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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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풍경화라던가.
잘 그려진 그림이 그림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듯
어떤 책은 나도 한번 쓰고 싶다는 도전욕을 자극한다.
바바라 오코너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그것.


몇 장 읽다보니 왠지 오코너에게 소재를 뺐긴 느낌이다.
딴 건 몰라도 개 이야기라면 나도 해 볼만한 소재 아닌가.


아빠의 가출로 차에서 자고 맥도널드 화장실에서 몸을 닦아야 하는 11살 소녀
이 아이가 집을 구할 수 있는 길은 하나.
주인에게 듬뿍 사랑 받는 개를 훔치는 길이다.
주인은 개를 찾아주는 대가로 거액의 사례금을 내놓는다.
완벽한 설정이다.
더할 나위 없다.
더구나 아이 유괴보다는 개도둑질이 훨씬 도덕적(?)일뿐더러 안전하고
우화적이며 심지어는 유머스럽기까지 하다.


개에게 실종의 전후사정을 묻는 주인의 표정을 상상해보자.


-너를 찾아준 아저씨가 혹시 너를 납치한 건 아니니?
..........................
-내가 너에게 한눈을 파는 사이에 그 아저씨가 너를 데려간 건 아니냐구?
..........................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거냐구?
...........................

개로서도 주인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기껏 나온다는 소리는
낑낑깽깽, 더해봤자 멍멍왈왈 정도일 것이 분명하다.
(신은 개도둑편이다. 개에게 언어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의 개들의 언어실력이 이 정도라면
두 발 쭉 뻗고 개를 찾아준 사례금으로 지중해 여행을 꿈꾸어도 좋을 것이다,
단지 CCTV를 조심할 일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까.
(하여튼 기술은 모든 이들에게 친절한 건 아니다.
개를 훔치려는 인간들에게는 더더욱 불친절하다.
개 몸에 이식해놓은 전자장치는 개도둑에게는 최악의 기술이다.
기술은 개도둑놈의 서사와 신화를 깡그리 망쳐놓는다.
개같다.)

P.S 애견협회에서 다는 악플에 난리가 날지도 모르겠다.

Barking dog seldom bites 짖는 개는 좀처럼 물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부디 틀리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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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여 안녕 만화로 보는 한국문학 대표작선 19
김종광 지음, 박용석 그림 / 이가서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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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뭔가 있어 보인다. 심오하고 난해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다. 스타일을 꽤 중시하는 친구들이 대체로 이런 류에 속한다. 이런 친구들은 심오해 보이면 뭣이든 좋아한다. 문화적 명품주의자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어떻든 희귀하고 난해하고 심오한 것들로 자신의 주변을 장식하면 꽤나 근사하게 보인다. 좀 있어 보인다. 한때는 나도 그런 병에 걸린 듯하다. 재즈명반을 모으고 마야코프스키와 호치민과 체게바라를 읽었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의 전기를 읽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야 대단한 명분을 내세웠을지 모르겠으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단지 그럴싸해 보인다는 이유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바바리를 입으면 꼭 깃을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마음과 엇비슷하다. 터프가이란 소리 들으려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담배 하나 꼬나문 웨스턴보이의 꼴같잖은 남성성이라니.


옛날에 그랬다면 지금은? 뭐든 게 재미다.(재미나는 골에 범난다는 말있다. 잘 두리번 거리자.) 영화도 재미고(타르코프스키는 이젠 졸립다.) 소설도 재미다.(르끌레지오는 10년 전에 재미없어졌다.) 달리는 것도 재미고(아파도 재밌다.), 읽는 것도 재미다.(책은 인터넷처럼 근사한 오락도구다.) 심지어는 사람도 재미다. (재미로 소도 잡아먹을 양반이다.)도둑도 재미만 있으면 친구 하겠지만 군자도 재미가 없다면 친구로서는 사절이다. (물론 개그 잘한다고 재밌는 건 아니다. 재미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니까. 좋은 느낌, 그게 재미다.)재미주의자란 칭호가 생긴다면 그 단어의 제 1호 시험대상자로 나를 추천해주길 바란다. (너무 바란다. )


나는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김종광이란 작자를 좋아한다. 그의 첫 창작집 『경찰서여,안녕』(문학동네)에 실린 11편의 단편 중 <많이많이 축하드려유>라는 단편은 단연 걸작이다. 지방 소도시의 원동기 면허시험장을 무대로 하면서, 시험을 보러 사람들의 입심이 걸다 못해 푸지다. 들어보자.


“‘어느 다방 냄비들인가 젖통 한번 큼직하네’.정원형(62세)은 옷차림이 유난스러운 여자들 쪽을 흘깃거리며 입맛을 다셨다.확실히 벗던가, 좀더 입던가, 거참 살벌나게 입어번졌네.저 게 그래도 시험 친다고 한 가지씩 덧입고 온 행색일 것이라고 원형은 생각했다.‘아엠에뿌 땜이 다방 물 하나는 맑아졌당께’.가까이 앉은 이재만(63세)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지방 소도시가 그의 작품 속에서 오롯이 살아난다. 껌을 짝짝 씹어대며 보자기에 싼 보온병을 들고 배달 나가는 허름한 다방의 레지 아가씨도 떠오른다. 그 아가씨의 미니스커트를 힐끗거리며 “미스서 오늘 스타일 쥑이네.” 추임새를 넣는 날건달 하나도 떠오른다. 어쨌든 울긋불긋 촌스런 시장통 의상을 걸친 인간들의 입에서 나온 멘트가 모처럼 구수하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낄낄거리며 읽다가 보니 저만치 동료가 있어서 무안했다. 빌 브라이슨이나 김종광 같은 사람의 책은 주위를 잘 둘러보고 읽어야지 그렇잖으면 미친놈이라는 비난을 듣기 십상이다. 오쿠다 히데오도 마찬가지. 웃기는 작자다.


알랭드 보통, 미셀 투르니에나 쿤데라의 지적이고 세련된 글들을 읽는 재미야 비할 데가 없지만, 가끔은 왁자한 저자거리에서 바지에 국물을 흘리며 소주 한잔을 하고 싶을 때 김종광은 잘도 읽힌다. 너저분하고 누추한 삶을 껴안는 것이 그의 문체고 유머다. "인상 쓸 거 뭐있슈. 사람 쥑인 것두 아닌데" 능구렁이를 삶아먹은 것 같은 능갈맞은 충청도 사투리도 일품. (그의 소설 『첫경험』도 경험해봐야겠다. 치정에 얽히지 않는다는 것도 책이 좋은 이유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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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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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의 370페이지는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간과해버렸을 귀중한 정보 하나를 소개한다. “유럽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은 단연 소피아에 모여 있었다.” 모름지기 독서가 왜 중요한 일인지를 이 페이지만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주체할 수 없는 남성호르몬의 소유자인 빌 브라이슨의 책은 알렉산더 페인의 귀엽고 깜찍한 영화 <사이드 웨이>를 생각나게 한다. 어떻게 하면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침대 속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에 골몰하는 이 속물들의 캐릭터들에게 너그러운 애정을 갖도록 만드는 알렉산더 페인의 연출력은 절묘했다. 허접하고 구차스런 욕망을 나무라지 않고, 사는 게 뭐 그런 거 아니야 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연출가의 시선은 따스했다. 어쨌거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볼따구를 꼬집어 주고싶은 영화였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더구나 수시로 웃긴다. 나는 오직 한번이라도 더 웃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세상은 날마다 금요일은 아니지』에서 살인적인 유머를 선보였던 호어스트 에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근엄하게 시치미 떼며 사람 웃겨준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웃기는 작자들이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뭣보다 대한민국은 따지는 게 많은 나라다. 주자학적 전통은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듯하고, 군번, 학번 따지는 서열주의 문화도 엄존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벌떼처럼 날아오는 댓글이 장난이 아닌 나라다. 더구나 이념적 경직성은 또 어떤가. 스탈린 시대에 버금간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다가는 생매장시켜버리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을지도 모르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에 빌 브라이슨이 태어나지 않은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이다.

화려한 수사학으로 센티멘탈리즘을 교묘하게 위장하는 문인들의 여행기는 재미가 떨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중력이란 중력은 모두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한 도저한 자의식, 이런 거 이제는 부담스럽다. 그저 가볍게 빌 브라이슨을 따라가 ‘내 안의 히피를 일깨우는’ 곳이라는 암스테르담에 머물고 싶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압축하고 있지 않던가. “네덜란드 맥주를 손에 들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창 밖의 광경을 보면서 이 큰 도시를 아름다운 운하와 쾌활한 창녀들, 풍부한 마약으로 채우다니 네덜란드인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라고. 불손하고 삐딱할뿐더러 무뎁뽀이기까지 하지만 그러기에 베시시 입꼬리를 귀에 걸리게 한다.

코펜하겐의 매력을 설명할 때도 빌 브라이슨은 자기식의 유머를 잃지 않는다. “코펜하겐은 또한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사무실 여직원들이 점심시간에 나와 시립공원에서 상의를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유일한 도시다. 누가 뭐래 해도 이 점만으로도 나는 매년 코펜하겐을 유럽의 문화 도시로 선택한다.”라고. 이런 고급정보를 독자들과 공유할 정도로 빌 브라이슨은 너그럽다. 이런 정보는 어떤가. “기억해두자. 로마에서 줄을 설 때는 끼어드는 사람을 막기 위한 곡괭이가 필요하다!”

이 수다스런 불평꾼의 입이 갑자기 시인의 그것처럼 우아해지는 도시가 있다. 이탈리아의 소렌토와 카프리가 그곳이다. 빌 브라이슨의 입을 거친 투명한 햇살과 수려한 풍광에 궁둥이가 들썩인다. 마이너스 통장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코펜하겐의 미녀들은 하루하루 늙어가지만 새로운 미녀들은 자꾸자꾸 태어나는 법이다. 내 눈으로 코펜하겐의 매력을 지켜보기 위해서 돈 버는 일에도 조금 더 신경 쓸 일이겠다.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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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짝퉁 라이프 - 2008 제3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고예나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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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작가들은 확실히 Cool하다.
386선배 세대들의 자기연민 같은 게 없다.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며
달콤하든 시큼하든 씁쓸하든 어쨌든 그 상처를 즐기는 나르시시즘이 없다.
순수에 대한 집착도 없고
무쪽 자르듯 피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 들지도 않는다.
‘시발’이라고 욕도 조금 할 줄 알고
야한 이야기도 별 창피함 없이 슬쩍슬쩍 언급한다.
70-80 세대의 도덕적 엄숙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야기다.
어떨 때는 70-80 세대들의 진지함이 그럴듯해보이다가도
도저한 나르시시즘이 영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 때
고예나의 <마이짝퉁라이프>는 잘 읽히기 시작한다.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민숭민숭한 느낌의 여자를
나의 엄마로 받아들이는 대목에서 찡한 느낌이다.


“진짜 어머니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피를 섞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을 섞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었을 것이다.


반간계. 알고서도 속아 주는 것. 모르지만 속지 않는 것. 알지만 눈 감아 주는 것. 모르지만 아는 것. 적의 간첩은 자신이 반간으로 쓰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모르고도 알은체하는 것일까. 가짜가 진짜일까. 진짜가 가짜일까. 진실이 거짓말을 하는 세상이다. 세상이 만든 진실이 미워지면 너만의 가짜를 만들어라. 네가 원하는 그 상상이 진짜다. 네 진심이 깃든 상상으로 이 세상에 복수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어쨌든 20대 작가의 약진은 기분 좋다.
선배작가들이여 어서 빨리 열심히 늙어서 이들에게 자리를 비켜줘라.
아님 70대에도 여전히 섹시한 쿤데라처럼 쫀득쫀득한 소설을 쓰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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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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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가장 훌륭한 방법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부르는 숲> 속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어간다.
빌 브라이슨의 유머에 대책없이 키득거리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따라가다가
안되겠다 싶어
휴일에는 북한산에라도 가야겠다고 혼자 다짐해본다.
몸을 근질거리게 하여
떠남을 부추기는 책 속으로 자꾸 기어들어간다.
파스칼 키냐르는 독서는 ‘엑소더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빌 브라이슨은 모세?

어쨌든 이 책은 여기가 아닌 곳으로 나를 이끈다.
그곳이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필요는 없다.
숲과 바람과 계곡의 물소리와 홍방울새의 울음소리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만만한 곳은 아니다.
끊임없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
나란 존재가 사실 별볼일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곳,
기쁨은 멀쩡한 사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

그래, 위험도 없으니 기쁨이 있을 턱이 있나.
오늘날 여행은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관광'이 되었다.
'패키지투어'는 최악의 관광인 셈이다.
패키지 투어는 자본의 논리가 이끄는 대로 가는 길이다.
몸이 요구하고, 위험이 부추기는 길
겨울이 오기 전에 그런 길을 가보고 싶다.

P.S
420 페이지는 약간 부담스럽지만 저자가 갔던 3천 360킬로미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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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백두대간이라는 애팔래치아 3천 360킬로의 트레일을 걷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를 부르는 숲>의 빌 브라이슨은 그 기분을 아주 명료하게 요약한다.


“아주 오래, 또 아주아주 멀리 걸었어도 당신은 항상 같은 시간과 장소네 놓인 존재일 뿐이다, 숲이다! 어제도 거기에 있었고, 내일도 거기에 있다. 그야말로 광대무변한 하나의 단일성이 길모퉁이를 돌아도 지나쳐온 곳과 구별이 안 되고, 나무를 쳐다보아도 똑같이 엉켜 있는 한 덩어리다. 결국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당신이 걷는 길은 매우 크고 출구가 없는 하나의 원이다. 그게 뭐, 대수인가!”


광대무변한 단일성, 그 거대한 단순성을 좇아서, 중세 최고의 여행가라고 하는 이븐 바투타는 사막의 길을 따라 12만 킬로미터를 여행했었던 것일까.


재작년인가 속초에서 강릉까지 하루 종일 걸은 적이 있다.(고백하자면 오분의 사 지점까지 와서 히치하이킹을 했지만...) 주위의 풍광은 별다를 게 없었다. 길, 산, 가끔 보이는 바다가 전부였다. 입이 떡 벌려지는 절경도 없었다.


애팔래치아는 오죽 하랴. 걸어도 걸어도 보이는 것은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나무들의 숲과 하늘 뿐. 그러나 그 밋밋함과 단순성은 출근하고 퇴근하고 잠자고 이 닦고, 아침 먹고 점심 먹고 하품하고 이 쑤시는 우리들의 일상의 밋밋함과는 다른 것이리라.


호흡을 내쉴 때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내 몸의 감각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비가 올지 눈이 올지, 하늘의 구름을 비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밤이 되면 곰들의 습격을 우려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그야말로 모든 감각이 전방위로 깨어있는 시간들일 것이다. 이런 시간들을 향해 설레는 마음들을 주저앉히기 위해 시야를 가리는 파티션의 숲 안에서 차라도 한잔! 음악이라도 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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