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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정치적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나는 사랑 이야기들은 에로스와 정치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을 드러낸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 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설령 자신이 그 일만 하다가 죽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정신도 존경하는 편이다. 사랑 또한 그렇다. 사랑은 자아를 어느 정도 놓아버리는 일이며, 심지어 그건 좋아하는 일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타자는 자신의 모든 인생 철칙을 단호히 거부할 수도 있다. 심지어 타자는 인격까지도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 같이 살기를 원한다. 심지어 연인이 먼저 떠나가더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 연인을 품고 있다면, 끝까지 그것을 품고 살아가길 원한다. 죽음은 결국 스튁스 강, 즉 망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를 아껴주며 살지 않으면 사랑은 깨질 수밖에 없다. 연애할 때 날 나만큼 아껴주지 않는 인간이라면 결혼하고 사랑이 식어갈 땐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방귀 냄새도 향기로워 보일 수 있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돈 없어도 예뻐 보인다. (그렇다고 내 동생처럼 돈 안 벌고 여자 만나 등골 뺄 생각 하면 안 된다. 생명체로서 살기 위해 노력 좀.) 사랑한다면 남자가 한남이고 여자가 메갈인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지구가 둥근지 평평한지 분간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올바른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강화하고 싶어한다. 예술가들은 시대성에 감안해 책을 잘 팔려면 자신의 꼰대성을 감춰야 한다. 나는 그게 그들의 꼰대성을 바꾸지는 못한다고 본다. 개인의 범죄는 지적하되 창작물의 자율성은 보장해야 한다.
반면 남성들은 남성들대로 오토코노코를 만들거나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여성을 만들어 멋대로 숭배하려 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남성들은 자신이 산 굿즈들을 부숨으로서 분노를 표시한다. 이는 철저히 돈으로 여성을 사고 지배하려는 상업주의를 나타낸다.
페친의 프사가 에반게리온의 아스카다. 그 분이 현재 중1인 아는 덕후 한명이 있는데 프사 캐릭터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연령대에게서 헤븐즈필은 모르는데 페그오 난릉왕 최애라는 식의 얘기들도 꽤 자주 접했다. 아니 잠깐만 무슨 세대 차이가 이런식인가. '세대 차이라기엔 너무 말이 안되고, 덕질이라는 개념이 내 세대가 하던 그런 것 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가 된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고 알고있는 방식의 덕질이라면 저런 식의 편향적인 앎이 나올수가 없는데. 이야말로 자기가 보고 싶은 애니나 최근에 뜨고 있는 애니만 볼 뿐이지 애니메이션을 진정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이 때 책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자기애는 타자와 명확한 선을 긋는데 나르시스트는 그게 없다. 나르시스트는 애니를 감상하는 폭이 좁은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태도다. 책에서는 세상에는 나르시스트가 많고 그게 생성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불가항력 참 싫은 듯 ㅎㅎ
이 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왜 내가 희생을 해야 하느냐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남자친구가 알고보니 굉장히 전형적인 한국남자의 가부장적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 나는 죽어서 그 집 귀신이 될 각오를 하고 사랑해야 하나?
그리고 프리랜서는 일단 근로복지부터 보장받지 못한다. 그게 생각보다 굉장히 치명적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은 프리랜서가 되지 않음 해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럼 죽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내 일에 목숨을 쏟아부어야 하나? 그리고 이들은 안 그래도 잘 될 거라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일을 완수하려 하는데, 그런 이들에게 자기 강제의 죄를 짓고 있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은 진보적이며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자기를 비우는 건 옛날부터 전통적으로 사랑을 말할 때 따라붙는 의무같은 것이었다. 이젠 좀 진부하지 않을까? 대체 그 '죽음을 각오한 사랑' 속에서 창조된 게 무엇인가? 사랑을 재발명하려는 투쟁 모두가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사랑과 우울증의 긴장 관계는 멜랑콜리아의 영화 담론을 처음부터 규정한다. 영화의 음악적 틀을 제공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사랑의 힘을 강하게 환기한다.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는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는다.
좋아하는 감독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