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럿셀의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이라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말하자면 나는 이 주제에 대해 확실하고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길가에 나뒹구는 만원 짜리 지폐처럼 명확하다. 왜 사람들이 저 돈을 줍지 않을까? 나는 의아해 한다. 가장 그럼직한 답은, 너가 돈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 저건 돈이 아니거든, 다른 사람들은 진짜 돈과 길가에 버려진 구겨진 종이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는 되거든...이 될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돈이 아니라 구겨진 종이라면 한 달쯤 후 좀 더 나이를 먹고 현명해졌을 때 나도 나의 착각을 깨달을 수 있겠지. -그때를 위해 지금 이렇게 기록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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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럿셀의 판단 이론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이라는 주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논리 철학 논고"를 읽었다. 어젯밤부터 빠르게 눈으로만 읽었기 때문에 깊이있는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깊이는 나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느낀 것들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1). 럿셀에 대한 비트겐쉬타인의 영향력은 상상 외로 어마어마하다.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럿셀이 한창 철학적으로 물이 올라 야심적으로 쓰고 있던 원고를 자랑삼아 실수로 비트겐쉬타인에게 보여 준다. 비트겐쉬타인은 무지막지한 비판을 한다. 결국 럿셀은 원고를 포기하고 심지어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여자 친구에게 고백한다. 비트겐쉬타인은 북유럽 외지에 가서 혼자 이 문제(아주 좁게 보면 판단 이론)를 연구하겠다고 한다. 럿셀은 비트겐쉬타인에게 그럼 너가 구상하고 있는 이론이나 알려주고 가라고 한다. 비트겐쉬타인은 메모 수준의 내용을 불러 주고 떠난다. 럿셀은 이 메모를 열심히 연구한다.

그 후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럿셀과 비트겐쉬타인은 전혀 연락이 안된다. 그리고 럿셀은 책을 한권 낸다. 내가 영국에서 철학책을 체계적으로 읽어 보자 마음을 먹고 처음 샀던 "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말하면, 럿셀이 비트겐쉬타인이 제시해 준 방향대로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과장이긴 한데 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살짝 웃긴 얘기들이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비트겐쉬타인의 노트를 보면 명제를 화살에 비유한 이야기가 나온다. 럿셀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나온다. 그 대목에서 럿셀이, 마치 스승의 화두를 안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미숙한 젊은 라마승같은 모습을 보였다고 하면 내가 느낀 바를 제대로 전달한 셈일 것이다.

2). 논리 철학 논고가 당대에 끼쳤을 충격파.

내가 읽었을 때 "논리 철학 논고"의 여러 주장들 중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이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명제란 요소 명제의 진리함수라는 주장, 다른 하나는 논리에 관한 명제들은 토톨로기라는 주장. 물론 지금은 낡아 보인다. 그리고 이 이론들이 비트겐쉬타인 고유의 것인지 확신은 없다. 럿셀과 비트겐쉬타인의 텍스트 일부를 읽어본 결과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당시 사람으로서 이 이론들을 처음 대했더라면 엄청난 충격을 먹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이론들이 가진 함의는 강력하다. 그리고 그 표현은 단 한줄의 문장들로 끝난다. 내용에서나 스타일에서나 경이적이다(비유하자면 막 발견된 DNA의 분자 모델이 그렇다).

3). 판단 이론과의 관련성.

나의 출발점은 럿셀의 판단 이론이었다. 그래서 너무 지나치게 판단 이론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의 내 관점에서는 판단 이론 문제는 "논리 철학 논고" 전체의 입구인 것 같다(그러므로 출구다. "논리 철학 논고"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논고" 전체(!)를 자연스럽게 재구성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내 야망이다. 

어쨌든 갈 때 까지는 가보자. 철학에 있어서든 내 삶에 있어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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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11-22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개인적으로 너무도 존경해 마지 않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이 나와서 미친듯이 읽었네요..결론적으론 럿셀의 판단이론..--;;

아, 궁금한데요, 요즘도 럿셀의 논리분석이 영국에서도 인기가 있는지요??

weekly 2011-11-22 22:17   좋아요 0 | URL
제가 영국에 온지 3달되었고 학생도 연구자도 아니어서(어학 연수 중이랍니다) 권위를 갖고 말씀드릴 여지는 없습니다. 그냥 느낌만 말씀드리면요... 럿셀이 영국이든 어디든 철학계에서 인기가 있다든지 많이 논의되고 있는 철학자라고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만 분석 철학(명칭이 애매하긴 하지만)의 2대 시조(다른 한 사람은 프레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철학계에서 논의하고 있는 문제들의 근원을 찾아올라 가게 되면 럿셀을 꼬박꼬박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생각에서 럿셀을 공부하기 시작했구요.

yamoo 2011-11-23 10:30   좋아요 0 | URL
어학연수 중이신데, 럿셀의 판단이론 소논문을 준비하고 계시군요! 전, 유학가서 수업듣고 보고서 쓰시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유학가신거 맞죠?

철학과 나오신거 같다는^^

럿셀, 프레게, 카르납, 비트겐슈타인, 모리츠 슐릭...한 때 애정을 갖던 분야인데 요즘 우리나라 현대철학은 프랑스철학(들뢰즈, 라캉, 데리다)과 지젝이 대세라 많이 아쉽네요..

weekly 2011-11-23 18:36   좋아요 0 | URL
철학과 졸업하고 딴 일로 밥 벌어먹고 살다가 석 달 전에 어학 연수 와서 실컷 놀다가 얼마 전부터 진학 준비한다고 열을 내고 있답니다.^^ 소논문은 지원할 때 필요한 에세이구요. 그런데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남들 다 지원하고 있는 시기에 저는 아직 에세이도 끝내지 못했구요, 영어 점수는 아예 없구요, 추천서도 못받았구요... 등등 준비가 하나도 안되어 있거든요...-.-

암튼 좋은 하루 되세요~
 

럿셀을 읽다 지치면 커피를 뽑아들고 벽 앞에 선다. 벽에는 지난 프랑스 여행에서 사갖고 온 세잔의 정물화가 붙어 있다. 이미 말한 적이 있지만 세잔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프랑스 토착 작가다. 그림 곳곳을 보라. 프랑스적인 분석의 산물이 드러나 있다. 왼쪽 아래의 과일은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느라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쪽 위의 벽과 바닥이 만나는 부분을 보라. 과일 바구니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공간이 뒤틀려 있다. 바구니 왼쪽 오른쪽도 바구니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다. 하나 하나의 형태들. 그러면서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들.


(출처: http://www.claudiomartino.com/carbonara.htm) 

고다르의 영화에서도 이런 분석성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분을 열거하다 전체로 귀납하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도 수도 없이 나오고 다른 영화에서도 나온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고다르가 데카르트의 후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럿셀도 신나게 세상을 분석하는 중이다.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제 럿셀에게 문제는 이 객체들을 어떻게 하나의 복합체로 구성할 것인가(unity 문제), 그리고 우리가 거짓인 명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구성과 의미는 분석을 통해 사라지는 것들이다. 철학과 과학에 있어 그렇다. 어쩌면 사실에 있어서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일런지 모른다. 예를 들면 생명체를 분석해 보라. 무엇이 남는가? 그러므로 생명에 어떤 본질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상식과 싸우려 해서는 안된다. 철학이란 상식을 포섭하는 것이니까.

결론은 이렇다. 럿셀은 상식과 싸우고 있다. 세잔은 새로운 미적 경험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고다르는 통속 드라마로 포장된 감정의 분석성과 비분석성에 대한 철학 논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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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습작 기간을 가졌다. 카페에 앉아 뾰족하게 깍은 연필로 노트를 채우다가, 잘 되는 날이나 그렇지 못한 날이나, 시간이 되면 "이제 그만"하며 노트를 덮고 일을 끝낼 줄 알았다.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 찾아 올 뮤즈를 믿었던 것이다.

뮤즈가 찾아오면 다시 뮤즈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안다. 뮤즈를 믿으면 뮤즈가 찾아온다.

자기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탕진한다. 마치 우물의 물을 죄다 퍼내는 것처럼. 이튿날 아침 그 사람은 좌절할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밤새 좌절을 만들어 놓았는데 말이다.

내일 아침에 다시 뮤즈가 찾아 올 것이다. 오늘의 작업이 끝났다면 이제 그대가 할 일은 몸과 마음을 오늘 아침과 같은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바보같이 자신을 믿지는 말자. 다만 뮤즈를 믿고 그를 즐겁게 해 줄 생각으로 행복해 하며 마음을 다해 그를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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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이더라.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항상 완벽한 계획을 세워 놓지만 한번도 여행이 계획대로 된 적은 없었노라는. 어찌 그렇지 않을수 있을까?

전체를 모르고서는 일부도 알 수 없다. 일부분을 모르고서는 전체를 알 수 없다. 고전적인 딜레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출발지로 되돌아가서 여정을 음미한다. 어떤 사람은 일단 끝까지 가 본 후 출발지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언제나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여행은 일종의 지적 여행이다. 나는 안도와 자만, 좌절과 초조의 시간을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 그것이 여정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그것이 무한에 가깝게 반복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영리해야 한다. 영리함이란 적당한 무지를 스스로에게 용인할 수 있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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