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항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9
이강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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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닭 중에서

그 저녁만 아니라면 당장 배드민턴 채를 낚아채고 싶어 제자리걸음인데
내 맘 알아챘는지 아가씨들은 셔틀콕 버려두고 손 뽀뽀를 날린다
셔틀콕은 막 끓는 물에서 꺼낸 암탉처럼 거지반 털이 뽑히었다

오오라, 닭집 달려가 내 닭털 주워 와서는 셔틀콕 만들어 주었으면
그러면 아가씨들은 삼촌, 배드민턴 쳐요, 팔짱 낄 것을

나는 못 이기는 척 어두워질 때까지 푸드득, 푸드득 날갯죽지를 적실 것이며
슬그머니 이름도 주고받을 것이며
사흘에 한 번씩 투석하느라 닭털 뽑는 짱구 형님 왕년의 전설도 풀어놓을 것이며

그러면 엄나무닭이고 배드민턴이고 다 잊고 초롱다방 병아리 같은 아가씨들과 고향이며 눈물이며 쏟기도 할 것을


다 진지하고 운동권의 슬픔이 티나는 글이며 슬프다 싶은 시 일색이면 솔직히 재미가 없다.


이미 그런 시집이 왜 좋지 않은지에 대해선 블로그에 쓴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가 더욱 돋보인다. 닭집이 이 시인에게는 일종의 힐링 장소인지 닭에 관한 이야기가 이 시 말고도 다시 한 번 더 등장한다. 시에선 저자가 어머니의 밥상인 엄나무닭을 먹으러 집으로 간다. 그러다가 배드민턴을 치는 초롱다방 아가씨들을 본다.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 여성의 모습은 건강함과 아름다움이 범벅된 절세의 풍경이 아닌가. 그 아가씨들도 그를 보고 셔틀콕을 버려둔 채 환호성을 지르고 손 뽀뽀를 날렸을 것이다. 말도 걸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남자가 귀여웠을 테니까. 수줍어진 시인은 배드민턴 채를 낚아채는 상상을 하며 엄나무닭만 아니었어도 그 사이에 끼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영락없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지만, 꾸밈이 없어 귀엽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말을 걸지 않고 시를 쓴 듯하니 더욱 좋다.

 

느린 우체통

봄비 맞으러 나갔는가
박새, 집을 비웠다

강원도 홍천군 종자산길, 박새는
이 숲의 바다를 제주왕나비처럼 날개가 해지도록 건너갔을 것이다

박새의 발자국처럼 봄비가 찍힌다

발자국 따라 바다를 떠나며
6개월 뒤에 떠난다는 우체통에 봄비 두 통을 넣었다
편지의 느린 걸음이 마음에 썩 내키진 않았다

지금 내가 항로를 벗어나진 않았는지
가을쯤 물어볼 생각이었다

돌아보니 박새의 집이 우체통을 닮았다


전반적으로 시들이 이런 느낌이다. 비가 왔다고 이야기하진 않는 시 조차도 왠지 날이 흐리고 추적추적 이슬비가 왔을 것 같은 느낌이다. 시인에게 무언가 큰 일이 있었구나 느껴지긴 하는데, 사회 이슈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완전히 서정시로 돌아선 듯하다. 기존의 시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운동권에 많이 참여하신다는데 메세지가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게 조금 아쉽다. 환경보호에 관한 글조차도 없었다. 그렇지만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생생한 풍경묘사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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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원 : 일반판
이원석 감독, 한석규 외 출연 / 해리슨 앤 컴퍼니(H&Co.)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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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는 게 곧 전쟁이지요.

1. 외로움에 치를 떠는 독수공방 왕비 컷 한 편. 

 일단 이 왕비의 배경부터 설명하자면, 그녀는 선왕 때 왕비 간택에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선왕의 동생, 즉 지금의 왕에게 냅다 떠맡겨진 신세가 되었다. 전부터 서로 눈짓으로 사랑의 마음을 주고 받고 있었으니 '계획대로다'라고 생각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왕이 죽을 때까지 형인 선왕에게 받고 있었던 터라 잔뜩 열받은 그는 왕이 될 때까지 그녀와 정을 통하지 않는다. 물론 이 왕비 빼고 다른 여자들과는 실컷 즐긴다 ㅋㅋㅋㅋㅋ 그러다가 공진이라는 천재 상의원이 등장하면서 이 영화는 무려 왕비 네토라레까지 치닫는다. 옷 치수를 재는 도중 순간적인 욕망에 몸을 떠는 배우의 심리적 연기가 극단에 치닫는데, 여기에서 메이크업까지 약간 지워서 남자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소녀의 얼굴을 그대로 담아낸 점을 높이 사고 싶다.

 한창 그러다가 영의정 딸인가 하는 기가 세고 대찬 여자애에게 왕이 휘둘릴 즈음하여 영화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옷을 중심으로 하고 만든 영화라서 클라이막스를 보려면 옷이나 지켜보며 한참 기다려야 한다. 그게 이 영화의 단점이라면 단점일 것이다. 시간을 질질 끈다.

 

 

 

2. 그러나 이 옷들의 색상이 상당히 현란하여 또 꽤 볼만하므로 가급적이면 영화관이나 대형스크린으로 보시길 바란다. 블루레이면 더 좋다. 

애초에 이 영화는 인터넷 평을 믿지 않는 게 좋다. 일단 이 영화가 욕을 먹는 이유가 모두가 불행하여 꿈도 희망도 없는 엔딩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일단 영화를 만든 이원석이란 사람이 신인 감독이기 때문인데, 이 감독의 2012년 데뷔작인 '남자사용설명서'를 보면 연애에 관해서 다루는 게 장난 없다. 게다가 영화에 사용된 색감도 정말 훌륭한데, 이것이 상의원에서도 그대로 발현된다.

 

 

 

 3. 사는 게 곧 전쟁이라는 말은 '인생은 곧 실전이다'라는 말과 연관된다.


 노력하는 자는 천재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천재는 곧 이상을 안고 비명횡사하기 마련이다. 왕비가 입고 등장한 그 화려한 웨딩드레스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된 그녀를 위해 공진이 온 마음을 쏟아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얻을 수 없는 사랑을 꿈꾸고 있는 왕비는 그를 스쳐지나가 버린다. 결국 그의 이루어지지 못한 바람으로 만들어진 창작물은 훗날 실전을 잘 견뎌서 공진을 희생시킨 조돌석의 공으로 돌아가 박물관에 전시된다. 그 웨딩드레스는 살아서는 결코 남자의 손을 타지 못하는 왕비의 얼굴만큼이나 차갑다. 

 보는 내내 상당히 피곤하고, 쓸쓸하고, 추워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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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년을 만나다 & 한국단편영화 퀴어컬렉션 1 (2 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주)인디스토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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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헐거워졌어?

말 그대로 게이영화 소개이므로 거부감 있으신 분들은 조용히 뒤로가기를 눌러주시면 됩니다.

 

1. 매우 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세 사람.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쭉 설명하자면 진정한 피해자, 가해자에게 뻑간 주인공, 진정한 가해자. 퀴어영화 20은 매우 짧은 동성애 영화지만, 이성애자를 포함하여 동성애자 중 그 누구도 거론하지 않는 요소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야말로 퀴어영화라 할 만하다. 분위기는 무거운 걸 넘어서 상당히 불편한 분위기이므로 다큐멘터리같은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닥 추천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매우 짧은 단편영화라서 줄거리를 이야기하기도 대략 난감하지만,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하도록 노력하겠다. 꽤 유명해진 영화라서 이미 전체 줄거리에 완결까지 설명해 놓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인디플러그에 아직도 이 영화를 판매하고 있을 테니 가급적이면 구입해서 보는 걸 추천한다. 할리우드는 둘째치더라도 독립영화 만드는 분들은 그 푼돈 받으며 먹고 산다.

 

 

  2. 주인공은 고교시절 악의 꽃 시집을 읽는 꽃미남 학생이었다. 하지만 어떤 놈팽이의 마수에 걸려들어 게이가 된다. 일단 내가 싫어하는 모든 걸 다 갖춘 이 능구렁이의 태도는 이러하다. - 고교시절 왕따 두 명을 거느렸는데, 곱상한 한 명은 놀아주는 대신 음울해 보이는 애는 대놓고 성희롱했음. 곱상한 한 명과는 뭘 했는지 이하생략한다. - 여친이 있는데도 주인공과 호텔에서 떡을 치고(...) 바람 안 폈다고 거짓말함. 그러고나서 주인공 바꿔줌. 여친이 왜 의심 안 하는지는 이하생략한다. - 그러면서 주인공은 자기 말고 다른 남자 못 만나게 한다. 이... 이것은? 내가 바람펴도 너는 절대 피지 말라는 태양의 <나만 바라봐>??? 아무튼 가히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고등학교 시절 이 능구렁이의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걸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첫 사랑을 그대로 지고 가는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게이 바를 가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봐도 그 얍삽한 시키랑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의외로 날 찾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다 그치가 그치였고'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퀴어던 아니던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아마도 이성애자 남자들은 '그년이 그년이고'라고 생각하겠지. 동성애자 여성도 마찬가지.

 

 

3. 아직 20대를 벗어나진 않았지만 20살을 넘어 2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고, 뻔한 걸 알면서도 아직 애인을 두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러하다. "이 세상에 완전히, 영원히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많이 만나라." 물론 이 세상은 양다리 혹은 문어다리에 아직도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세속의 욕을 피해가기 위해 '썸'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이 얼마나 발음하기도 간단하고 편한 단어인가. 지식이 별반 없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학교시스템이 상당히 엿같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특히 처음부터 가해자(선생)와 피해자(학생)가 정해져 있는 사회가 그렇다. 물론 학생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지간히 특수한 경우 아니면 성립 불가능하다. 딱히 대학을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20살이 되면 세상이 내 앞에 열린다. 가해자도 되보고 피해자도 되보라. 혹은 그 둘 아무것도 하지 말아봐라. 마음껏 날뛰되, 마음 속에 플라톤 하나는 모셔보라. 이 세상에 진리는 하나뿐이며, 내 진짜 사랑은 내 진짜 모습을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는 판도라의 희망. 지금까지의 내 경험에 의하면, 그닥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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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O.S.T.
미누 (MiNU) 작곡 / 소니뮤직(SonyMusic)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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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불쌍하네. 할아버지 생각을 누가 하나. 나밖에 하는 사람이 없는데...

 

 1. 워낭소리에서 상당히 거북해서 주인공인 소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할아버지였다. 그 분들이야 투닥투닥 싸우면서도 나름대로 사는 재미가 있을테니 잘 살겠지만, 몇몇 관객들이 보기엔 상당히 거북해보였고 그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엄마의 부탁으로 인해 이 영화를 보러 같이 영화관에 가기 직전까지도 그 트라우마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워낭소리가 워낙 거하게 욕을 먹었기 때문에 편집한 건지, 아님 원래 할아버지 성품이 착한지는 모르겠지만(제발 후자이길 바란다.) 상당히 볼만했다. 여자 집안에서 사윗감을 찾다가 어머니를 일찍 잃은 남자를 데릴사위로 데려온 것도 유별나다. 게다가 상당히 장수하셔서, 할아버지는 100살까지 살다가 죽기를 꿈꾸고 있었다.

 

 게다가 할머니와 꽃구경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저승에 관련된 이야기를 진중하게 하시는 걸 보면, 연륜을 담고 있는 분이셨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할머니에 대해 설명할 때 자세히 언급하겠다.

 

2. 할머니에게 짖궂은 장난도 잘 치시는 데다가, 강아지를 매우 사랑해서 몸이 아파 앓아누울 때조차 강아지를 옆에 끼고 계셨다. 게다가 할머니를 위해 노래를 잘 불러드린 듯한데, 엔딩 크래딧에서 할아버지의 구성진 노랫가락이 다시 나오므로 영화가 끝났더라도 왠만하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길 추천한다. 할머니가 잔소리를 할 때면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시면서 입을 꾹 다무는데, 할머니가 칭찬을 하면 금새 입 안으로 머금듯이 '히잉'하는 웃음소리를 내신다 ㅋㅋㅋ

 

 노인대학에서 상당히 별난 할아버지로 소문나셨을 텐데 워낙 몸이 안 좋으신 데다가 외딴 집에서 사시니 세간소문엔 연연하지 않으셨을 듯. 아무튼 요즘 시대에서조차 상당히 보기 드문 천연계(?!) 남성이었다.

 

 

 3. 사실 이 영화에서는 대사보다도 침묵이 더 값어치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할아버지의 숨소리는 너무도 가냘파서 금방이라도 뚝 끊어질 듯이 보인다. 노부부의 자식들이 노부부 앞에서 싸움을 할 때에도 할아버지는 무서우신 건지 기가 막히신 건지, 별 소리 못하고 숨죽여 울기만 할 뿐이었다. 약간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한없이 나약해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러나 몸이 좋지 않은데도 기어코 할머니를 따라가서 농사일을 하려 애를 쓰는 장면이라던가, 자녀들이 오기 전에 혼자서 벽에 거울을 달기 위해 애쓰는 장면(상당히 컸지만 아마도 젊은 시절에는 그 거울을 번쩍 들어 벽에 다는 건 할아버지에겐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병세를 지켜보다 지쳐 잠든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는 장면은 남성성을 넘어선 할아버지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무력감과 자괴감의 표출 없이 일상을 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히 할머니를 걱정해서 참았으리라.

 

 할아버지는 자신의 남성성을 암흑으로 표출한다. 그는 꽃이 피면 지듯이, 인간도 나고 죽으며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의 가슴 속에는 허무가 묻어 있다. 그의 생각 속에서 그가 머지않아 떨어질 저승은 그저 황무지일 뿐이다.

 

 

 

4. 그러나 할머니는 그 생각에 침묵과 무시로서 끈질기게 반대한다. 할아버지의 꺼림찍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어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시장으로 가서 여태동안 살아가면서 잃어버렸거나 죽은 아이들의 내복을 산다. 그리고 내복을 하나하나 불태운다. 저승에 있을 그 아이들에게 입히기 위해서라고 한다. 결국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그녀는 할아버지의 옷을 태운다. 저승길을 걷고 있을 할아버지가 춥지 않게 런닝셔츠까지 잊지 않고 불태운다. 그녀는 내세를 믿으며, 그 곳에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화장은 서양에서 그닥 반기는 풍습이 아니다. 부모가 준 신체를 보존해야 한다는 유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화장을 장례 의식으로 생각하는 곳은 불교뿐이다. 불교는 마음이 거울이며, 그 거울을 항시 들여다보고 닦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마음 들여다보기'에 비해 화장은 생물의 궁극적인 육체정화의식이다. 난 장담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질질 짜면서도 속으로는 '설마. 저 할아버지 할머니도 물어뜯고 치고박고 싸우던 시절이 있었겠지.' 라고 못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으리라고. 혹은 '여름에 저 시골 한 번 다녀가 볼까? 할머니랑 사진도 찍어야지.'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신문기사에 의하면 벌써부터 그 부근에 이상한 관광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영화는 영화로 끝내자고. 그들은 적어도 영화에서는 대체로 행복한 순간을 살았고, 그 중 한 쪽은 완전한 정화의 순간을 거쳤다. 삶을 고독사로 끝내는 사람이 많은 이 시대에서 말이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달고 다닌다. 당신은 당신의 옆에서 76년 가량을 살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당신이 죽으면 죽은 당신이 불쌍하다고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런 자격이 생길만한 인간으로 자신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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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이후를 살아갈 어린 벗들에게 - 후쿠시마가 전하는 원전의 진실과 미래를 위한 제안 생각하는 돌 5
다쿠키 요시미쓰 지음, 윤수정 옮김 / 돌베개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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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는 여러 사람들과 영화관에서 모여서 같이 봐야 하는 영화다.


 최근 영화를 방영해주는 방송사가 늘어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혼자 보는 영화'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저작권 문제는 뒤로 하더라도, 영화는 여럿이서 같이 보아야 더욱 실감이 난다. 어느 광고에서 그렇게 말했듯이 깔깔 웃으면서 뒷좌석을 뻥뻥 차고 몸짓 발짓으로 생쇼를 해도 괜찮은 영화관은 없다. 영화관도 일종의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를 차려야 한다. 사회적 가치관에 묶여있다고 봐도 될 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원 이상의 돈을 내면서 굳이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최대한 큰 스크린과 성대한 음향효과를 기대하는 경우도 있고,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시사회부터 먼저 맛보려는 영화 얼리어답터들도 있고, 맘에 드는 감독이라던가 배우가 출연했을 경우 관객수를 한 명이라도 더 늘려서 그 영화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회참여의 의미에서 (혹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되어있는 것을 더러 보려는 심술궂은 마음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카트가 그렇다. 그런 종류의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일부러 좌석을 휙 돌아본다. 나 말고 어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까, 관객 수는 얼마나 될까 유추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이 후쿠시마의 미래도 그런 경우이다. 혹시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전국적으로 소정의 증정품 그리고 다과와 함께 무료로 상영해주는 상영회를 찾으시길 바란다.

 

 

2. 후쿠시마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일본 전역 중 후쿠시마와 가까운 지방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맞겠지만.)은 자신들의 악몽같은 삶을 '스트레스'라는 문자로 압축한다. 그들에게는 최근 쓰나미, 지진,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라는 삼중고가 한꺼번에 닥쳤다. 일본 언론에서도 잘 방영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삶을 이 영화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나레이션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와닿는 건 피난민과의 인터뷰 중 '스트레스'라는 단어 한 마디였다. 인터뷰에 응한 이는 옛날에 어부로 일했다고 하는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었는데, 방사능이 자신이 일터인 인근 바다에 퍼진 이후로 조업을 금지당했다. 그에게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어부로 일하더라도 자신이 잡는 물고기가 '오염물' 취급당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아직도 재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지 않고 있으며, 협동조합이나 일부 자선가들이 기부하는 생필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의 멍한 표정은 동정을 넘어 일종의 공포를 자아낸다. 그의 내부에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은 치명상을 입은지 오래였고, 심지어는 존재감조차 부옇게 보였다. 이어지는 전문가의 인터뷰. 그는 자신들이 망가져가고 있다, 일본 사람들이 지녀온 모든 특성들이 부서지고 있다고 하소연하며, '끔찍한 생각만 들어 매우 두렵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끝내고 있다.

 

3. 이런 상황이니 아이를 둔 어머니들은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전부터 아이들의 먹거리와 교육에 특히 깐깐했던 일본의 어머니들은 이제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다니며 자신들이 평상시 다니던 산책로, 아이들이 뛰놀았던 놀이터를 일일히 측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그에 대한 효과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버섯이나 키가 큰 나무 등에서 방사능 측정치가 유달리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해냈다. 이전에 우리나라 언론에서도 잠깐 거론되었던 검은 먼지는 가로수길의 작은 관상용 나무를 뒤덮고 있다가 이 어머니들에게 발견되었다.

 
 이제 '정부에 대한 신뢰'는 일본에서도 옛말이 되고 있다. 후쿠시마의 어머니들은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정부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여전히 그들은 일본 특유의 조용하고 날카로운 권유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청으로 가서 방사능의 위험 수치를 재설정해 달라고 권유하는 어머니 대표는 다소 험상궂기까지 하며, 일본 국회를 포위하는 100만명의 일본 시민들은 자못 시끄러운 음악과 큰 소리를 내며 후쿠시마에 아직도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대피할 것을' 종용한다. 폐를 끼칠까 항시 조심하는 그들의 문화를 그들이 스스로 깨고 있다.

 

 

4. 후쿠시마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그들 중 17명은 체르노빌로 여행을 떠난다. 후쿠시마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기 이전, 체르노빌에서도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도시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고 싶었다. 체르노빌이 폭발했어도 그럭저럭 생존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을까? 비록 일본과는 거리가 꽤 떨어진 나라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 장소와 그 사람들의 운명이 자신들의 미래라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들도 이후에 괜찮아질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 그 희망은 산산히 부서졌다.

 

 늘상 단체여행을 가면 그러하듯이, 체르노빌에서도 그들은 사진을 찍으며 연신 감탄하기 바쁘다. 하지만 그들이 찍는 풍경은 황폐해지다 못해 그로테스크해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 주변 폐가의 모습이다. 게다가 그들이 여행에서 항상 자신의 옆에 가지고 다니는 게 있으니,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노란 방사능 측정기이다. 체르노빌에 진입했을 때 유달리 경고음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다시 함성을 지른다. 그러나 그 함성은 감탄사라기보다는 경악에 가까웠다. 그들은 현실도피를 하거나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를 풀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미래를 직시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겪는 걸 감수하더라도 현실에 대해 올바로 알기 위해, 그동안 무심하게 지구의 자원을 낭비해왔던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다. 영화 속 일본 사람들에게나 관객들에게서나 그 사실을 실시간으로 인지시켜주고 있는 게 바로 방사능 측정기의 날카로운 기계음이다. 

 

 

 5. 사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진짜 이유는 이 영화 속에 들어 있다. 아무리 언론에서 한국의 신생아 수가 급감하고 있다고 소란을 부리더라도 어차피 주변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은 많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도 많더라. 난 이왕 내 아이에게 투자하기도 벅찰 정도로 박봉인 인생, 절약하고 저축해서 그 아이들에게 투자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는 후쿠시마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기 전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일이었다. 상당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나 생각도 보수적인 나로서는 녹색당 당원이 되는 것조차도 상당히 '좌파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바다 어딘가에 방사능이 집적된 곳이 상당하다는 뉴스를 보고서 생각을 더욱 진보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남자친구도 아마 일본에 친한 선배가 없었더라면 내 생각에 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이후, 남자친구는 선배가 후쿠시마에서 꽤 먼 거리에 살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도감도 잠시, 그 선배가 연락을 잠시 끊었을 때 남자친구는 걱정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선배가 먼저 연락을 함으로서 연락이 이어질 수 있었는데, 그 선배의 말로는 '심한 두통을 느껴서' 겁을 먹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영화에선 체르노빌 사건 이후 피폭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강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코바린 마을이 등장한다. 그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강의를 듣지 못할 정도의 심각한 두통'을 겪어서 잠시 책상에 엎드린 적이 있는 아이들이 60%를 넘는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학교는 어느 정도 북한 학교 느낌마저 감도는 딱딱한 분위기였으며, 아이들은 몸이 아파서 수업을 듣지 못하는 자신들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듯했다. 땡땡이를 칠 수 있는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6. 우리나라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이 산간지방인 데다가 땅도 조그만 우리나라는 몇 기만 지어도 핵발전소 밀집지역이 된다. 게다가 몇몇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우리는 남한과 북한으로 구분되어 있다. 위험지역을 완전히 벗어나려면 이 나라를 떠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이미 세계 어디에서도 처리할 수 없다는 핵폐기물이 경주에 쌓이고 있다. 문무대왕의 안부는 둘째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후쿠시마 사건 피폭 지역 주민은 말한다. 각자 살 길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해야 한다고. 

 

 이전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14년 11월호' 리뷰에서 말했듯이 나는 '올바른 소비'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돈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데도 중요하지만, 선물해도 적당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물품은 없으며 내 가치관을 표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지금은 녹색당 당원이 되어 당이 활동할 기금을 달마다 내고 있지만, 앞으로는 그보다 더 직접적인 행동에 나설 계획이다. 설계하고 있는 몇 가지 계획 중 하나는 내 월급 10분의 1을 환경을 위해 쓰는 것이다. (생협 회원이 되거나 야채 꾸러미를 사는 등.) 사실 교회가 나라를 뒤덮고 있고 개신교가 공공장소를 마음껏 활보하는 상황에서 난 '10분의 1은 환경에 투자하는 켐페인'같은 게 아주 적극적이고 대중적이기까지 한 정책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개신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거액의 돈을 교회에 바쳐서 정신적인 안식을 얻느니 차라리 사회에 더 효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언가에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사실 전세계 사람들이 자기 월급의 10분의 1을 환경보존에 쓴다면 당장 오늘서부터라도 환경재난은 일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내가 독선적이고 독재주의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자유도 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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