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도시
하비 콕스 지음, 구덕관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 친구가 연극과로 진로를 선택한 후 나는 이 친구의 공연을 매번 꼭 보러 가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포항이라는 지리적 제약은 나의 결심을 쉽지 않게 만들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어서야 이 친구의 첫번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관람했던 작품이 바로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 의 ‘시련’(The Crucible)이었다. 원작은 1950년 미국 공화당 매카시 상원위원이 반대파를 공산주의로 몰아 이념 공세를 펼쳤던 매카시즘(McCarthyism) 열풍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쓰여진 작품이었다. 중세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이라는 마을에서 비밀리에 악령을 부르는 의식을 준비하다가 목사에게 발각된 소녀들은 악령이 나타났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되고 이 때부터 목사와 지주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된다. 이른 바 ‘마녀 사냥’ 이 시작된 것이다. 선량한 주민들은 소녀들이 지어낸 주장으로 인해 가진 자들의 폭력에 땅과 아내를 빼앗기게 되며 신과 악마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약자들은 ‘악마의 추종자’ 로 낙인찍히게 되고, 결국 소녀들에 의해 거명된 사람들은 차례로 법정에 끌려나와 교수형을 선고 받는다. 작품의 중심은 결국 강요되는 침묵의 시대에 진실과 존업성을 위해 싸우는 평범한 사람인 주인공 프락터에 맞춰져 있었으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을 비검하게 만들고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지에 대해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었다.

작품이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생각이 그 후로 한참동안이나 내 머리 속을 지배했었다. 당시 연극을 통해 느껴지던 ‘중세’ 라는 배경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져서 가슴을 턱! 턱! 치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봤던 기억. 진리가 진리라 통하지 않는 세상이 지구상에 너무나 오래 존재해왔구나, 라는 안타까움. 저들이 믿는 하나님도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닐진대 명백한 불의를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가슴을 정말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는 청교도 정신에 의한 강력한 신권정치와 성서에 기준한다고 믿고 있던 그들의 가치관, 세상에 물드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며 지나치게 정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최고의 삶이라 생각해 왔던 그들. 하나님의 대적하는(것으로 느껴질만한) 것들은 모두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아온 그들의 모습. 그러나 수년이 흐른 지금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도 명백하게 그른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500년 후의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명백하게 옳지 않은 가치관들을 갖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판단하고, 지금 내가 속한 한국 교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은 과연 옳은 것인지, 어쩌면 내가 중세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답답한 눈길로 미래의 후손들이 나를 바라보는 건 아닐지, 그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다 여겨지는 과거의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런지에 대한 고민을 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나님의 생각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데 내 자신이 아예 틀린 틀 속에 들어있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 그 때부터 ‘진리’ 에 대한 갈급함이 생겼고, 삶에 있어서 이루어 나갈 목표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여도 도에 어긋남이 없는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 의 경지라 설정하게 되었다. (공자님도 70세가 되어서야 이르신 경지를 과연 내가 이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싶다고 결심하고, 부디 어리석은 조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나의 고민들이 떠올랐다. 연극을 보며 답답해 가슴을 턱! 턱! 치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탁! 탁! 쳤다. 현재 교계에서 소위 ‘세속적’ 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며 무조건 금하고 옳지 않은 것이라 했던 것들, 하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적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저자의 명쾌한 논리는 막막했던 나의 고민에 신선한 청량제와도 같았다. 물론 저자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진일보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속화의 물결에 들어가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기 보다는 그것들을 두려워하고 무조건 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정죄하며 피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재 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그것과 강도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께서는 속된 세상에 세상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저자가 인용한 문구 중에 교회는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잠정적으로 보여주는 곳” 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하나님께 부끄러워서, 당신의 의도를 구하기도 전에 먼저 판단하고,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준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고 함부로 말해 버리는 한국 교회가, 그리고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이 쓰여진 것이 1965년이다 보니 사실 이 책에서 세속화된 미래 사회에 대해 예견한 모습들을 보며 40년이 흐른 지금의 현실과 맞춰 가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저자의 통찰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익명성을 단순히 ‘자유’ 로 규정한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익명성으로 인해 지연, 혈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현대에 와서의 지나친 익명성은 인간 소외 현상으로 드러나는 등 오히려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자유와 해방의 개념만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약간은 지엽적인 부분을 제외한 전반적인 작가의 논지에는 동의를 보낸다. 혹자는 하비 콕스의 이런 논리가 너무 급진적이고 너무 앞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고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 급진적으로 그의 논리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생각과 논지는 너무나 타성에 젖어 있기에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교계에 경종을 울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군데군데에는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많이 이해하고, 또 많이 공감하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인 지 직업과 대학교에 관한 부분이었다. 직업에 대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저자는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하는 장소와 거처하는 장소를 갈라놓았으며 우리가 일하는 곳에 관료주의적 색채를 띠게 했으며 우리의 일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질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이 중 세 번째 사실은 약간 충격적이었다. 한동대 와서 수없이 들은 말과 수없이 해왔던 말이 바로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말이었다.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 비전을 어떻게 주셨는지를 상세히 간증하고,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꼭 제 비전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말을 하곤 했다. 나 또한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내가 두려웠던 건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 다들 뭔가 뚜렷한 확신 속에 있는데, 난 단지 흥미와 약간의 적성을 고려한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가 저들보다 덜 경건하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리적 부담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비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 정말 아니면 어떡하지? 라는 고민까지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일터로 불러내시는 분이 아닌, 일을 통한 감사와 환희에로 불러주는 분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세속화를 통해 일 속에 있는 노이로제적 강제성과 종교적 신비감을 배제하여 사람이 자유롭게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부여된 재능과 흥미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말이다.

기독교 대학의 부분을 읽으면서 역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교회는 대체로 대학교가 기독교적이거나 교회적인 것이 못되기 대문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학교는 대학교 답지 못할 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라는 저자의 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내가 졸업한 학교를 바라보는 교계의 시선을 볼 때 교계는 우리 학교가 대학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한다기 보다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하며, 우리 학교의 학생들도 학교에 닥친 여러 문제들에 직면할 때 참 대학생답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기에, 내가 선택한 학교를 절대 합리화 시켜주지 못하는, 하지만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던 이러한 생각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학교도 많은 교회들이 시도하려 했던 대학교의 모습들 중 하나의 모델일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 학교는 그저 또 하나의 기독교 대학의 실패한 모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회의적으로 바라봤던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대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구성원들의 역량에 달린 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구성원들의 역량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생각일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학교니까. 합리화의 기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들은 내가 너무 경건하지 못한 건 아닌가,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라는 ‘하나님의 뜻’ 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억압했던 심리적 기제들에 대한 돌출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으로서 경건해야 하고, 그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심리적 부담감이 많이 해소되었고, 오히려 세상의 일을 판단할 때 기존의 타성에 젖은, 교회에서 판단한 하나님의 기준이라 스스로 부여하는 가치가 아닌, 정말 하나님의 정말로 원하시는 바를 조금씩 알아가야만 할 것 같다는 즐거운 부담감이 생긴다. 물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통달한(?) 경지에서 하나님 곁으로 달려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감사하고 행복한 일은 없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지금의 내 모습 또한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향한 과정으로 존재하기에! 이제 예전에 해 오던 “세상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하나님 바라보며 나아가도록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갈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해야겠다. 아멘!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결 2007-08-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것도 추천해야겠군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웽스북스 2007-08-05 21:13   좋아요 0 | URL
앗, 감사드려요 ^^

yamoo 2009-01-3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하비콕스의 세속도시를 아직도 못읽었네요...아직도!! 멋진 리뷰 잘봤습니다~~ㅅ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