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 어이없고 황당하고 늘 후회하면서도 또 떠나고야 마는
한수희 지음 / 인디고(글담)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나이티드항공 여승무원들은 대개 체구가 큰 아주머니들이었다. 칙칙한 남색 유니폼을 입고 기내를 휘젓고 다니며 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엄한 표정으로 승객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그녀들은 마치 그 옛날 버스 차장이나 학생주임 선생님 같아 보였다. 사실 나는 언제나 이런 여자들을 동경해왔다.
내게 일하는 여자를 떠올릴 때의 이미지란 잘 빠진 슈트에 하이힐을 신고 당당하게 도심을 활보하는 소위 '커리어 우먼'들이 아니라, 구식 유니폼에 투박한 구두를 신고 전차의 차장으로 일하는(꼭 전차의 차장일 필요는 없지만) 여성 노동자들이다.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는 호락호락 넘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과 튼튼한 턱, 듬직한 체구, 절도 있는 동작, 위엄 있는 말투, 어떤 일을 하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이 좋다. 특히 남자들이 할 것 같은 일이나 고된 노동을 하는 나이 든 여자들을 흠모한다. 그래서 여자 버스 운전기사를 만날 때마다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독서모임을 두 탕 뛰다 보니 요즘 여러 책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듯하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내 근황을 읽는 책으로 알게 되는 정도니... 그러나 최근 그 짓도 관뒀다.

 

여행 에세이에서 한계가 온 것이다. 나는 매운 음식도 좋아하지 않으며, 명상은 더더욱 피하고,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일은 납치되지 않은 이상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개가 여행 에세이에 동시에 나오는 진풍경을 보면서, 근미래에 사람들이 이 책을 찬양하면서 해외여행 이야기를 할 몰골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 모임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홧김에 독서모임을 둘 다 때려쳤다. 독서모임을 관두면 사실 이 고장에서의 내 지위가 불안하다. 그래서 아예 직장도 때려쳤다.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돈을 생계로 몽땅 탕진하고 몇 년 후에는 새 직장에 취직할 것이다. 가급적이면 다른 지방으로 떠났음 좋겠다. 어차피 개발때문에 여긴 이제 시골도 아니며 모두 다 꼴 보기 싫어졌다. (내가 이렇게 성격이 개같다.) 백수 기간엔 집에 틀어박혀서 실컷 책을 읽을 것이다. 이 저자가 엄청나게 싫어하는 장 보드리야르나 김연수의 책들을 읽으며 말이다. 그러고보니 사르트르의 말을 천천히 읽는 중인데 그는 결코 고뇌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부럽다.) 여행이란 존재의 불편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사르트르를 읽는 것도 여행의 한 방식이라고 본다. 사르트르의 문장은 사람을 꽤나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니까 말이다. 왜 이 사람이 장 보드리야르의 어려운 책을 여행할 때 가져가면 안 되는지도 지적해야 할 사항인 듯 하다. 그녀는 여행을 하면서 그걸 업으로 삼다보니 그런 기분이 불편한 책조차 싫어지는 것이다. 결국 여행에 어울리는 책은 간편한 에세이일 테고 정치에 대한 글이나 사회에 대해 심층으로 다룬 글은 도태되리라. 어려운 책을 읽는 것 또한 여행이다. 트렌드코리아 2018을 읽느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에 자본론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태국으로 같이 여행갈 사람을 모은다 하면 모여드는 사람이 꽤 있을 테지만, 내가 자본론을 읽고 있고 같이 읽을 사람들을 모아 독서모임을 꾸린다 하면 백퍼 그 자리엔 나 한 명만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운치있어 좋지만. 아무튼 이번 해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미 갔던 해외여행 또 갈 생각말고 독서여행을 해보는 게 어떨까. 나같이 한 번도 해외여행 안 가본 사람이나 한 번 가보게 예정된 비용을 부어주시고 말이다. 데헷.

또한 영어는 손짓발짓으로 보충해야 하는 필요가 없다면 외국인과 대화가 필요할 때 굳이 이상한 단어 섞지 말길 바란다. 외국인 입장에선 정말 귀찮고 혼란해지기만 하는 일이다. 저자의 반성은 좋지만 여기서부터 난 이 책 별로였다.

 

 


페미니즘에 관해 충분히 이야기할 만한 글이었다. 암시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볍게 넘어가다 못해 한비야의 글만도 못한 걸 보면 여행에만 초점을 두려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내가 첩이라든가 이런 걸 용납하지 못하니 가족들하고 연이 끊긴 거 같긴 한데, 끊으라지. 아니 우리나라는 사실 일부다처제였다라고 미리 광고라도 해줘야 충격을 안 먹을 거 아냐. 애 없음? 입양해. 관계가 잘 안 됨? 걍 그러고 살으세요 ㅇㅇ 왜 첩을 두는지 노이해. 이 여행에세이에 또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있다. '여행하는 여성들 아무에게나 찔러 보자는 건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남자가 꼬인다'라는 자기비하 투의 이야기를 농담으로 한다는 것이다. 농담으로 보이냐? 당신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겠지만 딱히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여성은 굉장히 길을 나서는 데 지장이 많다. 나도 지금 당장 밖에 나가기만 해도 시선을 이상한 곳으로 던지거나 추근대는 남자가 네다섯은 꼬인다. 내 얼굴이 문제가 아니다. 애 딸린 아줌마, 할머니 이런 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냥 여성이면 위험한 것이다. 페미니즘 사상과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글은 항상 이렇게 위험하다.
해외를 가본 적은 없지만 전남친이 김포 근처에 살아서 출근하는 승무원들이나 혹은 승무원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본 적은 있다. 해외여행 갔다와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외국 승무원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더 예쁘고 세련되어 보인다. 그러면 뭐하나. 취직하면 유부남들에게 세컨드용으로 다루어지니 불쌍하고, 취직하지 못하면 그렇게 예쁜 얼굴에 똑똑한 사람들이 간절히 그 직업을 원하는데도 떨어지니 불쌍하고. 정말이지 나를 포함한 이 시대 청년들은 너무 가혹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사는 곳(관광지)에서 한정식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일련의 아줌마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세계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리조트와 쇼핑과 술에 관한 이야기로 이들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구석에 앉은 아저씨는 바로 옆에 앉아서 째려보고 있는 나를 흘깃거리며 어떻게든 그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확실히 깨끗한 리조트와 쾌적한 쇼핑은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극기형이다. 게다가 돈이 정말 소중하다. 어쩌면 정말로 이 주름살 득시글한 30대에 정말로 도쿄 비즈니스호텔에서 스트립쇼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동남아에서 땀을 흘려가며 국수를 먹고 냄새나는 방에서 머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리조트와 쇼핑을 동경하지만, 그럴 깜냥도 용기도 없어서 평생 그쪽은 기웃거리지 않은 채, 이쪽이 참된 여행이라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 꼴 보면서 이 꼴 나느니 차라리 난 아무 해외여행도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으며 해외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내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족들 모두 세계여행 가자 할 때
이 책을 읽던 나는
셋이서 가라고 나는 집에서 개를 돌보겠다
호텔에 냅두면 얘를 누가 잡아먹을지도
라고 하니 어머니가 날 이상한 눈초리로 보셨다


 

그나저나 궁금한 점이 있다. 해외 여행 갈 때 복대 필요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기사 세상이 점점 발전해가니.. 아니 그치만 전쟁지역이나 슬럼가도 분명히 있을텐데? 이것에 대해 좀 아시는 욜로 분들의 댓글 부탁드립니다.

 

한국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보았다. 바람을 피우는 남녀의 배우자들이 동병상련의 괴로움을 나누다 서로에게 끌리는 내용의 영화였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랜 후에 남자는 홀로 앙코르와트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세월에 풍화된 돌덩이에 손을 가져다댄다. (...) 살아 있는 사람들은 무희의 얼굴을 한 채로 시장에서 앙코르와트의 모형을 팔고 노점 앞에 앉아 탁탁 병아리의 머리를 깨어 먹고 어린 동생을 옆구리에 낀 채로 조잡한 물건을 팔러 다니거나 앙코르와트를 제집 삼아 논다. 가끔은 얼빠진 관광객의 가슴을 만지기도 한다.


앙코르와트는 내가 드물게 가고 싶은 해외 지역 중 하나에 속한다.


돌아다니기는 좀 피곤하고 앙코르와트 위에 올라가서 책을 읽거나 하늘을 보거나 자거나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친구 M과 나는 많은 곳을 함께 여행했다. 정선을, 영주를, 속초를, 태국을, 라오스를, 도쿄를, 교토를 수차례 같이 여행했다. 그 애와 나는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다.


내가 사는 곳을 절친과 여행했다고 누군가 말할 때의 그 오묘함. 사실 날씨만큼은 외국같은 곳이긴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님포매니악: 볼륨2 - 무삭제 극장판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샬롯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1. 반전이 너무 뻔해서 참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어려운데...
 무성애자를 차별하는 영화같음 ㅋ 그런데 레알 난 무성애자를 본 적이 없어서. 아무튼 이야기를 듣는 그 뚱뚱한 동정 시키는 백만분의 일인 그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색정광인 그 여자조차도 깜빡 속을 뻔.
 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아저씨가 점점 횡설수설하고 재미없는 비유를 하고 눈을 피하고 무엇보다 야한 책으로 데카메론을 비유하며 '난 동정인데 섹스에 관심이 없다'는 희안한 거짓말을 할 때. 그는 결국 발기한 것이다.

 2. 주인공 조는 결국 애도 낳고 오르가즘과는 더더욱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어 급기야는 SM을 즐기게 되는데... 이 스토리도 뻔함. 그러나 키스도 안 하고 삽입도 안 하는 남성 돔에게 질려서 결국 관계가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게다가 집단상담을 해도 자신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려면 손발잘린 히키코모리가 되야할 것 같아(그걸로도 해결될지 의문;;;) 상담소를 나와버린다.
 이 때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강한 반감을 느끼고 자신은 자신이라는 걸 격렬히 주장한 이유를 제대로 알았어야 했다.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제롬이 성에 대해선 다른 남자를 구해보라고 시켰기 때문에 SM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자마자 옳다쿠나 하고 질투에 빠진 남자 연기를 하기도 하고 애를 사랑하는 척하면서 조를 힐난하고, 결국 위탁가정에 맡겨버리는 제롬도 정상적인 놈일까? 십중팔구 조를 버리고 나서도 '내 인생이 망가진 건 그 여자 탓이야' 이러고 있었겠지.
 또한 그 자신만의 사채직을 구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은 남성인데, 그녀가 늙었으니 다른 젊은 여자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날고기는 조도 사채업자로서 오래 일해 온 그의 기막힌 설득에 걸려드는데, 사실 자신의 일인데 후계자를 구하라느니 내가 벌써 점찍었다느니 알랑거리는 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고보면 조는 의외로 소극적이고 곰같은 성격이라, 교활한 자들의 언변에 쉽게 넘어가는 허당 느낌이라 해야 하나. 결국엔 여우같은 여자애한테 자신의 자리를 뺏겨버린다. 여자색정광은 다 구미호같을 것이란 막연한 선입견이 벗겨지는 순간.

 3. 사실 난 치사한 걸 싫어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인간을 혐오하다시피 하는데, 1탄에서 미세스 H에 의해 막연하게 드러났던 '그들'이 이젠 대놓고 드러나 조에게 폭력을 가하고 압박한다. 외눈박이 물고기만 있는 세계에선 양눈이 멀쩡히 달린 물고기를 왕으로 세우기도 하지만, 왕따를 시키거나 죽이기도 한다. <황금가지>라는 책에서 그런 희생양 이야기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만약 그녀를 구해준 그 남자가 정말 꿍꿍이 없는 남자였다면 그 책을 그녀에게 소개시켜주었을 것이다. 침대에서 병이 나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읽기엔 정말 완벽한 책인데.
 뭐 그 이야기도 진실이 가려지거나 허상이 더해져서 학계에서 비난의 화살을 맞고 세월 속에 묻혀진 신화에 불과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D 블루레이]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 Fisheye Oring 한정판 콤보팩 (2disc: 3D+2D)
매트 리브스 감독, 게리 올드만 외 출연, 앤디 서키스 목소리 / 20세기폭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1. 다 필요없고 시저 완전 멋있어졌음 하악하악.
 인간이었음 내가 보쌈해 갔을지도 모름 하악하악.
 근데 그렇게 되면 수간이려나...
 흑흑 침착한 성격에 지성으로만 따지면 정말 내 이상형인데 말이죠. 내가 남친이 없었다면 위험했을지도. (응?)

 2. 일단 인간멸종이 코앞에 다가온 설정.
 1편에서 치매를 치료하는 약을 개발해서 유인원에게 주사했는데 유인원 중 하나인 시저가 무리와 도망쳐서 숲으로 가고, 과학자들은 주사기에 잘못 찔려 바이러스에 걸린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가 단순한 감기 증상으로 시작되서 사람들이 초기에 대처를 못했고, 공기 중에 번지기 때문에 매우 빠르게 전 지구로 확산되었다는 거.
 게다가 원자력발전소로 대부분 전기를 공급했기 때문에 연구소 인력이 모잘라 발전소가 중지되고 나니 불빛도 없어지고, 사람들은 동요하고, 거의 모든 국가에 계엄령 선포가 떨어지고...
 그래도 인간들 지긋지긋하게 살아서 전기를 얻으려고 난리 치는 걸 보면 미사카 미코토의 도입이 시급합니... 가 아니라.
 아무튼 면역이 있는 사람들끼리 샌프란시스코 도시를 새로이 건설했다는 덧.

 3. 그런데 시저의 말 중 유인원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은 영 거북하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볼 때 시저가 부하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탓이긴 하지만, 결국 부하가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게 된 원인은 인간이지 않은가. 그리고 유인원을 그렇게 우습게 본 것도 잘못이고.
 
 4. 아니, 사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건 이 장면이다. 부하가 최후에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자비를 호소하자 시저가 '너는 유인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손에 피를 직접 묻히진 않았어도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동족을 죽인 자. 그들의 몸뚱이가 인간인가 유인원인가 다른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인간 중에서도 인간답지 않은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종족을 초월하여 서로를 신뢰하는 자들을 보여주며, 이 영화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불을 밝히는 절대적 진리가 있음을 명백히 한다. 굳은 신념과 의지가 들어있다고 해야 할까.

 5. 엔딩크래딧 기다렸는데 왜 안 나옴 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님포매니악: 볼륨1 - 무삭제 극장판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샬롯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1. 영화 시작이 너무 일찍되서 앞부분 살짝 짤려서 봤다. 대략 낚시랑 책읽기에만 심취했던 남자가 섹스중독증에 걸려 피폐해진 여자를 간호해주고, 그 여자가 자신의 인생 얘기를 해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2. 그 여자는 자신이 나쁜 년이라 하는데 글쎄, 내 생각엔 그닥 나쁜 년은 아닌 듯하다. 뭐 다른 사람들이야 친구 B를 잘못 만났다는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남자들을 잘못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사람들은 조가 아니니까. Anyone can beat Joe, but anyone cannot be Joe의 느낌이랄까. 철저히 이성을 사냥감이나 콜렉션으로 생각하는 그 여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되기 때문에 그런 건 단지 관객의 상상에서 진행되는 또 다른 이야기일 뿐. 이건 내 시점에서의 이야기일 뿐인데 다른 손님이 올거라 했는데도 굳이 여자 조의 집 안에 틀어박혀있고 급기야 집을 나가는 유부남 H. 그리고 애 셋 데리고 와서 손님이 왔을때도 안주인마냥 이것저것 남의 물건을 다루면서 비꼬는 H의 부인이 더 정신병원에 가야 할 인물들로 여겨졌다. 하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게 어디 한두번이겠는가. 그러나 가족을 만들고 그에 종속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너무 오래 사귀게 되도 약간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긴 하다.

 3. 그런 의미에선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색정광이라고 불리우는 그녀 역시 제롬이라는 사랑의 마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녀가 제롬과의 사랑이야기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진술할 때, 제롬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섹스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녀가 거부했을 때, 제롬을 만나게 된 과정을 동화 속 이야기처럼 꾸며놨을 때 그녀는 반쯤 미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해 헌신하는 부드러운 남자(에피타이저)와 야수처럼 그녀를 다루며 짜릿한 쾌감을 던져주는 남자(디저트)를 너무 즐겼던 나머지 결국 그녀는 오르가즘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샘솟듯이 나오던 애액도, 항상 '날 느끼게 해준 건 니가 처음이야'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여유도 모조리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각과는 역으로 작용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정확히 피보니치의 숫자만큼의 삽입을 겪고나서 문의 자물쇠가 풀려 민감한 자동문처럼 되었으니, 그 반대로 자물쇠를 채울 수도 있겠지.) 그리고 둘째, 먹고싶은 아주 비싸고 맛있는 요리를 최고의 실력을 지닌 요리사가 만들어줘서 배가 터지도록 먹을 기회를 얻었는데 이유없이 혀가 무감각해지는 그런 난처한 상황. 기타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보통은 섹스로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그것을 되찾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불사하게 마련이다. 대게는 SM이라거나 심하면 단순히 가학적인 것을 어떤 식으로든지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진입하게 되는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가 된다.

 4. 해수욕을 하고나서 찜질방을 가고 그 다음에 이 영화를 봤더니 머리가 아프다. 왜일까...

 5. 일단 나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중독은 그닥 즐기지 않는다. 조하고 반대로, 나는 중독되는 경우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중독은 파괴이다. 물론 조가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했으며 지속적인 만남을 회피한 듯하니, 중독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섹스한 남자들은 모두 다르면서도 같으다. 그러니 난 하나만을 갈구했던 거다.'라고 얘기하는 장면을 유심히 생각해봤다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문어발을 걸치고 다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관념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남성과의 섹스를 열렬하게 추구하는 여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만일 사랑을 느끼고, 이상형이 모두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된다면, 그녀와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영화에서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소설 첫부분이 정말 뜬금없이 등장하는데, 그 소설의 제목은 '어셔 가의 "몰락"'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김경묵 감독, 공명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1. 편의점에 대한 괴담과 일화는 끊임없이 생긴다.
 일단 난 별의별 군데에서 다 알바해봤지만 신기하게도 편의점에서 한번도 알바한 적은 없다.
 그냥 내가 편의점에서 본 풍경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전남친이 편의점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여성 쪽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와서 사는 게 아니었고 점장으로 일하는 과부였지만, 손님이 추근거린다는 내용은 대략 비슷했던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괜히 괴롭혀서 주목받고 싶어하는 남성의 마음은 어릴 때나 나이들 때나 다를바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단순히 기분 나빠서도 아닌,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로 남자는 여자에게 깔끔하게 차인다. 그리고 남자는 악취를 풍기며 편의점에 소주를 킵해두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다. 뭐 여자에게 차인 것 말고도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겠지만, 사람이 망가지는 계기들은 의외로 매우 일상적이다. 또한 순간적이기도 하다.

 



 2. 남자들끼리의 커플이 나오지만 그닥 중요하진 않다. 오히려 유약해지는 남성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다. 동성애하는 사람들도 사람이라 간혹 바람도 피고 귀여운 이성이 나타나면 곁눈질도 하고 그런다... 그런 사람들 가지고 양성애자 혹은 바이라고 부르는 거고. ㅎ.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3. 알바들 유형도 가지가지이고 손님들 유형도 가지가지이다. '저 사람도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며 왠만하면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야하고, 모욕을 주더라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최근 멱살을 잡거나 당사자가 협박으로 여기는 문자만 받아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모든 게 소송싸움으로 통하는 세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