼 능숙하단 말씀이신데 배우고픈데요? ^^

웽스북스 2007-12-14 13:02   좋아요 0 | URL
푸하하 나 저게 '배고픈데요'로 보인 사건 ㅋㅋ
일단 마이크 잡으면 떨지는 않아요 ㅋㅋ
하지만 남들이 발표를 잘한다고 별로 인정은 안해준다는 거

춤추는인생. 2007-12-13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웬디님 저도 랩같은 발표회 듣고 싶어요.ㅎㅎ
어릴적에는 발표같은거 참 잘했는데 전 갈수록 목소리도 작아지고 나가기도 싫어지고. 큰일이예요 ^^

웽스북스 2007-12-13 19:16   좋아요 0 | URL
이게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도 학년이 올라갈 수록 손들 때 아이들의 시선을 먼저 살피게 됐었거든요
저학년때는 저요~ 막 이러면서 발표했었는데 ;
지금도 손들고 말하고, 이런 건 못해요- 시키는 발표나 하는 거죠 ㅋㅋ

깐따삐야 2007-12-1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웬디양님 주말의 DJ~ 랩도 막 하구 음악도 막 틀구... ㅋㅋ 설레고 좋겠어요.^^

웽스북스 2007-12-13 19:20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랩은.....의도치않은...... ㅋㅋ
그래도 주말 송년모임은 좀 설레요 헤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