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호르헤 셈프룬 지음, 윤석헌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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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다는, 다르다는 것에서 나오는 오만함은, 우리를 우습게 만들기도 한다, 종종.
 


 


 

누가 나같은 인간이 좋아할 거라며 강력 추천한 책인데 초반부터 팬티 이야기가 나온다(남성인 화자 꺼지만). 학교 기숙사 같은 곳에서 수녀가 짐 검사를 한다고 학생들을 나란히 세워 놓고는 눈앞에서 화자의 팬티를 들어올리는 것이다. 아무튼 이걸 추천한 친구는 나를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화자가 공산당이기도 하고.



그러나 차별이 군데군데 스며든 내용에는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겠다. 동성애자 코스프레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여 저렇게 은근히 능구렁이처럼 동성애자를 성추행 가해자에 빗대어 표현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정말로 성추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회개를 했다가 동성애자로 취향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나. 본인도 스페인 사람이라고 인종차별당했던 사실은 비판하면서 여자나 소수자들은 마구 차별하네 ㅋㅋㅋ 이분도 프리모 레비 류의 꼰대인가. 내가 좋아하는 시절의 철학자의 이름이라던가 유명한 프랑스 유적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와서 좋지만, 이 정도면 그 시대 거의 모든 남자들이 일상적으로 여성을 우습게 봤다 해도 좋을 것 같다. (뭐 굳이 이런 글 읽다가 왜 페미니즘과 관련된 비판을 어거지로 찾아낼 이유가 있느냐 긍정적으로 읽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는데. 내가 왜 긍정적이어야 하지? 여자를 공격하듯이 몰아세우는 게 그저 이 시대 작가들이 공통이라는 소리다. 비판 비평을 하는 듯이 보인다면 그저 그 자신이 찔려서 그러는 게 아닐까? 분명 자기보다 센 사람에겐 알아서 설설 기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겐 노오력 부족이고 능력 부족이라 공격하며 그걸 합리화시키며 실컷 즐기는 중증일 것이다. 심지어 2017년 한국에서 내가 독서모임 중에 '프리모 레비가 은근 여성차별 하는 거 같지 않아요?'라고 이야기 할 때, 자칭 남성 페미니스트 회원까지 마치 워마드 메갈 보듯 날 쳐다봤으니까. 그놈의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소리도 질렸다. 여태 세상을 긍정적으로 봤으니 내가 살아있지 ㅋㅋㅋ 알지도 못하면서 남 비난하는 건 한국 인간들 따라잡을 생명체가 없다.) 인격적인 모독을 안하고자 조롱을 가급적이면 멀리하고 있는데 한 마디만 하자면, 내 입장에서 댁들이 얼마나 우스운 인간인지 하는 생각이 들고 유치하단 생각이 들고. 그나저나 동성애자는 니네들이랑 같이 수용소에 잡혀 들어간 사람들 아닌가? 같이 감금되어 사는 신세면서 내부차별 쩌네용.

미안하지만 호르헤 셈프룬 씨한테 또 지적질? 질문?을 할 게 있다. 이 분은 계속 속옷타령을 하다가 말미엔 자신의 여성관계에 관해서 회상한다. 매춘에 대한 입장과 첫 경험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은 확고히 부르주아의 세계 내부에서 어두운 부분에 자리한 매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반적으로 이 사람은 관대한 편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는 공산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지 않은 편인데, 이 책으로 봐서는 여성에 관한 그의 편견이 문제인 듯하다. (그렇지만 본인은 공산당에서 한 발 뺀 걸 퍽 자랑스러워하는 듯해서 뭐 어드바이스 해줘도 소용 없을 듯하다.) 사실 여성이 책을 읽고 배울 사회적 여력이 그닥 없었던 게 문제다. 그런데 어째서 책 구절 하나 암송하는 여성을 만나보지 못한 게 여성들의 문제인가. 지적인 여성이 혹 작가가 맘에 안 들면 책 구절 암송을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가 항상 말하듯이, 스스로가 여성의 팬티라던가 가슴이라던가 엉덩이에 너무 집착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내가 공산당은 잘 모르겠지만, 사회주의는 프톨레타리아의 혁명을 주장한 이론 아닌가? 여성도 프톨레타리아만큼이나 차별받았을 텐데, 왜 여성들에겐 이리 비판적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남성들의 매춘 거리는 가봤지만 들어가보진 않았다 이런 드립 너무 진부해보인다. 뭐 그래도 악의 꽃 시구절을 늘어놓아서 반박불가의 아름다움을 제시한 점에선 고단수랄까. 랭보 시구절 해석도 자신의 경험을 녹여서 상당히 잘 묘사해 놓았고. 그치만 호르헤 셈프룬 작가의 책을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후반으로 갈수록 책이 굉장히 재밌어진다. 특정한 여성의 누드에 대해 찬양을 하면서 보들레르의 코르셋(?)에 대해 회의를 제기한 점이 꽤 독특하다. 페미니즘까지 끌어오는 것도 그럭저럭 유머러스하다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거론해서 까대도 참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묘사를 참 잘 하는 걸 가지고 중반까지 계속 빙빙 돌려가면서 여혐해댔는지 의문이다. 마지막을 빛내기 위해서였을까.

대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던 첫 남자친구가 생각난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페인어를 꽤 능수능란하게 말할 줄 아는 그 혀가 좋았다. 순진하게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라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이 책을 보면 그 나라의 정서가 대강 그런가 보다. 책의 군데군데에 등장하는 스페인 시는 그 발음만큼이나 좋았다. 지나가버린 10년 전이 아련히 생각나는 책이었다.

 

그런데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아이러니한 아를레티의 시선을 느끼며 비를 피하고 있을 때-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그 시절 영화 속 대사 대부분을 외울 수 있었고, 그 대사 중 파리 사람 특유의 조롱조, 헤이그에서 만난 그 '꽃무늬 거들'을 바라보던 우아한 여자가 사용했던 말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강렬한 불편함이 나를 엄습했다. 참을 수 없는 육체적 슬픔이었다.
"패주하는 부대의 스페인 전사." 빅토르 위고의 말, 생미셸 대로의 빵집 여주인이 환기한 이 말은 나를 지독한 비탄에 빠뜨렸다.


아 화자 대신 빵집 주인 때리고 싶다 퉤 귀 멀었냐 애가 크로와상 쳐달라고 하는데 왜 못 알아듣냐 ㅠㅠ
아를레티는 프랑스 배우 이름이라고 한다.


교수님이 퀴어와 관련된 이슈는 민감하기 때문에 단어 선택에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도 그렇고 난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겪어본 적 없는 정상인이라면 들어도 무심코 넘어갈 말들에 이방인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차별을 당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설령 욕을 먹는 게 일상화되어서 감정은 둔해질 수는 있겠지만, 차별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자신이 무시받고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여러 해가 더 지나서 1967년, 그러니까 내 인생의 절반쯤 온 시절에, 다리오의 시를 선별해서 수록한 파란색 작은 책 한 권이 손에 들어왔다. (...) 어쨌든, 1967년까지 아직 갈등은 불거지지 않았다. 적어도 카스트로 체제와 작가, 시인들 사이에서는. 동성애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제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쿠바의 모든 책임자와 그들에게 아첨하는 무리는 그곳을 가리켜 재교육을 위한 수용소라고 말하곤 했다.


피델 카스토르가 그렇게 한 일이 있었군요. 동성애자는 동네북인가 ㅠㅠ 왜 자꾸 전쟁 일어날 때마다 감금해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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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ousies 2018-12-18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자기에게 떠오르는 감상을 아무렇게나 얘기하는 건 상관이 없지만, 대체 저 이상한 이미지들 뭔가? 그게 이 책이란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리고 어느 대목에서 동성애를 폄하했은지 당최 이해가 안 간다. 마치 자신이 대단한 여혐 감별사이라는 듯, 그런 시선으로 책을 읽은듯싶다. 물론 이 책의 화자에게 그런 모습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뭐 그저 까기 위한 글이라고밖에...

갈매미르 2018-12-19 06:50   좋아요 0 | URL
여혐감별사라기보단 저 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적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시대적인 배경도 충분히 파악했지만,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이야기했습니다. 글도 이상하니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미지를 집어넣은 것이라 보면 됩니다. 그리고 저는 두 군데에서 동성애를 폄하했다고 봅니다. 그 중 예를 하나 들자면 동성애자들 모두가 재능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본 데서 그렇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닌 동성애자는 그럼 방탕한 사람입니까? 그런 반항심이 들었습니다.

갈매미르 2018-12-19 06:51   좋아요 0 | URL
책을 욕하는 댓글은 용서없이 처분하지만, 제 서평을 욕하는 댓글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ㅎㅎ 이후론 여혐감별사같은 글이 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은 남혐감별사도 되기도 합니다 저는 ㅋ.

jalousies 2018-12-19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걸리적거리는 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동성애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주의 깊게 읽지 않았던 것도 인정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볼 기회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도 팬티 얘기가 나온다고, 저런 이미지를 올리는 것은 말 그대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여혐이 아닐까 싶은데요. 책과 전혀 관련 없는 이미지로 인해 혹여 이 책을 관심을 가질 수도 있는 독자들에게 쓸데없는 편견을 안겨줄 수 있을텐데....
 
아인 12
사쿠라이 가몬 지음, 미우라 츠이나 / 학산문화사(만화)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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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가 되면 사토가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지라 본격적으로 군대가 나오기 때문에 이런 복장이 나오기 시작한다. 더불어 미군 부대도 등장.

애니메이션의 아인은 많은 의문을 남긴 채 끝났다.
1. 플래토 현상이란 사실 무언가를 계속 하다보면 정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죠슈아 포어라는 사람은 기억력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맹훈련을 계속하다 한계에 봉착했다고 한다. 그 현상이 꽤 심각했는지 에릭슨에 의해 극복되었다 하는데,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그런 증상처럼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되는 바이다. 이중인격이라 해석한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본다. 애니를 끝까지 보면 그저 똑같은 인격이 인간보다 좀 더 단순한 형태로 계속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도 말한 것처럼 난 멀티다. 그래서 인격도 하나여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세상에 강요당해서는 안 되지만, 상황에 맞게 다양한 인격을 사용한다면 다ㄱ... 아니 인생을 사는 데에 좀 더 유용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플래토 현상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플래토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몰입과 집중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세상에 관심이 없는 나가이도 세상을 구하는 데 몰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산 구조의 힘을 예로 들고 있다. 그 힘은 동료들의 신뢰로 인해 형성된 자의식 없는 자신감, (친구 카이를 통해 나름대로) 세계로의 자기 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해결책의 방법같은 걸로 끌어올려야 한다. 나가이는 조용히 살려는 자신의 목표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려 했다. 그게 문제에 대한 신선한 해결책(다ㄱ... 아니 분신술)을 안겨다 주었다. 더불어 게임 형식의 사건 진행이 오히려 그에게 더욱 이득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심리학 과정을 굉장히 전형적으로 보여줘서 흥미가 생겼다고 할까. 아무튼 열심히 봤다.

 

2. 사토의 말과는 달리 머리가 떨어진 뒤 다시 재생되어도 그 사람 그대로인 것 같다. 떨어진 머리가 눈을 감아버리기도 했고. 결국 그 말도 사토가 살기 위해 들어놓은 최후의 보험이 아니었는지. 결말은 3기를 예고하며 마무리되었지만 워낙 잔인해서 대중들 모두에게 인기를 끌기는 힘들고, 애초 3D애니라 오덕계에서도 반발감이 심해서 무리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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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처녀 민음의 시 168
문정희 지음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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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중에서

멕시코 중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지팡이와 함께 앉은 노인을 보았다
지팡이는 무기가 아닌가
까다로운 공항 수속을 통과한 지팡이를 보며
그의 뒷자리에 앉았다

중남미 도서전이 열리는 과달라하라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온 여교수가 흥분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 씨도 이 비행기로 오셨어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
지팡이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
많은 고독한 막대기들을 보았지만
보았을 것이지만
바로 옆자리에서 뒷자리에서
그와 어깨를 부딪혔지만
마르케스는 보지 못하고 지팡이만 보았을 것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좋다고 볼만한 시가 없어서 이 시를 올린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겐 이 시가 좋은 건 아니다. 간지럼 정도는 기발하다 보지만 애를 낳아본 적도 없고 M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아이 다 키우고 50대 된 어머니들에겐 공감할 만한 요소가 많겠다.


아무튼 지팡이를 가져갈거면 그냥 개인 전용 비행기를 타던가 흠. 소설도 꼰대스러웠지만 이 정도면 혼모노네. 그나저나 저분 저거 땅콩갑질부린 거 아님?
검색해보니 노약자와 장애인의 보행용 지팡이는 허가된다고 한다. 문정희 시인이 그냥 비행기가 지체되는 게 짜증나서 썼을 수도 있고, 그 상황과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긴 하겠다. 시가 대표하는 게 뭔진 알겠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담아 시를 쓴 게 살짝 불편하다. 오랜만에 보니 전반적으로 맘에 안 드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네.



 


단순히 살이 찌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를 할 때 좀 더 둔부가 커지고 땀 흘리는 일을 할 때 작아지는 건 있다. 요즘 공부라던가 글쓰기기법이 중요하네 어쩌네 하지만 중요한 건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이다. 뭐라도 해야 결과물이 나온다. 그나저나 의자의 갈비뼈에서 시가 태어난다는 발상은 특이하네. 생각해보면 아무리 시인들이 뮤즈를 찬양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을 보자면 그 뮤즈랑 놀았던 걸 의자에 앉아서 쓰게 되었고 결국 의자는 홀대되었던 게 아닌지.


영감은 결국 노력에서 나온다는 걸 이 시집은 겸손하게 일깨우고 있다. 이제는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워낙 어렵다보니 다들 열심히 살아야 해서. 왜 우리나라 청년들이 노오력하라는 말을 싫어하냐면, 일로 먹고사는 걸 전제하기 때문이다. 옛날엔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게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그것을 숭고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이기주의라는 게 알려졌고, 청년들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너무나 불안에 떤다. 걱정하는 자나 걱정하지 않는 자나 전부 노인이 된 자신에 대한 모습에 시선을 둔다. 현재 노인들은 청년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라 한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하기엔 동기가 굉장히 낮아진다. 내가 이렇게 노후나 대비하기 위해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다 불안에 싸여 투자하다 돈 날리고, 연금이나 보험에 돈 싸들고 가지만 결국 돌고 돌아 그것은 전부 그쪽 직원들 입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함부로 노력해봐라, 열심히 일해라하는 말을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것이다. 자기 하고 싶은 걸 한다는 사람들도 노후의 공포를 잊으려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테니.

내 또래 여성들? 난 30대 되면 죽겠지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구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았는데 그래도 좀처럼 죽질 않는다. 여성은 크리스마스 케잌이고 팔리지 않으면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져 썩는 것이다. 아마 노인이 되면 연금도 떨어지고, 남성 노인들보다 훨씬 못하게 살겠지. 그런 사람들이 운동권을 하면 그때 참여해나갈 생각이다. 아무튼 이젠 이렇게 훌륭한 시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문정희의 다산의 처녀는 여성이 홀로 아이를 낳고 울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고독 끝에 태어난 아이는 핏빛처럼 붉고, 여성은 기쁨과 슬픔에 싸여 감정에 복받쳐 타오르듯이 운다. 그 여성은 강해서 그 순간은 곧 지나가고 그녀는 울음을 그친 뒤 길을 잃은 채 길을 찾아갈 것이다. 다소 앞뒤 분별이 없는 그녀의 짧은 시들은 너무나 매력있다. 마치 마리아가 하늘의 질문에 "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면 역사를 깨뜨려 처음으로 만드는 그 모든 순간이 시작되지 않았듯이.

 

흰나비 중에서

줄타기에서 모처럼 땅으로 내려온 소녀를
북한강가 누구네 집 여름 별장에서 만났다
엘비라 마디간! 그녀는 흰나비처럼
포도주 잔 주위로 날아다녔다

속도가 전공인 카레이서가
그녀의 날개를 잡았다
엑셀을 힘껏 밟고 달려가 신호도 무시한 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쥐더니
얇은 치마를 건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엘비라 마디간은 영화이름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있는 시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집은 뒤로 갈수록 점점 재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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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오 2018-12-09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갈매미르 2018-12-09 09:43   좋아요 0 | URL
엇 댓글 고맙습니다 ㅎㅎ
 
アメリカひじき·火垂るの墓 (改版, 文庫)
노사카 아키유키 / 新潮社 / 197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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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미군이 온다는데 창피하게 이런 게 역에 있다니.

 

'전쟁으로 국민을 참화로 몰아넣고 지금까지 모른 척 하는 나쁜 권력자들!' 하고 만들었는데, '와 미국놈들이 이렇게 잔인하다 잊지말자 야스꾸니'로 해석 당하는 작품을 감상했다. 집이 다 불탈 때 누군가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왜 외치고 다녔는지는 모르고 당장 처음에 시체를 보면서 '미국이 올텐데 왜 이런 꼴로 누워 있는 거야!'라고 하는 그 사람들 목소리만 들었을 수 있다. 혹은 아예 안 봤을지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바스터즈'에 나오는 나찌 죽이고 다니는 독일군 장교처럼 일본군 죽이고 다니는 일본인이 나와야 한국 사람들도 재미있다고 볼 거다. 그런 영화가 일본에서 나올리 없지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이런 건 참 종특인거 같다. 국가랑 관련된 장르는 맥락파악 안 하는 거.

보다시피 부제를 이렇게 정했다. 이게 진정 혀언실이자 최ㅡ선입니까?
애비는 전쟁에 죽었는지 애들 내팽개쳤는지 모르고 어머니는 전신화상으로 괴롭게 죽은 애들한테 뭐? 군인이 되서 나라를 위해 보옹사해? 세츠코한테 엄마가 죽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심신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들이 득시글한 이 나라에 무슨 충성을 하라고?
동네 사람들은 돌아가서 친척 아줌마에게 용서를 빌라고 하는데 빌 사람이 따로 있지. 조금만 더 있음 세츠코가 운다고 비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팰 것 같은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냥 아는 사람 곁에서 편안히 죽는 게 나을 것 같지 않냐? 그리고 나라는 국민이 주인이라며? 전쟁나면 약 없고 밥 주지 않고 애 두들겨 패는 지역사회가 지역사회냐? 그런 나라가 나라냐?
그리고 일 안 하고 밥 먹는 게 무슨 도둑놈 심보냐?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기업이 면접에서 '아가씨 커피 탈 수 있어요?'라고 물어보는 건 도둑놈에 처음부터 희롱할 심보 아니냐? 이외수 할아버지는 꼭 이 애니메이션을 보길 바란다. 뭐 불로소득은 지옥에 떨어지는 중죄라고? 그거 하루하루 목숨만 연명하는 세츠코와 주인공들에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
어른들 말투 진짜 씨발 졸라 현실 타령하고 노숙자들 굶어 죽어야 한다고 하는 거 보니 내 전남친과 똑디네. 전쟁나서 포탄 떨어지면 제일 먼저 뒤졌으면 하고 기도하게 된다. 일단 그 친척 아줌마부터.

아니 그리고 도와주려는 어른들도 왜 미친듯이 가식적이야 순경새끼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 도와주나 싶더니 저기 가서 물마시고 오래 ㅋ 야 니 배급을 반 띄어서 줘도 세츠코 줄 밥이 모자랄 판인데 뭔 개소리야 밥을 달라고 이자식아 ㅋㅋ 그리고 생각해보니 처음에 시체한테 주먹밥 준 놈도 그래 시체가 어떻게 밥먹냐 슈발 ㅋㅋㅋ 니가 죽어서 먹어보던가?! 저러고 나서는 성당이나 교회나 절에 가서 신님 저는 오늘도 봉사했습니다 천국가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했겠지 ㅋㅋㅋㅋ 우웩이다 웨엑!!!

 

애니에선 세츠코의 죽음 이후 역에서 죽어갈 때까지의 주인공의 삶은 나오지 않는다. 혈육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은 그에겐 지옥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여태 죽은 사람을 짓밟고 기어오르는 세상을 살고 있었다. 이제는 경제 성장도 한동안 되지 않을 거라 한다. 우리가 좀 덜 먹게 되더라도 이제 그들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복지는 효율적이어야 한다. 단시간에 많은 성과를 내는 게 끝이 아니라, 가난한 아이들이 돌봐줄 어른 하나 없이 혼자서 살기 전에, 굶어 죽어가기 전에, 나아가 정서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기 전에 제때제때 도움을 줘야 한다. 또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가정과 유사한 집에서 살게 되더라도 불편한 점은 항상 있을 것이다. 가정과 유사할 뿐이지 가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 모두 그룹홈에 가게 된다지만, 모두가 알듯이 기숙사 생활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이런 것들을 나부터 고려해서 실천에 반영해야겠다.

우리나라도 이 애니 보고 반성해야 한다. 적어도 주인공이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서 세츠코와 같이 급식도 먹고 졸업해서 일을 했다면 저런 일이 발생했을까? 생계도 생계지만 교육 관련 지원이 부실해서 생계가 해결되도 양극화를 피할수가 없는게 약자이다.  시대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지식 자체가 돈이 갖는 계급성의 하위호환이다. 페친이 아는 다문화가정 애가 하나 있는데 생계가 지원되도 결국 뭘 배울 수가 없어서 현장일 한다고 한다. 대학도 어떻게 해야하고 우리나라는 교육에 관심이 많다면서 정작 필요한 지원은 하나도 안 하는 것 같다. 학교사회복지사한테 지원 책임 돌리고 다 맡기고 있는데 이들은 그냥 학교의 비정규직 따까리일 뿐이고. 이번에 자격증 보장해준다고 하는데 자한당에서 또 이런 저런 법 써서 예산 안 나오게 막으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이번에 자한당과 무슨 계약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밖에 지원이 안 된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사람 몇 죽어야 지원해주고 말이다. 권력도 변화해야 하며, 우리도 행동에 옮겨 국가가 한국의 세츠코를 지원하기를 목청껏 외쳐야 한다. 그리고 국가를 너무 믿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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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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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나는 사랑 이야기들은 에로스와 정치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을 드러낸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 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설령 자신이 그 일만 하다가 죽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정신도 존경하는 편이다. 사랑 또한 그렇다. 사랑은 자아를 어느 정도 놓아버리는 일이며, 심지어 그건 좋아하는 일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타자는 자신의 모든 인생 철칙을 단호히 거부할 수도 있다. 심지어 타자는 인격까지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 같이 살기를 원한다. 심지어 연인이 먼저 떠나가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 연인을 품고 있다면, 끝까지 그것을 품고 살아가길 원한다. 죽음은 결국 스튁스 강, 즉 망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를 아껴주며 살지 않으면 사랑은 깨질 수밖에 없다. 연애할 때 날 나만큼 아껴주지 않는 인간이라면 결혼하고 사랑이 식어갈 땐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방귀 냄새도 향기로워 보일 수 있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돈 없어도 예뻐 보인다. (그렇다고 내 동생처럼 돈 안 벌고 여자 만나 등골 뺄 생각 하면 안 된다. 생명체로서 살기 위해 노력 좀.) 사랑한다면 남자가 한남이고 여자가 메갈인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 분간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올바른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강화하고 싶어한다. 예술가들은 시대성에 감안해 책을 잘 팔려면 자신의 꼰대성을 감춰야 한다. 나는 그게 그들의 꼰대성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본다. 개인의 범죄는 지적하되 창작물의 자율성은 보장해야 한다.

반면 남성들은 남성들대로 오토코노코를 만들거나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여성을 만들어 멋대로 숭배하려 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남성들은 자신이 산 굿즈들을 부숨으로서 분노를 표시한다. 이는 철저히 돈으로 여성을 사고 지배하려는 상업주의를 나타낸다.

 


페친의 프사가 에반게리온의 아스카다. 그 분이 현재 중1인 아는 덕후 한명이 있는데 프사 캐릭터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연령대에게서 헤븐즈필은 모르는데 페그오 난릉왕 최애라는 식의 얘기들도 꽤 자주 접했다. 아니 잠깐만 무슨 세대 차이가 이런식인가. '세대 차이라기엔 너무 말이 안되고, 덕질이라는 개념이 내 세대가 하던 그런 것 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된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고 알고있는 방식의 덕질이라면 저런 식의 편향적인 앎이 나올수가 없는데. 이야말로 자기가 보고 싶은 애니나 최근에 뜨고 있는 애니만 볼 뿐이지 애니메이션을 진정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이 때 책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자기애는 타자와 명확한 선을 긋는데 나르시스트는 그게 없다. 나르시스트는 애니를 감상하는 폭이 좁은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태도다. 책에서는 세상에는 나르시스트가 많고 그게 생성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불가항력 참 싫은 듯 ㅎㅎ

 


이 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왜 내가 희생을 해야 하느냐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남자친구가 알고보니 굉장히 전형적인 한국남자의 가부장적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 나는 죽어서 그 집 귀신이 될 각오를 하고 사랑해야 하나?


그리고 프리랜서는 일단 근로복지부터 보장받지 못한다. 그게 생각보다 굉장히 치명적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은 프리랜서가 되지 않음 해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럼 죽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내 일에 목숨을 쏟아부어야 하나? 그리고 이들은 안 그래도 잘 될 거라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일을 완수하려 하는데, 그런 이들에게 자기 강제의 죄를 짓고 있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은 진보적이며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자기를 비우는 건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사랑을 말할 때 따라붙는 의무같은 것이었다. 이젠 좀 진부하지 않을까? 대체 그 '죽음을 각오한 사랑' 속에서 창조된 게 무엇인가? 사랑을 재발명하려는 투쟁 모두가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사랑과 우울증의 긴장 관계는 멜랑콜리아의 영화 담론을 처음부터 규정한다. 영화의 음악적 틀을 제공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사랑의 힘을 강하게 환기한다.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는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는다.


좋아하는 감독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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