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에 앉다 시인세계 시인선 27
장인수 지음 / 문학세계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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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역의 폭설 중에서

비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포장마차의 행렬
(...) 밥그릇에 사정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허겁지겁 녹여 먹는 취업 준비생들
한국사, 헌법, 영어 공부에 청춘을 건
9급 공무원 수험생들
속성 단기 완성 강좌처럼
금세 한 끼 식사를 해치웁니다
미끄러운 육교를 간신히 건너
학원 건물로 사라집니다
"씨발, 천지 분간은 필요없다."
학원 입구에서
폭설을 뒤집어쓴 어떤 남학생이
하늘을 치어다보며
선언문을 읽듯 소리칩니다
하늘이 평평 내려옵니다


새로 직원이 채용되었는지 (근데 알아보니 아니더라)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문은 사라졌다. 그래도 전화가 없는 걸 보면 이제 다시는 나에게 문의 안 할 건가 보다. (이것도 아니더라)


다른 알바 하지 말라고 압박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시간협의랜다. 편의점을 갔는데 저녁 8시에 시작해서 아침 8시에 끝낸단다. 일 끝나고 집에 오면 9시다. 3시간 자고 절대 13시에 출근할 수 없는 걸 몸으론 잘 알고 있는 나이면서도 미련이 남는다. 차라리 그렇게 일해서 벌면 부모님을 고생시키지 않은 채 더 떳떳이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러나 다음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직원들이었다. 자리를 옮긴다는 소문(사실 생각해보면 자리를 옮길 때부터 내 개고생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눈 앞에 그려지기 때문에 관둔 게 80%지.) 내 눈앞에서 대놓고 책은 팔리지 않으니 내 코너를 축소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사장, 역시 대놓고 내 앞에서 서적코너 언제 문 닫느냐고, 너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수런댔던 직원들. 굶어죽게 생겼으면 다시 마트 가서 경력 들이대면서 비벼댈 지언정 다시는 이 지방에서 그 직장의 일은 하지 않으련다. 이 와중에 포항은 8시간 일하고 140만원 제대로 준다고 한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따지고보면 이래서 내가 노량진을 가면 안 됨 ㅋㅋ 술만 쳐마시고 공부 안 할게 뻔해.

 

돼지국밥이란 아무래도 서민적인 이미지가 강한 음식이다.


카뮈, 니체, 원효 이들은 모두 시대를 풍미할 사상가들이지만, 우리 가난한 서민들이 실존주의든 철학이든 해탈이든 알 바가 있을까. 그들은 우리가 어리석다고 할 수 있지만, 깨달음의 기회 없이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아갈 뿐인 우리. 찬 바람이 할퀴는 가운데 흘러가는 삶을 우리는 걸어감에, 잠시 주막에 들러 돼지국밥으로 심신을 따뜻하게 달래는 것을 그 누가 욕하리요. 카뮈여, 니체여, 원효여. 토렴을 한 뜨끈한 돼지국밥을 함께 먹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국물을 들이켜자. 그저, 우리는 옆에 내 사랑하는 자식, 아내, 친구가 있음에 안분지족하면서 걸어갈 뿐이고, 지금 내 앞에는 아삭한 깍두기가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소소한 삶의 길 속 작은 것에 만족하는 우리를 욕하는 것이 오히려 돼지가 비웃을 일이 아니던가. (그리고 돼지국밥엔 소주가 있지 않나.) 전에 부산에 가서 돼지국밥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시간도 장소도 살찌는 것도 잊고 순대까지 추가해서 마구 퍼먹었었다. 여행 마치니 3키로 쪄 있더군()

 


솔직하다 못해 빨개벗은 시는 인상에 남았다.


그러나 이런 부류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여성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고리타분하다. 윤리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언제나 말하는 것이라 시에 대해서까지 이런 말을 붙이기 미안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아내를 강제로 덮치는 건 강간이다;;; 아무리 도중에 실패했다 해도, 감기가 걸려서 열이 높은 아내와 한다는 건... 그냥 과장해본 말이라 해도 발정을 억누르는 듯한 시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마광수처럼 다수의 여성이 아니라 한 여성(아내)에게만 집중하는 게 특이하다 볼 수는 있겠다. 굉장히 가족에 대해 많이 쓰는데, 단란하고 약간 과격한 가족에 대한 글은 좋지만 현대시의 흐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 때문에 간단한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기가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야한 시를 좋아할지는 의문이다. 중간에 위치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내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페미니스트는 아니듯 시의 주제가 항상 조금씩 어긋난다는 느낌이 있다. 그게 좀 아쉽다.

 

 소 떼

아버지와 설악산에 갔다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면서
두루 시선을 주던 아버지, 왈,
ㅡ저 바위는 소처럼 눈을 희번덕 부라리네
ㅡ화가 잔뜩 난 것처럼 갈기를 바짝 세웠어
ㅡ제 엉덩이를 내려치는 소꼬리 같구먼
ㅡ구유통을 두 뿔로 치받는 모습이야
ㅡ긴 혀로 새끼를 핥는 모습이야
ㅡ발정난 암소가 밤새 영각을 켜는 모습이야
ㅡ정액을 질질 싸며 수소가 암소를 올라타는 모습이야
ㅡ수소 자지는 어른 팔뚝보다 더 크지, 장엄하지!
아버지의 눈에는
공룡능선, 소청봉, 귀떼기청봉, 비선대의 용솟음이
온통 장엄한 소 떼로 보이나 보다
설악산을 오르며 소 떼 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심란한 마음을 또 시가 이렇게 위로해주네요 ㅋㅋㅋ
한번도 이렇게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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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이한열 - 쓰러져 일으킨 그날의 이야기
김정희 지음 / 사회평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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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코리아 2018을 봤다. 내용 중 이런 게 있었다. 사람들이 일부러 낡은 듯이 만든 새(?!) 운동화를 산다고 한다. 가성비가 매우 좋으며 마치 막 베낭 여행을 마치고 온 듯한 힙한 분위기가 나는 걸까? 나는 1988년에 태어났고 영화에도 나온 정의구현 사제단 중 한 분인 김승훈 사제님께 2007년 첫 영성체를 받았다. (나는 그때 매우 기분이 언짢아 있었던 것만 기억나지만.) 그리고 2007년 핸드폰은 물대포에 작살나고 구두축은 나가버리고 하얀 가루가 온 몸에 묻었다.

이 시기의 1년 전인 1986년을 보자. 그때 롯데면세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해외 명품을 팔았으며 본고장에서는 볼 수 없는 레어한 브랜드들도 많았다. 부자인 사람들은 거기서 쇼핑을 즐겼고 그 시간에 물고문을 받은 사람들도 몇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그 사건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박종철이 죽을 때 너도나도 일어났다. 그러나 그 사건에 무관했던 사람들도 소수이지만 있었다는 이야기다. 면세점에서 쇼핑을 즐기거나 위스키를 마시던 이들은 교묘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영화에서의 그 빽있는 경찰처럼.

어느 목사님이 그랬다. 어머니는 나라를 위해 자식을 사지에 던져야 한다고. 그래야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에밀레종은 잔혹한 어머니의 천당가려는 욕심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아재소리 좀 하자면 그 무엇에도 지지 않으려는 요즘 사람들의 날카로움은 좋게만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이든 사람들도 그렇다. 오늘도 서울을 가니 지하철에서 표독스럽게 전화하는 여성과 실연당했는지 전화하며 울부짖는 여성을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둘 다 나이가 지긋하셨다. 마치 나라를 잃으신 듯한 슬픔이 그들의 소리를 듣는 내내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나라를 그렇게 지키셨으면 1987년과 2007년의 그런 일은 아예 없었을 것 같았다. (이 글 보고 빼액대는 사람들에게 미리 말하지만 나는 여성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무원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일까. 소수의 부자일까 다수의 국민일까. 요새 나는 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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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네번째 살인 - 비밀 + 델타 명지사 한국추리단편선집 5
이상우 외 / 명지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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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누가 맞는지 몰라서 인상적인 글귀를 쓸 수가 없다; 변호사는 어리둥절할 뿐이고...

 의외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감독 치고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온대서 봤는데 본격적으로 가족을 다루었다는 다른 영화들을 보려면 좀 힘들겠구나 싶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포스터가 다르다. 이 점에선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좀 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표현하려고 한(?) 것을 좀 더 확실히 잡지 않았나 싶다. 변호인이 용의자와 이야기할 때 유리의 단면을 비추면 용의자의 얼굴이 변호인에게 담기거나 혹은 용의자의 얼굴이 변호인에게 담기는 것 같은 장면이 된다. 전부 옆얼굴이다. 사건과는 반대로, 인간이 얼마나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남의 이야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듣고 싶어하는지, 그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얼마나 공들여 고민하는지를 이 영화는 긴 침묵을 써서 드러내고 있다. 확실히 그 점에서 이 영화는 감동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벌어지는 공방은 전혀 그렇지 않다. 피해자의 딸과 용의자의 말이 어디서부터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둘은 과거도 앞날도 진지하게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변호인과 피해자의 딸과 용의자가 눈 속에서 노는 장면은 확실히 아름답다. 그러나 용의자가 주장하는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꿈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감독이 보여준 꿈에 대한 부정을 부정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 아닐까 싶다.

 

 

 

뭐 심중의 말은 숨기고 서로 주고받는 핑퐁공방은 잘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피해자의 딸과 용의자는 살인이 벌어진 이후 서로 한 마디도 안 했지만.

아마도 세번째 살인은 용의자의 살인을 말하는 것이라 본다. 요즘에는 용기있게 검사들의 진실을 밝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매우 많아졌지만, 현실은 더 더럽고 추악하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목숨을 맡겨도 될지 대중들은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사형은 아마 법률상으론 있어도 실제 행하지는 않는 것이 되어 낡아가리라. 그리고 언젠가 후세의 사람들은 그 부조리함에 혀를 차리라. 그러나 특히 권력 다 겪어본 사람들이나 그 밑의 중간보스류들이 특히 용의자를 보고 쉽게 말한다. 사형(혹은 범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게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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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리틀빅미디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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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돼지 좋아하는데!

성직자들은 가난하지 않다. 그들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집안환경은 부유한 사람들이다. 프란치스코 또한 이미 그런 생활을 겪어봤기 때문에 더욱더 낮은 곳으로 향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란 핑계로 무언가를 소유하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소유해야 남을 도울 여유가 있는지 한도가 없어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 프란치스코의 고민도 어디까지나 귀족의 삶을 살았던 자의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사실 전 세계 공통으로, 성직자 "배경"이 중요하다.  성직의 계급은 사가의 재산이 얼마냐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가난한 성직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후원이 별로 없어서 부자들 마음을 이해 못해 유명해지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석가모니만 해도 왕자였으며 신라와 고려시대 유명한 국사급도 왕족들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예수만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다. 기적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영화는 프란치스코가 작은 형제회를 세웠을 때부터 시작되며 프란치스코가 아닌, 그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려졌다. 특히 프란치스코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직시하는(?) 성직자 엘리야에게 시선이 맞춰졌다. 그러나 한 인물이 주인공이거나 자주 나올 때, 우리는 그 인물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 또한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오상에 대해 의심의 시각을 갖는 것 또한 그렇지만, 약간 더 이전으로 돌아가보면 엘리야 또한 사제들에게 세뇌교육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프란치스코처럼 눈병을 앓은 것도 아니고, 단지 자살을 하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으나 멀쩡했던 그에게 어째서 수도승은 책을 읽어줬을까?

영화감상평을 둘러봤는데 대체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주변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평이 많았다. 종교인이 아니라서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듯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나라  인간들은 너무 인간관계에 중독되어 진실을 보는 눈마저 흐릿해진 게 아닐까? 결국 엘리야도 상당히 많이 고민한 끝에 프란치스코를 다시 찾아왔고 이는 자신이 작은 형제회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권력에 굴복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론 사회적이고 시사적이고 정치적인 이득을 버려 가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진실이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프란치스코는 죄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개돼지가 아님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그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의외로 찬송가가 많이 나왔는데 분위기 너무나 좋았다. 혹시 그때 나왔던 노래로 OST가 있다면 꼭 다운받아서 듣고 싶다. 인기없는 걸 보니 왠지 찾아도 나올 것 같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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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 블루레이] 블레이드 러너 2049 : 일반판 (4disc: 4K UHD + 3D + 2D + 보너스디스크)
드니 빌뇌브 감독, 해리슨 포드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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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인간의 출산에 관해 인간이 가진 흥미는 기업의 확장을 위해서이다. 인조인간이 인조인간의 출산에 대해서 가진 흥미도 결국 자기 족속의 보존을 위해서이다. 주인공 조를 미끼로 쓴 후, 새로운 인조인간의 원인이 된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데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결국 인조인간이나 진짜 인간이나 사람을 하나의 말로 보는 건 다르지 않았다. 이런 지옥같은 세상에서 주인공 조는 인조인간의 편에 붙어서 아버지를 죽이는지, 아님 인간의 편에 붙어서 그를 기업으로 다시 데려가는지가 영화 관람의 포인트이다.

 

 

에일리언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감독은 반복적으로 인간과 닮은 인조인간에 대해서 다르고 있다. 물론 세계화가 진행되어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들도 인종과 국가를 넘어 서로 네트워킹하고 있다. 옛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대로 세계정복을 꿈꾸는 과학자가 정보를 혼자 독점하여 비밀스럽게 로봇을 만들지 않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문제는 인간이 만든 로봇이 과연 인간답게 자신이 겪는 일들에 반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남성들에게 잘 팔리는 로봇 조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녀는 자신이 사온 여성의 신체에 자신의 홀로그램을 덧씌워 주인공에게 육체적 만족을 주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아마 나는 그때부터 그녀가 인간다운 면모를 지니게 되었을거라 추측한다. 그녀에게는 그 일이 도덕적인지는 나중 일이다.

 

 

예전 블레이드 러너 영화의 아름다운 감각이 그대로 살아나 있다. 영화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일본어와 한국어를 뒤섞은 광고판들과 다소 야하면서도 화려한 홀로그램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이전 영화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게 감상할 수 있다. 멜로물에서 강자인 라이언 고슬링의 터프한 강펀치도 구경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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