럿셀을 읽다 지치면 커피를 뽑아들고 벽 앞에 선다. 벽에는 지난 프랑스 여행에서 사갖고 온 세잔의 정물화가 붙어 있다. 이미 말한 적이 있지만 세잔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프랑스 토착 작가다. 그림 곳곳을 보라. 프랑스적인 분석의 산물이 드러나 있다. 왼쪽 아래의 과일은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내느라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쪽 위의 벽과 바닥이 만나는 부분을 보라. 과일 바구니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공간이 뒤틀려 있다. 바구니 왼쪽 오른쪽도 바구니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다. 하나 하나의 형태들. 그러면서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들.


(출처: http://www.claudiomartino.com/carbonara.htm) 

고다르의 영화에서도 이런 분석성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분을 열거하다 전체로 귀납하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도 수도 없이 나오고 다른 영화에서도 나온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고다르가 데카르트의 후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럿셀도 신나게 세상을 분석하는 중이다.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제 럿셀에게 문제는 이 객체들을 어떻게 하나의 복합체로 구성할 것인가(unity 문제), 그리고 우리가 거짓인 명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구성과 의미는 분석을 통해 사라지는 것들이다. 철학과 과학에 있어 그렇다. 어쩌면 사실에 있어서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일런지 모른다. 예를 들면 생명체를 분석해 보라. 무엇이 남는가? 그러므로 생명에 어떤 본질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상식과 싸우려 해서는 안된다. 철학이란 상식을 포섭하는 것이니까.

결론은 이렇다. 럿셀은 상식과 싸우고 있다. 세잔은 새로운 미적 경험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고다르는 통속 드라마로 포장된 감정의 분석성과 비분석성에 대한 철학 논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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