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을 만나 즐거운 영화를 한 편 보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헤어진 뒤 찬양연습시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았다. 자주 가는 카페에 잠깐 들러 책을 보다가 나와 근처 서점에 신간을 좀 보려고 들렀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물품보관함이 눈에 띄었다. 불안했다기보다는 가방이 무거워서이긴 했지만. 하지만 지갑에는 오백원짜리 하나. 백원짜리 바꾸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들어가 40분 정도 서점을 둘러보고 나왔다. 교회에 들러 찬양연습을 마치고 집에 오니 10시, 컴퓨터를 켜고 잠시 쉬며 씻으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정중하게 사과하며 이야기를 꺼낸 그 남자가 만약 늦었다는 이유로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다. 남자는 LG카드 사고방지팀 직원이었고, 조금 전에 내 카드로 99만원을 이용한 내역이 뜨는데 본인이 맞는지 확인했다. 깜짝 놀란 나는 아니라고 말하며 가방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역시나 안에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남자와의 통화를 마쳤다. 주말이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은 지갑에 있는 다른 카드들의 안위를 살펴야 했기에 재빨리 씨티카드 --> 삼성카드 --> BC카드 순으로 분실신고를 했다. 지갑을 통째로 분실한 경우에는 타 카드 분실신고를 재빠르게 해야 하는데, 분실센터끼리 서로의 연락처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해당 담당자에게 본인이 소지한 카드를 말해주면 재빠르게 해당 센터 전화번호를 안내해준다.
씨티카드와 삼성카드는 일단 안전했다. 분실 신고 후에는 담당자에게 최근 사용 내역을 물어 확인하는 것이 좋은데 왠만한 담당자들은 묻기 전에 확인해주나 확인해 주지 않는 담당자도 있으므로 본인이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는 것이 좋다.
문제는 BC카드였다. BC카드의 경우 은행 계열의 카드이므로 내가 인지하지 못한 BC 계열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하나은행 BC카드만 기억하고 이 카드를 신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Yes24의 할인을 위해 발급 받은 제일은행 체크카드 역시 BC 계열의 카드였다. 내가 신고를 한 시간은 10시 20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제일은행 BC카드의 기록에는 10시 13분 9초에 GS25 00점에서 28만원을 구매한 기록이 찍혀 있었다.
녀석은 꾼이었나보다. 그가 구매한 것은 99만원 순금팔찌, 그리고 28만원어치 금강제화 상품권이었다. (나중에 누군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일단 금은방에서 카드를 쓰고 나면 확인 전화가 온다고 한다- 이건 꾼들의 행동 유형이 일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 일단 신고를 마쳤다. 그럼 내가 해야 할 1차적인 의무는 마친 셈이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굉장히 중요한 카드 분실자의 의무이다. 신고를 하고 난 후에 향후 행동을 위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루트를 통해 최대한 알아봤고, 일단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일단은 법적으로 카드 분실 후 60일 이내에 쓰여진 금액은 카드사에서 보상을 해줄 의무가 있다. 사실 법이 카드사에게 좀 불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생각해보면 법으로 이렇게 보장이 돼 있지 않으면 힘 없는 개인으로 거대 카드사를 상대하기가 너무 버겁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카드사가 무조건적으로 다 보상을 해주느냐? 절대 아니다.
일단은 분실자와 가맹점에 어느 정도 과실을 묻는 규정들을 카드사에서 마련해놓고 있는데 이 규정은 가입당시 우리가 아무도 읽지 않는 약관에 명시돼 있다고 한다.
가맹점의 경우 이 사건에서 크게 아래 세 가지가 걸릴 수 있다.
1. 카드상의 서명과 구매자의 서명이 동일한 지 확인할 것
2. 카드 내 명시돼 있는 이름 등으로 알 수 있는 사용자 정보와 해당 구매자가 동일한 지 확인할 것 (일부 카드의 경우 생년과 성별이 표기돼 있다고 한다)
3. 50만원 이상 구매의 경우 반드시 신분증을 확인할 것
사실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다. 고액 구매가 아니라면. 다만 내 카드의 경우 해당 가맹점에서 모두 사인을 확인했다고 하고, 전표를 확인해 본 결과 나와 동일한 서명이 돼 있었기에 1번의 책임은 묻지 않으나 2번의 경우, 내 카드가 여성의 이름으로 돼 있음에도 50대 남성에게 그냥 물건을 팔았기에 어느 정도 과실로 인정될 수 있으며, 보석상의 경우는 해당 구매자가 99만원의 물품을 구매했음에도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과실이 명백하다. (자세한 과실 여부는 일단 결과가 나와 봐야 알 것 같다) 보석상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저씨 하는 행동이 수상하여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더니 본인이 차를 빼야 한다며 황급히 나가더라고 얘기했다.
다음은 사용자의 의무. 사용자의 경우 아래의 경우에 과실로 인정될 수 있다.
1. 카드에 서명을 하지 않은 경우
- 사실 카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이 일을 겪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카드상에 서명이 돼 있으면 오히려 따라하기가 쉬운 것 같아 찝찝해 서명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가맹점은 서명을 확인할 책임이 있는데, 카드에 서명이 돼 있지 않았다면 면책이 된다. 그러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사용자가 지게 된다. 지금 얼른 지갑을 꺼내어 서명돼 있지 않은 카드에 서명부터 하라. (잘 쓰지 않는 카드에도 반드시. 이번에 나쁜놈이 이용한 나의 LG카드는 단 한번 사용한 카드인 것을 ;;)
그리고 이건 지식인에서 찾다가 본 건데, 카드 발급당시의 사인과 카드 서명, 그리고 평소에 본인이 하는 전표 서명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도 책임을 묻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2. 카드 분실 사실을 알고도 신고를 미룬 경우
- 이용자는 분실 사실을 인지한 즉시 신고할 책임이 있다
3. 카드를 지갑에서 빼내 따로 보관한 경우
- 이용자는 현금과 동일한 수준으로 보관할 의무가 있다.
4. 카드 분실자가 이용자 본인이 아닌 경우
- 다른 사람에게 카드를 줬다가 그 카드를 잃어버렸다면 역시 이용자의 과실이 인정된다
이런 과실이 인정될 경우에는 보상에서 일정 비율을 이용자가 책임지게 되며, 그 비율은 사건마다 다르게 적용된다고 한다. (또 다른 규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만 ;;)
일단 이렇게 분실신고를 하고 난 후에도 분실자는 도난범이 이용한 카드에 대해서는 다시 서면으로 신고를 해야 한다. BC카드의 경우는 제일은행 계열 카드이기 때문에 제일은행을 방문해서 신고를 해야 한다. 지참해야 할 것은 신분증과 사고처리비용 2만원, 그리고 재발급을 원하는 경우 통장을 가져가면 된다. 사고처리비용은 현금으로 가져가야 하며 신분증은 함께 분실했을 경우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서를 발급받으면 해당 신분증이 재발급 되기까지 신분증의 역할을 대신해 준다. 또한 여권 역시 신분증 대용으로 매우 유용하다.
은행에 가서 '부정사용 금액 신고'를 하기 위해 왔다고 하면 직원이 해당 서류를 준다. BC카드의 경우 설문지를 작성하게 돼 있는데, 대부분 위 내용들에 대한 확인이라고 보면 된다. 보관상태나 서명 여부, 분실시 상황 등에 대한 간단한 문답이다. 은행 직원의 말에 의하면 BC카드는 보상을 잘 해주는 편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다음 LG카드. LG카드의 경우는 삼성동에 사무실이 있다며 내방할 것을 요구하더니 후에는 팩스로 처리하자고 한다. 나 역시 팩스가 더 편하므로 오케이. 카드사에서 보낸 서류를 작성한 후 신분증 사본과 경찰서 신고 접수증을 함께 보내라고 한다. 카드사에서 보낸 서류는 BC카드와 또 양식이 달랐다. 진술서 형식으로 돼 있는 보상신청서를 작성한다. 전날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이미 썼기 때문에 작성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경찰서 신고 접수증의 경우 나는 파출소에 신고를 했기 때문에 발급받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신고 접수증의 경우 경찰서장의 이름으로 발급이 되는데, 파출소에는 서장이 없기 때문에 결제가 난 후 발급받는 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는 게 파출소 측의 설명이다. 맘이 급하면 경찰서를 가야겠지만 뭐 동네 파출소도 나쁘지는 않다. (접수증 발급에는 이틀이 걸렸다) 암튼 나는 오늘 신고 접수증을 카드사로 보냈고,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마무리한 셈이다.
처음에는 주말이어서 참 많이 답답했으나, 맘 급하게 가진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일단은 마음을 정리하는 게 급선무였고, 주말 내내 상황과 생각을 많이 정리할 수 있어서 오히려 그 주말은 나에게 득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주말 동안 금은방 주인 아주머니와 편의점 점장과 통화하고 만나고 하면서 씨씨티비도 확인하고, 나름대로 사건에 대해 명확히 할 수 있는 시간도 있었고- 그래서 경찰이나 카드사를 대할 때 좀 더 명확하고 당당할 수 있었다.
이제 뭐 처분만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있다. 일단 내가 보기에는 나의 과실로 인정될 수 있는 부분은 없는 듯 하나, 또 뭐가 어떻게 꼬투리 잡힐지 모르는 일이니, 얼마간의 금액적 손실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치만 일단은 내가 당당해야 된다는 생각. 그래서 카드나 도둑맞고 다니는 칠칠치 못한 내 잘못,이라는 엄마의 비난에도 꿋꿋이 난 잘못한 게 없다,라고 마인드컨트롤 중이다. 결과가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굿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