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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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섬

이 섬 주민이라곤
할머니 네 사람이 전부다.

목포며 여수로 떠난 이웃들이
한해 한번
미역 따러 들어왔다 나간다.

멀어져가는 배 꽁무니도 한점,
멀어져가는 섬 꼭지도 한점, 새까맣게

눈이다.

가슴에 못대가리만하게 박히는 저 뒤끝,
마저
수평선 넘어갔다.

미역국 마시는 바다,
질펀하게 번지는 해복이다.
얼마나 허하랴.

  

그러고보니 이건 들은 얘긴데, 보통 AV 찍는 여성들은 산전수전 다 겪고 리벤지라거나 하드코어라던가 코에 넣는 장면 등(...) 몸에 손상이 많은 장르와 체위까지 다 찍고 나면 쓸모없이 여겨진다고 한다.

 

 성매매나 매춘에 뛰어드는 여성들은 힘쓰는 일을 하기 힘든 몸을 지녔다거나 주방일을 못해서 그쪽으로 가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하고. 어쨌던간에 고물의 고물이란 소린데, 이렇게 매춘에도 AV에도 못 쓰고 남자들을 '서게' 하지 못하는 여자들은 보통 외딴 섬으로 보내버린다고 한다. 카더라 뉴스지만. 그러나 한국 남자들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페미니즘 사상을 애써 외면하며 한국식 페미니즘에 내 딸이 물들면 안된다고 악을 써대는 걸 보면 있을 법한 일인 것 같다. 즉 여자가 결혼적령기에 '팔려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먹기 좋게 취향에 맞게 말을 바꿔가는 세상에서 걸맞지 않는 참 야만스러운 말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부분으로는 진실에 가깝다.

 상냥함에는 여러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1. 평소 지켜보다가 행함.
 2. 지금 당장 행함.
 3. 상대방의 호의의 여부와 상관없이 행함.
 4. 필요한 걸 주어야 하니 반드시 다른 사람이, 사물이, 물질이 보는 세계가 어떤지 항상 궁금해있어야 함.
 5. 그러기 위해선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섞여 있어야 함.
 6. 자신이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어야 측은지심이 생김.
 7. 여태까지 보던 것과는 다르게 보되, 상대방의 슬픔이 절대 자신의 슬픔이라 생각하지 말며 상대방이 기쁘다 해서 자신에게 떡고물이 떨어질 거라 기대하지 말 것.
그게 바로 야사시사.

 상냥함이란 언어가 우리나라에선 굉장히 애매해서 가식적이라고만 해석하는데 절대 우리 야사시사를 그딴 걸로 보지 마라. 빙과 op 상냥함의 이유를 들어보라고.

 

 인생의 막장에 지금 막 들어선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한창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곤경도 단지 생활일 뿐이다. 곤경을 헤쳐나와 우뚝 선 필자는 단지 견뎌나가는 것밖에 없다고 거듭 이야기한다. 대구지하철사고에 대한 시를 쓸 때도 그는 안전불감증인 피해자들이나 사고가 일어날 빌미를 제공한 정부를 비난하기보다는 그 사건 현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을 담아낸다.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너다가 빨간 신호등을 만난 할머니의 조급한 속마음을 이야기 하기보다는 그녀를 도와주는 젊은 경찰의 시점에서 이야기 하기보다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듣거나 혹은 멀찍이서 바라보는 제3자의 관점을 고집한다. 그도 나름대로 힘든 일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은 정선에 대한 시 두 편밖에 없으며 매우 우회적이다. 시인은 상냥한 마음을 연마함으로서 시를 써 나갔고, 결국 인생을 바라보는 그 자신만의 비율을 제시하는데 성공한다. 아울러 그는 실천에 옮기기를 권하고 있다. 집 주변에 폐가에 들어가 사는 병든 사람이 있다면 방문해 보기를. 혹시 옛날에 버린 노모가 있다면 가끔씩은 그쪽을 돌아보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다면 울음과 함께 가슴 깊이 묻기를. 실행한 후엔 언제나 가슴이 떨리고 먹먹하고 허전하다. 그 느낌을 이 상냥한 시를 읽으며 식히는 것이다.

 

 다시 정선선

정선선은 터널이 많아 짧다. 짧으나 여러 굽이 깜깜한 정선선은 강원도 정선군 내 증산과 구절리를 토막토막 잇는다. 별어곡-선평-정선읍-나전-여량 등 중간역에서 많이 타고 많이 내린 사람들, 서로 때가 묻도록 잘 아는 얼굴들. 광부들 화전민들 장꾼들을, 그들의 부모와 처자식 실어날랐다. 골짝물 소리 끓어 이는 물안개 같은 애환, 편도 십리 안팎의 왁자지껄한 삶 실어날랐다. 소쩍새 소리처럼 메아리처럼 산에서 산, 가로막히는 데서 가로막히는 데까지, 막장에서 막장까지 실어날랐다.
한칸, 한칸, 앞이 없는 사람들 먼저 떠났다. 객차 한칸 짜리 비둘기호를 마지막으로, 기차는 이제 오지 않는다. 질긴 세월, 강철 암흑으로 엮어꿴 악산 한 두릅의 폐선, 정선선은 끝났다.

산중 종착지 구절리역. 이 일대 지층 깊이 쌓인 시꺼먼 혹한을 벗으며 가물가물 깔리는 새벽의 은하철도, 정선선은 터널이 많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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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팝스
KBS문화사업단 엮음 / KBS문화사업단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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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ould slip into the Blue House to aptly answer your question.

d

 

  

실명을 공개하면 하도 지우라고 닦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글이 통째로 날아가면 곤란하니 정확한 정보를 생략하겠다.

 

 댓글이나 메시지로 살짝 물어봐준다면 육하원칙으로 선명하게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어제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가 맛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어떤 곳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아이를 데려온 어떤 사람이 (아이는 계속 작가의 소설과는 관련없는 만화책을 읽고 있었고 그 분은 왠지 그걸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당당하게 첫 질문을 했다. 바로 지역의 난개발에 대해 한 소감 말해달라는 요구였다. 물론 지역에서는 중요한 상황이었지만, 행사의 취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물론 그 작가는 난개발을 반대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쁘게 보이면 안 될 테니까. 잠시동안 어색한 웃음이 흘렀고 나는 그 다음 질문자였다. 나는 작가에게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던지라 분위기와 상관없이 글쓰기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주제를 전환시켰다. 그러나 내 다음 질문자도 난개발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다음 질문자는 작가의 옆에 앉은 사람에게 질문했지만 역시 난개발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치 그 중 하나가 난개발에 찬성한다고 물으면 어떻게 난개발에 찬성할 수가 있냐고 바락바락 따질 기세였다. 그런 질문을 하는 자신이 무지 대단해보이나?

 우리나라만 그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헬조센 인간들이 질문(?)하는 데엔 몇 가지 원칙이 있는 듯하다.
 첫째, 꼭 한 문장으로 질문할 걸 두세문장으로 쓴다.
 둘째, 첫째 질문이 둘째셋째와 중첩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질문들은 미묘하게 다르다며 한꺼번에 여러가지 질문들을 한다.
 셋째, 두유노 기법을 쓴다. 두유노김치? 모른다고 하면 설명할 기세다. 아주 대단한 설명충이다. 뭐든 설명 가능한 스피드웨건 납셨다. 그래서 너의 질문은.
 넷째, 외국인일 경우 꼭 영어로 질문한다. 통역기가 있는데도, 너의 영어실력이 너무하고 발음이 몹시 불편한데도 그런다.

 공각기동대는 시리즈로 다 챙겨 봤지만 스칼렛 요한슨이 나온다는 그 공각기동대는 보지 않았다. 왜 하필 백인인지, 그 많은 배우 중 왜 하필 스칼렛 요한슨인지, 많은 의문들을 다 스킵해버리고 우리나라 기자가 물은 건 두유노탄핵? 이었다. 행사는 전반적으로 재밌었지만 앞으로 질문 타임이 있으면 슬쩍 나갈까 생각중이기도 하다. 이번 행사는 좁은 곳에서 적은 사람들로 진행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아니 그런데 나이 들수록 사람 인성이 좁쌀처럼 된다더니 생각해볼수록 열받는다. 사회자들은 진행을 시간에 맞춰 잘 했으나 질문 시간 때문에 행사 시간이 자꾸 연장되었다. 행사에 참석한 관객 중에선 급한 약속이 있는 사람도 있을테고 작가는 유명한 만큼 더욱 바쁜 사람일 것이다. 시간 낭비할 거면 그냥 저지르질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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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뭐꼬 - 마음에 새겨듣는 성철 큰스님의 말씀
퇴옹성철 지음, 원택 엮음 / 장경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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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주인이 되어라

목어가 승천하여 일월이 빛나리라
산은 문수의 손이요,
바다는 보현의 가슴이다
산에 햇볕 들어
초목이 춤을 춘다
사람마다 스스로 태양을 등에 지고
산으로 바다로 오고 가네
그 마음 머문 자리를
살피고 살피어라
대장부 살림살이
가난타고 원망 말라
천하는 바로
그대의 것이니라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자랑스런 목숨 아닌가
어서 서둘러
네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라
그대 밝은 마음
바로 부처일세

  

아마도 성철스님의 책 중 가장 유명한 책이 아닐까 싶다. 법어집 책 11권을 큰 글씨로 읽기 쉽게 간추려서 편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교책치고는 디자인도 꽤 좋은 편인지라 아직도 성철 스님에 대해 알기 위해 책을 사가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자기를 바로 보라는 내용이라거나 영원한 자유라던가 화두공부 하는 법에 대한 책은 보았지만, 다른 글들은 책을 구하기 어렵거나 이해하기가 힘들었는데 이뭐꼬를 보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원래부터 설법이 굉장히 간단명료 하신데다 또 한 번 더 쉽게 편집을 해 놓아서 책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닭이 나무 위에 올라가고 오리가 물 속으로 들어가는 논리도 아마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논리를 설파하셨음이 틀림없다. 그는 살인자도 부모처럼 공경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문맥상으로도 맞다. 다만 이 구절을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는 당부는, 실생활에서는 흑백선악의 시비를 가리느라 잘 지켜지지도 않을테니 항상 그 구절을 모른다 생각하며 간절히 읽고 또 읽으며 진리를 구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성철 스님이 주장하는 앎병과도 연관이 된다. 성철 스님은 아는 것이 병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게 병이라고 주장하셨다.

 여느 스님들의 글과 같이 시와 같은 느낌이 배어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가르침은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국가를 지키고 불교 내의 특정 흐름을 지키려는 한국 스님들의 글과는 달리 성철 스님은 세계 국가가 모두 한 형제이며 그 안의 중생이 모두 이미 보살이 될 자질이 있다는 주장에서 니체와 거의 닮아 있다. (처음에는 그를 베낀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지금 이 책을 읽어보니 그냥 모든 진리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마치 전설적인 맛집끼리는 맛이 거의 비슷하듯이.) 그는 불교로 인해 이 모든 진리를 깨우쳤다 주장하지만, 정작 불교를 믿는 인간들은 성철 스님의 이론에 도달하려 노력하는 중이고 아직도 그 스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믿는 인간의 역량에 따라 상당히 그 교리가 달라지는 유래없는 종교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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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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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벗은 새끼가 잘못이지 우리가 잘못이야? 변태 새끼 잡을 생각은 안 하고 우리한테 반성을 하래. 뭘 반성하라는 거야, 도대체! 내가 벗었어?"

  

몰카에 대해서 소설에 나오는데, 실상 내가 최근 좀 더 눈에 띄는 건 자신이 나오는지 알고 싶으니 몰카 사이트 알려달라고 피해자에게 대놓고 댓글을 다는 일부 몰지각한 여성들 뿐이었다. 이제 이런 거에 대해선 내 이야기 더 이상 하지 않으련다. 82년생 김지영이 이야기하라고 편해진다고 부추기는지 어쩌는지는 몰라도 더이상 이야기해봤자 소문나서 괴로워질 뿐이고 날 알고 난 후의 인간들에 대해 배신감만 느껴질 뿐이고 그렇다. 가해자들은 지네들이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지도 않을텐데 뭐. 되려 자기네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려나. 블로그를 자세히 본 사람들은 뭐 벌써 나에 대해 알 것이다. 내가 성추행 당한 일들이 궁금하다면 블로그 초반 글들을 보라.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는 건 나름 김지영으로선 최선을 다했다는 소리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본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 해도 출산은 아시아계 여성들에게는 아직 죽음의 고비이다. 오히려 자연분만하고 직장을 다시 나가려다가 애들 망가지게 하고 애를 키워야 할 어머니 자신도 몸을 다치게 하는 일이 더 한심하다 할 수 있다.

 

 육아의 스타일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애를 키우려면 남자와 여자가 둘 다 힘써야 하는데, EBS 육아 프로그램이 자꾸 '어머니가 ~해야 한다'라는 말투를 써서 최근 논란이 된 적도 있다. 그 해야 한다는 일도 사실 엄청나게 많아서, 이걸 해야할지 저걸 해야할지, 그것도 안 하면 우리 애가 뒤처질지 몰라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관계 안 할 것도 아니고 피임이 100% 되는 것도 아닌데 육아는 선택의 문제라고 함부로 말하진 말자. 사실 자본주의 시스템과 엉켜서 이렇게 된 건데, 그렇다고 공산주의로 가서 공동육아를 해도 사람이 욕심이라는 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건 사실이다. 부모들 선택의 과잉에 관한 책들은 많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검색해도 금방 찾을 수 있다.

 김지영이 친정어머니로 빙의해서 한 말은 옳지만, 아까 전에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주말엔 더 바쁘실 듯하다. 김지영이 자신의 어머니 흉내를 내면서 정대현에게 했던 말대로, 제사준비 다 하고 점심상 차렸으면 바로 발을 떼서 김지영의 처가로 가는 게 베스트이지 않았을까. 또 사과와 배를 애써 다 깎았는데 배부르다며 거의 손대지 않는 건 뭐다냐 ㅋㅋㅋ 가뜩이나 김지영에게는 남의 집인데 이러니 정을 붙일 수나 있을까? 차라리 명절날은 아무데도 안 가는 게 최고인듯.
 사족을 붙이자면 여성은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친정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김지영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면 보통의 경우 꾸중하겠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기 싫지만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왕왕 그런 요소들이 보이는데, 그래도 사람을 탓하지 말고 시스템을 탓하자는 게 주요 내용인가 보다. 예를 들어 아들과 손자밖에 생각 안 하는 김지영 할머니를 보자. 계집질이나 노름 안 해도 백수인데 과연 좋은 남편감일까? 아들이 넷 있어도 그녀를 돌보는 아들은 단 한 명뿐인데 나머지 셋을 그럼 뭐하러 힘들게 낳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정신병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그녀는 손녀에게 화풀이를 하고 애써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이 당한 만큼 남에게 갚아주려하는 못된 심보를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가정에서 평등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책망은 할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은 매끄럽다. 크게 상중하로 구성된 이 소설은 김지영의 빙의 증상, 그렇게 마음이 약해진 계기, 그리고 의사 소견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구성하는 건 소설의 특성이다. 소설을 처음보는 사람들이 어려워할 법한 이 구도는 사실 난이도가 있는 소설에서 쓰는 흔한 기법이다. 이 소설에 최대한 문학적인 기법을 부여하려는 조남주 작가의 노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주석이 짧은 것도 또한 최대한 르포의 느낌을 줄이려 했던 것이라 생각하는데, 차라리 빼면 좋았을걸 싶다. 그러나 소설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 하여 이 소설이 가치가 없는 건 아닌 듯 싶다. 일단 지적한 사람이 있어서 글을 써본다.

 김지영은 확실히 보통 중산층 여성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들어본 현실 여성의 삶이 김지영보다 빡셌으면 빡셌지 덜 빡세지는 않았음을 볼 때, 그리고 그들이 지금도 아무 것도 밝히지 않은 채 숨어살거나 혹은 밝히고 나서 치욕받는 걸 볼 때, 언제나 현실은 픽션을 능가하는 걸 본다. 아마 이것도 82년생 김지영의 의도일 것이다. 김지영이 여성들의 모든 고통을 혼자서 겪으니 불쌍하다는 충격적인 감상을 들었는데, 사실 일반적인 여성들은 이거 다 겪고 자란다. 네 어머니, 네 친구, 네 직장동료, 네 애인, 심지어 니가 길을 갈 때 스쳐지나가는 여성들 모두 김지영과 같거나 보다 더한 시련을 겪고 자랐다. 아직도 그걸 믿지 않거나 외면하는 남성들이 있다니 통탄스럽다. 과거에 비해서 여권은 조금도 신장되지 않았다. 만일 신장되었다면 72짱 혹은 치리짱, 아헤가오 더블피스, 배박이 말박이, 배빵같은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왜 처벌받지 않는가. 여혐과 관련된 욕설도 관심있게 찾아봐야 여성이 이 정도로 차별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나는 두발자유화 이전에 교복부터 어떻게 해줬음 하는데 청소년운동권들은 전자를 더 주장하는가 보다. 누구씨 말로는 중학교 때 교복 안 입는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예외도 있나봄. 근데 여고도 이거랑 만만치 않게 하드했고 심지어 리본을 머리에 매달고 다니다 뺏겨서 항의하다 뺨맞은 여학생도 봤었다. 이쁘게 하고 다녀도 지랄 편하게 하고 다녀도 지랄. 내 발이 지금 군살박히고 발가락이 다 휜 게 중고등학교 때 구두신고 다녀서이다. 일부가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학교에 교복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봄. 평상복으로 계급차이가 난다고 주장하기엔 지금 시대가 너무 많이 변해서 모두들 괜찮은 옷 입고 다니고, 게다가 교복의 폐해가 너무 많다.

 한남들은 다 결혼해서 살면 암덩어리로 변한다는 말이 극히 일부는 개소리이듯이 세상에 좋은 남자가 더 많다는 말도 개소리다. 사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특히 여자는) 배우자가 있거나 애인이 있을테고 그러니 자신에게 억지로 그 말을 세뇌시키듯 되뇌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꼭 입밖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야 했니. 그 말을 듣는 사람 인생이 어찌될 줄 알고. 또 한남과 같이 사는 지 인생은 앞날에 어찌될 줄 알고. 세상에 좋은 남자는 없다. 단지 자신의 기준에 따라 좋은 남자와 나쁜 남자가 나뉠 뿐이지.

 확실히 김지영 씨의 증상은 정신분열증이나 귀신들렸다고 하기는 좀 뭐하고, 다른 여성들에게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는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그 상태를 마치 동화책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희화화하다보니 시부모에게 친정부모를 소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성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희화화하기엔 그 상황이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고, 동시에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코드가 그 해프닝엔 없었다. 1984의 더블씽크나 이갈리아의 딸들의 미러링이 훨씬 더 강력한 건 사실이다. 또한 세계에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에 대해 호소하려면 채식주의자처럼 세계에 이슈가 된 우리나라 문화를 공략하던가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김지영이 무당이 되어 활약하는 이야기도 아니잖는가.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82년생 김지영이 모든 일반 여성들의 마음을 다 안다고 하기엔 불가능하다. 난 사람들에게도 그릇의 크기가 각기 다르다고 믿고, 다들 춥기는 하지만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한도는 모두 다르다고 믿는다. 정상의 범주를 넘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가상하지만, 사람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없다. 특히 여성은 편차가 크다고 생각한다. 마치 빈곤 국가에서 불평등이 더 심화되는 것처럼.

 이틀 전에 독서모임하면서 그랬었다.
"위안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게 아닙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저지르는 위안부도 있습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단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니가 힘들다고 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덜 겪었어도 안 힘들게 산 마냥 이야기하지 말자는 거다. 근데 리뷰를 보면 자신의 경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문제는 '나는 이보다 더 힘들었다'라는 태도다. 심지어 남자들도 자신이 김지영보다 더 힘들게 살았었다는 부류들이 있곤 하다. 일단 여성차별은 우리나라 사회에서 너무 일상적인지라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그걸 개선한다면 김지영은 물론 당신과 다른 사람들의 힘듦도 해결된다. 여성이 남성을 성추행하는 문제를 용인하자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마음이 비뚤어진 여성이 생겨나는 일을 방지하거나 자연스레 가해자치료를 받게 해주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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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처럼 온다 - 사랑을 잊은 그대에게 보내는 시와 그림과 사진들
신현림 엮음 / 북클라우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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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중에서

신용목

내 무덤은 향기로울 것이다
먼 나라의 춤을 푸는 나비처럼은 아니지만,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높이에 나는
내 영혼을 띄워둘 것이다

저 둥긂을 안고 기다리면 아프지 않게 늙을 수 있겠다
수치를 꽃대처럼 비우고 나면
거친 그리움도 이제는 자연사할 수 있겠다, 있겠다

테두리 중에서

박형준

물건을 사러 잠시 집 밖으로 나왔다가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안고 있던 여인의 테두리를 훔쳐 보는 것
걸음을 멈추고 흔적을 훔쳐볼 듯 바라볼 때
여인의 숨내도 함께 흩어져간다

오늘과 같은 밤에는
황금빛 줄무늬를 가진
내 짐승들이
고독을 앓겠지

 

  

 제일 아쉬운 건 닉스 워터맨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는 점이다.

 

 편집상의 실수라고 생각했는데 구글에 검색해도 상세한 정보는 드러나지 않으며, 시도 모든 걸 알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 것을 이라는 것 하나밖에 공개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글귀거나, 익명으로 올렸던 시이거나, 혹은 우리나라에서는 시 하나 외에 유명하지 않은 시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딱히 연인간의 사랑만이 아닌 시들도 제법 있지만 연시가 대다수인 건 사실이다. 

 

 밖에서 들고 읽기 힘든 핑크색의 표지가 먼저 주제를 극명하게 나타내주지만. 신현림 시인의 스타일에 맞는 시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의외로 애너벨 리라던가 금붕어를 죽인 후 사랑하는 여자의 손에 금붕어가 되어가는 내용의 시라던가 하는 공포스러운 시들도 많았다. 제법 그림을 잘 선정해놓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고전 명화라서 흔히 이런 시집에서 걸어놓는 현대의 어려운 초현실주의 사진을 봐야 한다는 두려움은 훨씬 덜했다. 간단하게 시인의 소개는 물론 올려놓은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소개까지 적어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연애시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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