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 포인트
우디 알렌 감독, 스칼렛 요한슨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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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문장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 있다면 친구들은 대뜸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이냐고 묻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것은 다름 아닌 조지 하트의 『원시인 BC』다. 페이지가 닳고 닳도록 본 만화책이다. 사유는 오직 절약을 하기 위해 기성복을 입는다던가. 포복절도할 크리에이티브로 무장한 이 책은 너만의 방식으로 사유할 것을 권유했다. 가끔 친구들로부터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어쩌면 조지 하트의 카툰을 오래 음미한 덕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췌언이 길어졌다. 먼저 조지 하트의 카툰 하나를 소개해보자.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길의 벽면에 구멍이 뚫려져 있다. 그리고 그 구멍 가장자리에 이렇게 씌어 있다. ‘들여다 보지 마시오’ 그러나 그 문구는 실제로는 ‘넌 여기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못 베길 걸’하는 강력한 유혹의 글인 셈이다. 그럼 그 구멍 속에는 어떤 풍경이 있었을까. 44-38-44의 드럼통의 몸매를 가진 여자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툰의 마지막 컷은 그 구멍을 들여다본 사람들의 혀가 가슴까지 늘어져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들여다 보지 말라’는 금기가 ‘보고 싶다는’ 욕망을 생산해낸 셈이다. 욕망의 대상이 금기나 규율에 의해 통제되는 경우 그 대상은 더 강렬한 욕망의 목표가 된다는 죠르주 바타이유 식의 명제를 조지 하트는 명민하게 형상화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매치포인트>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한 청년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의 금기는 노라(스칼렛 요한슨)다. 노라는 상류층 친구 톰(매튜 굿)의 약혼녀. 그러나 크리스는 이미 톰의 여동생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와 연인 사이다. 그러나 크리스의 마음은 클로에에게 없다. 클로에는 상류층으로 편입되고 싶다는 현실원칙이 필요로 하는 상대일 뿐이다. 크리스의 마음은 노라에게 있다. 현실이냐 욕망이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냐 이수일이냐의 양자선택의 갈림에서 그는 클로에를 선택한다.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삶이 있는 한 쾌락의 원칙은 잠들지 않는다. 크리스는 노라에 대한 욕망을 접을 수 없다. 전형적인 신파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이 비장한 갈등을 더욱 비장하게 하는 것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등의 오페라 아리아다.  

하기는 스칼렛 요한슨 앞에서 냉정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장을 보태자면 어지간한 수도사도 파계를 감행하게 할 용모다. 하물며 범인(凡人)들임에랴. 그만큼 그녀의 스물 두 살의 육체는 눈부시다. 그녀는 진정한 쾌락을 탐하려거든 너의 죽음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므 파탈이다.

이명옥의 『팜므 파탈』이란 책을 펴보라. 책은 귀스타브 모로의 ‘현현’, 빌렘 트뤼브너의 ‘살로메’, 귀도 레니의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아 든 살로메’, 잠피에트리노의 ‘살로메’ 등 역사 속에 명멸해간 수많은 요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도 책의 이미지에 뒤지지 않는다.)

저자는 19세기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통적인 성 가치관이 무너지고 여성들이 자의식에 눈을 뜨던 시기에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욕망과 공포가 투영된 것이 ""팜므 파탈""이라는 이미지라고 설명한다. 남성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성의 자유를 주장하고 해방을 부르짖는 여성들에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끼는 동시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를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설명이다.

영화 속의 크리스 또한 노라에게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그의 두려움은 노라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확신한다. 그의 두려움은 상류사회로부터 배척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소속되고 싶은 집단으로부터 배척될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증’이다. 구조조정에 따르는 퇴출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사내들이 가질 법한 공포증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 고분고분 따르자면 자신의 욕망을 숨길 수밖에 없다. 넥타이도 매고, 구두도 반질반질하게 닦고, 랩이나 힙합은 아이들이나 듣는 음악이라고 치부하면서 고상하게 아리아를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매혹의 대상 앞에서 그들의 자제력은 허술하다. 누르면 솟아오르는 것이 어찌 스프링뿐이겠는가.

조물주는 애초에 크리스의 욕망의 스프링을 노라를 향해 튀어 오르도록 설계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볼 때,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살아온 것은 기껏 몇 천 년뿐이다. 크리스는 금기를 뛰어넘어 노라를 향해 뛰어든다. 둘의 사랑은 뜨겁다. 그 사랑의 공간에서 어떤 현실도 발붙일 곳이 없다. 『에로티즘』에서 죠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생각해보라. 사랑의 격정에 송두리째 빠진 자에게 어떤 현실이 틈입할 여지가 있겠는가.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격절, 그것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모든 현실에 묶여 있는 자들의 운명은 사랑에 모든 것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영웅들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그들은 비장하다. 그래서 섹시하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결별을 선언하는 미셸에게 “아무도 내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손가락에 권총을 쏘는 알렉스,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김희애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달려오는 트럭에 뛰어들며 "나는 죽지 않아요"라고 외치는 문성근. 그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런 용감한 수컷들의 행위가 호르몬 테스테스테론의 영향이라고 애써 폄하하지만 그런 그들의 영웅적(자기파괴적) 행동에 연인들은 자신의 마음과 몸의 문을 연다. 그것이 신파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크리스가 노라에 대한 욕망을 접고 클로에에게 투항했거나(현실원칙의 승리), 또는 클로에에 대한 욕망을 접고 노라에게 투항했다면(쾌락원칙의 승리) 영화는 뻔한 멜로드라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팽팽한 긴장 속에 있다. 우디 알렌이 사랑과 배신이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택한 것은 현실의 긴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노대가답게 우디 알렌은 영화에서는 버젓이 통용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얼마나 먹히지 않는 허술한 논리인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니들은 그렇게 생각하니? 난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는 우디 알렌의 장난기에 포인트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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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삶의비밀. 2008-07-2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글이 깊으면서도 빠져들게 만드는 설득력을 갖춘 것 같네요.
파편화 되었던 생각들이 다시 모아지는 느낌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다 빈치 코드 (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론 하워드 감독, 톰 행크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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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짜리 장편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영화화한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밋밋하기 그지없다. 원작이 보여준 구수한 사투리의 말맛도 없고, 영화는 책처럼 해방 전후사에 대한 치열한 역사 인식을 담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임권택의 잘못만으로 미루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의 내면과 시대정황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애당초 영상은 문자에 미치지 못한다. 내레이터가 등장해 이러쿵저러쿵 인물의 내면심리를 서술하고 묘사하는 소설에 비해, 인물의 표정이나 배경을 통해 인물과 인물간의 갈등의 깊이나 복잡한 인간의 심리적 굴곡을 드러내기는 역부족이다. 미니시리즈나 연작물을 통해서는 어느 정도 원작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기본적으로 내레이터가 등장할 수 없는 장르다. 시시콜콜 인간의 심리와 정황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영화의 태생적 한계다.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사건이 전개가 느리고 관념적 서술이 많은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하나의 문장의 길이가 한 페이지가 넘고, 관념적 서술이 몇 페이지에 걸쳐 지속되는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가 이 소설을 영화화한 <유리> 또한 재미있게 보는 일은 아주 드물다. 박상륭의 소설에 재미를 들린 사람들은 그 소설이 가지는 도저한 관념성과 언어의 감칠맛에 빠진 이들이다. 이들이 영상의 언어에 같은 만족을 느끼기는 힘들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펼쳐보라.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는 스피디한 사건의 전개보다는 시시콜콜 설명적이고 지적인 내레이션이 독서의 재미를 더해주는 책이다. 뭔가 근사한 지식을 주입받고 있단 느낌, 바로 이 느낌이 댄 브라운이 우리에게 주는 인식의 즐거움이다. 이런 설명적 내레이션을 영상의 언어로 전환하는 데서 론 하워드 감독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을 법하다. 특히 랭던이 크립텍스의 암호를 풀기 위해 고도의 사유를 전개하는 대목을 읽어보라. 그 과정을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백과사전식의 방대한 양의 지식을 가진 사람의 두뇌에서 전개되는 고밀도의 사유와 관념을 영상으로 번역해내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다. 많은 평자들이 론 하워드의 <다빈치코드>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밋밋하게 영상으로 옮겨 놓았으며,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원작의 주장마저 훼손했다고 혹평을 했다. 혹평은 나름대로 정당하지만 론 하워드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원작에서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후손을 뒀고, 성배(聖杯)란 마리아를 뜻한다는 주장을 예시하기 위해 펼쳐졌던 방대한 예술작품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그 많은 작품들을 영화에서 보여주었더라면 영화는 오히려 EBS에서 방영해야 할 교양물이 되지 않았을까.

소피와 할아버지인 시온수도회 수장 자크 소니에르가 빚는 갈등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성교. 이를 상징하는 비밀 제의에 대한 의미는 단 두 컷으로 처리되었다. 이 비밀 제의는 <다빈치 코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코드다. 성교는 단순히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히에로스 가모스’라는 의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성교를 통해 신을 경험하는 행위였다. 댄 브라운은 이 의식이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도 등장한다고 말해준다. 신과 접촉하기 위해 인간이 성을 이용하는 것은 초기 교회의 권력 바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의 아내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기독교 역사의 비밀창고로 숨겨졌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장영란의 『신화 속의 여성, 여성 속의 신화』의 한 부분을 상기시킨다. 장영란은 그리스 신화의 ‘헤라’의 경우 본래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지 모신(땅의 어미신)이었으나, 가부장 문화를 지닌 그리스인들이 들어오면서 그를 제우스와 결혼시킴으로써 지극히 보조적이고 주변적인 캐릭터로 전락시켰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과거에 중심적인 존재였던 여신이 주변적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기독교에서는 아예 여신을 배제했고, 그 배제의 과정에서 성(性)마저도 타기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온수도회의 비밀의식 중 성교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영화에서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갈등의 기원으로만 단순하게 묘사했다. 연출가의 입장에서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화적 언급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론 하워드는 대충 지나쳤다. 안이한 연출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니에르가 소피의 친할아버지였던 원작과는 달리, 극중 소니에르는 소피와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이 예수의 후손을 보호하기 위한 시온 수도회의 수장으로만 설정됐다. 그러니 봉인된 크립텍스의 암호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상세히 묘사됐던 할아버지와 손녀의 애틋한 관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라 왕족이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 후손이 살아있다, 고위 성직자들은 그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월트 디즈니의 경우 성배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일한 사람이었다는 등, 영화 <다빈치 코드>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분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가 걱정하듯 영화가 주는 충격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흔들 수 있을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인지부조화 이론’ 챕터를 읽다 보면 보수적 기독교 단체들의 걱정이 한낱 기우임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초반 미국의 한 사이비종교 교주가 중대발표를 한다. 자신은 수호신들로부터 신탁을 받았는데, 조만간 큰 홍수가 날 것이고 진짜 신도들만 홍수 전날 자정에 비행접시로 구출될 것이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그 종교의 열성 신도들은 직장을 정리하고 퇴직금을 이 종교단체에 기탁했다. 그들은 자신들만 구원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 애썼다. 마침내 지정된 구원의 날 자정, 모두들 모여서 비행접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행접시도 오지 않았고, 홍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교주가 나타나서 다시 중대발표를 한다. “여러분들의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결국 전 세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실한 교도들의 믿음에 감동한 수호신들이 홍수로 지구를 멸망시키는 일을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 발표에 신도들이 반발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모인 사람들은 놀랍게도 기뻐하며 축제를 벌였다.

대체 왜 사람들은 이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였을까. 미네소타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레온 페스팅거 교수는 이 상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 ‘인지부조화 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사이비종교의 신도들은 이미 직장도 관뒀고, 저축했던 돈도 다 써버렸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도 땅땅 쳐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다 가짜였다.” 고 하자면 아주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느냐, 차라리 거짓을 받아들이고 안정된 삶을 누리느냐,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안정을 택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다빈치 코드>가 말하고 있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말하는 내용이 진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여전히 기존에 지녀왔던 믿음을 고수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반길 만한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우연의 법칙, 세상을 움직이는 열린 가능성의 힘』의 저자, 슈테판 클라인은 뇌의 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신경세포의 작용으로 뇌는 주변의 사물과 사건에서 일관된 틀을 인식하려는 강한 본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뇌는 상황에 맞는 것만 보려는 ‘선택적 인지’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명확한 근거가 없어도 어떤 이론을 믿고,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뇌는 상황에 맞는 것, 기존의 믿음 체계에 부합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는 보수적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스릴러가 주는 긴박함이 없다. 원작이 주는 인식의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원작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크립텍스의 모습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크립텍스의 실제적 질량감을 맛보려거든 영화를 보는 편이 낫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 쪽에 앉은 인물이 여자라는 사실,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친 듯한 색 배치로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또한 두 사람이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V자 모양의 공간이 생기는데, 이 V자는 성배와 잔, 여자의 자궁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을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강력한 영상의 언어로 보는 이를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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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트 가드너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랄프 파인즈 외 출연 / 대경DVD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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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오지랖이 넓은 아줌마가 있었다. 부녀방범위원회위원장, 청소년지도위원, 마을금고이사, 시장환경개선위원 등 그 아주머니의 명함은 이런저런 직함으로 빼곡했다. 육중한 덩치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누가 봐도 여장부였다. 남편은 꽤 큰 규모의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자에 비해 덩치도 작고 성격도 꽤 섬약했다. 여자는 그리 예쁘다고 할 수도 없는 외모에다가 고분고분하고 조신한 성격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더구나 집안 살림보다는 밖으로만 나대는 성격이라 어지간한 남자들이라면 짜증도 낼 법한데 이 섬약한 남자의 아내 사랑은 지극했다. 오히려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아내에게 던지는 눈길에는 누가 보아도 극진한 아내사랑이 묻어 있었다. 저 남자, 밤에 사내구실은 하는 거야, 라고 동네 남정네들이 비아냥거리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두 부부는 아무런 불협화음이 없이 행복하게 사는 눈치였다.

영화 <콘스탄틴 가드너>의 테사(레이첼 와이스)와 저스틴(랄프 파인즈) 부부를 보았을 때, 예의 그 부부가 떠올랐다. 저스틴은 도발적인 성격의 인권운동가다. 게다가 그녀의 자태를 보라. <미이라>에서 남성적인 터프한 액션을 보여주었던 그녀가 아닌가. 기네스 펠트로와 같은 연약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처음으로 저스틴을 만났을 때부터 테사는 공격적인 질문으로 저스틴을 곤경에 빠뜨린다. 그녀를 보는 저스틴의 눈은 빛난다. 필이 통하고 달콤한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강인한 여자와 섬약한 남자의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남자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다.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는 대책 없는 식물성이다. 피식자 앞에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야수의 이미지와는 한참 멀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초식성이다. 혈관 속에 초록의 피가 흐를 것만 같은 이 차가운 매력의 사나이의 직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교관이다. 외교부란 곳이 어떤 곳인가? 차가운 이성과 매너는 형식적인 외교문서에서나 통용될 뿐, 실제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외교의 공간이 아닌가. 저스틴과 같은 식물성의 인간이 동물적 파워가 지배하는 외교의 공간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도발적인 성격의 테사를 사랑하게 된다. 테사는 저스틴에게 아프리카행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녀의 결혼은 아프리카로 가기 위한 정략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는 도발적이고 다소 공격적이기까지 한 그녀에게는 적격의 장소다.

야생의 땅, 아프리카에서도 저스틴은 정원을 가꾼다. 엄격하게 말해서 정원은 자연이 아니다. 정원은 끊임없이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가지를 쳐내고, 잡초를 솎아내고, 해충을 잡고, 정원사는 끊임없이 정원을 손질한다.(이쯤에서 영화 제목이 왜 ‘Constant Gardener’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야성적인 성격의 테사는 인공 자연인 정원이 마땅치가 않다. 그녀가 꿈꾸는 곳은 야생이 살아 숨 쉬는 아프리카의 대륙이다.

<시티 오브 갓>에서 70년대 브라질 빈민촌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미성년 갱단의 문제를 현란하게 담아냈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영상은 <콘스탄트 가드너>에서도 여전히 눈부시다. 그러나 그 눈부심은 초원과 정글의 현란함이 아니다. 극악한 아프리카의 현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영상 속에서 미학적 색채를 짙게 드리운다. 회화를 포함한 고통의 재현물이 과거에는 도덕적 내지 교훈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혁명이 일어난 후 고통의 재현물은 미적 욕망의 대상으로 변모됐으며, 그 결과 고통은 하나의 소비 대상 내지 스펙터클로 전락하게 됐다는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의 지적이 떠오르긴 하지만 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미적으로만 재현하지 않는다. 기름이 떠 있는 폐수 속에서 먹이를 쪼아대는 닭, 철길 주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빈민가의 풍광, 투르카나호의 철새 떼의 장면 등 그의 영상은 케냐의 빈민가를 미학적으로 재구성해놓으면서도 현실의 참담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프리카의 고통스런 현실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을 겉으로 표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멜로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이 영화의 축은 분명히 테사와 저스틴의 사랑에 있다.

테사는 남편 뒷바라지만을 하는 현모양처가 아니다. 활동적인 그녀는 앰네스티의 일원으로서 에이즈가 만연한 아프리카에 제공되는 약품 뒤에 숨겨진 모종의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테사는 저스틴의 동료를 통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인간 모르모트로 사용해 약물실험을 하고 있는 제약회사의 부정을 정부에 알리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죽임을 당한다. 테사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저스틴은 자신이 더 이상 ‘성실한 정원사’로 남을 수 없음을 자각한다.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고, 가지를 쳐내는 것만으로는 생명을 북돋울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작은의사[小醫]’는 사람을 구하지만 ‘큰의사[大醫]’는 세상을 구한다고 하지 않던가.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저스틴은 세상의 정원사로 탈바꿈한다. 테사가 사라짐으로써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저스틴은 소극적이고 식물적인 삶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저스틴으로 분한 랄프 파인즈가 러셀 크로우나 실베스타 스텔론이 될 수는 없는 법.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저스틴의 행동은 랄프 파인즈가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구축한 이미지의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뭇 여성들의 모성적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랄프 파인즈의 표정이 아니고서야 대체 그 어떤 누가, 상처받은 남자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을까. 군살이 없는 육체, 오똑한 콧날과 서늘한 눈매를 가진 이 배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분석심리학자 이부영은 그의 저서 『그림자』에서 “우세한 의식의 태도나 기능은 그 반대극의 무의식의 태도나 기능에 의해 보상된다. 내향형의 사람이 지나치게 내향적 태도에 집착하면 무의식에는 의식에서 배제된 외향적 경향이 억압되어 의식과는 상반된 경향을 띠게 되고 그러한 의식의 일방성이 지속되고 외향적 경향의 억압이 계속되어 활동하지 못하면 무의식의 외향적 경향은 미분화된 열등한 상태에 있게 된다”라며,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감추진 열등한 인격인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으면 인간의 전체적인 정신을 실현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저스틴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열등인격을 구현하고 있는 여성상, 즉 당당한 남성적 이미지를 가진 여성상이었다. 저스틴은 테사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반대로 테사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열등인격을 구현하고 있는 남성상, 즉 섬세하고 섬약한 이미지를 가진 남성상이었다. 테사는 저스틴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테사의 그림자가 저스틴이었고, 저스틴의 그림자가 테사였던 셈이다. 부족한 여성성을 테사는 저스틴에게서 수혈 받았고, 저스틴은 자신의 부족한 남성성을 테사에게서 수혈 받았다. (서두에서 말한 오지랖 넓은 아줌마 부부의 예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서로는 서로에게서 그림자였던 셈이다. 둘의 사랑은 운명이었던 셈이다.

테사의 죽음을 계기로 저스틴은 정글의 세계, 남성의 세계, 힘의 세계로 뛰어든다. 진정한 외교의 세계로 뛰어든 셈이다. 그의 무의식 속의 그림자, 그의 열등한 인격인 남성성을 스스로 구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영화는 본질적으로 액션스릴러가 아니고, 랄프 파인즈는 복수를 꿈꾸는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우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잉그리시 페이션트>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로 그것이 <콘스탄트 가드너>라는 영화의 매력이고, 랄프 파인즈의 매력이다. 모든 영화가 웅변일 수는 없다. 랄프 파인즈의 한숨에 가슴을 저며 보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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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 SE (2disc) - [할인행사]
볼프강 피터슨 감독, 커트 러셀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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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최대로 늘리고 손해는 최소로 줄이는 것이 이른바 ‘경제적 동물’들의 행동강령이다.  이 극단의 동물들은 타인의 손해를 최대로 늘리고 이익은 최소로 줄이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면 그 행동은 윤리적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바람직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냉혹한 자본주의적 현실이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만은 예외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내 가족은 살리겠다는 숭고한 ‘가족주의’를 보라. 새조차 자신이 적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처에 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경계음을 낸다. 영화 <포세이돈>에서 로버트(커트 러셀)는 그의 딸 제니퍼(에미 로섬)를 살리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모든 유전자는 생명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자손을 남기려는 이기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체는 그것을 위해 이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미 로버트의 유전자는 그의 딸, 제니퍼에게 전해졌으므로 로버트가 죽든 말든 유전자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딸을 위한 그의 희생도 사실은 유전자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리처드 도킨스는 설명한다. 유전자의 입장으로 인간을 볼 때, 인간은 하찮은 전달자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입네, 이성적 존재입네 떠들어 대지만 결국 유전자의 ‘탈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영화 속의 프로 도박사 존 딜런(조쉬 루카스)의 행위는 『이기적 유전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도박이 뭔가. 돈이 되면 배팅을 하고 돈이 안 되면 패를 거둬들이는 것이 도박의 상식이다. 자신의 이익은 최대로 늘리고 타인의 이익은 최소화하는 것이 경제적 동물의 합리적 행위가 아닌가. 그런데 이 한심한(?) 도박사의 배팅은 어찌된 것인지 거꾸로 간다. 돈이 안 되는 배팅을 수시로 한다는 것이다. 자신과 피 한 점 섞지 않은 사람, 자신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타인을 위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존 딜런의 행위는 아무래도 수상쩍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에 빠진 아이를 살리는 것도 그 아이의 엄마의 환심을 사기 위한 플레이보이의 전략적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의 이타적 행위를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이론이 『이타적 유전자』의 "반복호혜성"이라는 가설이다. 매트 리들리는 이 책에서 친족관계가 아니더라도 반복해서 서로 혜택을 베풀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례로 흡혈박쥐의 경우, 피를 넉넉히 섭취한 박쥐가 피를 게워내서 굶주린 박쥐에게 피를 공급해주는데, 어떤 박쥐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 그에게 도움을 주는 박쥐는 그가 과거에 도움을 주었던 박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 딜런이 가녀린 여인과 그녀의 아들에게서 과거에 도움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미시간 대학의 대니얼 크루거 박사 등 연구진은 휴먼 네이처지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 보고서에서 현대의 남성은 옛날처럼 완력을 과시할 필요가 없어진 대신,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물질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느라 기력을 쏟아 수명이 단축된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숫양들이 서로 머리를 들이 받으며 싸우고 수컷 새들이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등, 암컷을 차지하기 위한 행동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된다면서 막 성년기에 이른 13살 무렵 침팬지들의 사망률이 갑자기 높아지는 현상을 예로 들었다. 개체에게는 손해가 되더라도 결국 유전자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고 보면, 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엔 남성이 매력적인 여성의 마음을 끌기 위해 다른 원시시대처럼 몽둥이를 들고 경쟁자들과 몸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지만 성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 자체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크루거 박사는 "몽둥이 싸움에서 이기는 과거의 능력은 지금은 멋진 SUV 자동차를 살 수 있는 능력으로 대체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력도 없고, 믿는 것은 몸뚱이밖에 없는 영화 속의 존 딜런 같은 경우는 어찌해야 이런 경쟁에서 매력적인 암컷을 얻을 수 있을까.

바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기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박의 패를 던지지만, 때로는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건달. 이런 건달 앞에서 여자들의 마음은 속수무책이다. 선수도 프로 선수다. 재앙영화는 이런 프로 선수, 달리 말해 영웅을 만들어낸다. 쪼잔하게 돈이나 가족에 얽히지 않는 영웅. <특전 U보트>와 <퍼펙트 스톰>으로 위험을 제조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볼프강페터슨은 이 영웅에게 끝없는 고행을 강요한다. 이 영웅에게는 카리스마도 없고, 근육질의 남성미도 없다. 그러나 배팅 실력만큼은 내로라하는 영웅에 뒤지지 않는다. 날건달 하나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위험 속으로 뛰어들 때, 이런 대책 없는 사내 하나를 보는 여성들은 환호한다. 그런 영웅을 보는 것만으로 영화의 본전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족 하나! 포세이돈이 누군가? 바다의 신이요, 물의 신이다. 볼프강 페터슨이 북대서양에 띄운 유람선의 이름이 ‘포세이돈’이다. 신 앞에서 겸양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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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SE 골든 라벨 한정판 (2disc)
필립 카우프만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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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의 아파트에 테레사가 처음 찾아 왔을 때, 이 촌스런 여자의 배에서는 돌연 꾸르륵 소리가 난다. 로맨틱한 순간에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더구나 상대는 명색이 엘리트 의사 아닌가. 변두리에서 여급 생활을 하던 테레사는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다. 로맨스의 법칙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비어져 나오는 소리 앞에서 그녀는 속수무책이다. 이념과 국경을 초월하는 사랑도 몸에서 터져 나오는 구호를 막을 수 없다. 쿤데라는 꾸르륵 소리가 나는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만다.’ 사랑의 환상이 깨질지 몰라 불안에 떠는 테레사를 바람둥이 토마스는 가볍게 안아준다. 바람둥이라고 자처하는 토마스도 따지고 보면 ‘프로 바람둥이’는 못 된다. 바람둥이의 무기가 무엇인가. 비정함이다. 한 군데 미련을 둘 만큼 자비심이나 동정심이 많지 않아, 라고 말할 때 이 둥지에서 저 둥지로 거처를 옮겨가는 바람둥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토마스는 테레사에게 연민을 가진다. 괜찮아. 불안해 할 것 없어. 그의 동정심이 그를 테레사에게 주저앉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 한 <프라하의 봄>에서는 이 장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고성능 음향장치를 쓴다 해도 배 속에서 나는 소리를 잡아내기란 어렵다. 설령 잡아낸다 할지라도 영화적 분위기는 깨진다. 엽기적 상황을 연출해가면서 리얼리티를 살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감독은 궁여지책으로 테레사로 하여금 재채기를 하게 한다. 원작이 살짝 비틀리는 순간이다. 감기에 걸리셨군요, 자, 의사인 제가 진찰을 해볼까요. 자, 웃옷을 벗어봐요. 영화는 각색을 통해 바람둥이 토마스에게 ‘작업’할 기회를 준다. 그러나 소설은 포옹의 순간, 육체에서 비어져 나오는 소리를 분석하는 데 무려 두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 장광설을 지루하게 읽어내느니 영화 한편 때리는 것이 낫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소설이다. 어떤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서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나름대로 재미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다.

테레사와 토마스가 바에서 만나는 순간을 상기해보라. 책을 읽고 있는 토마스에게 역시 책을 읽고 있던 여급인 테레사가 다가간다.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은 책이다. 소설은 이 대목을 이렇게 말한다. ‘테레사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특히 소설들. 그녀는 필딩에서 토마스만까지 무더기로 소설을 읽었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적 도피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에게 책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는 도구였다. 영화에서 책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소설에서는 비루한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양탄자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친절한 내레이션이 없다.

『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 역시 ‘모든 독서는 출애급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이곳’에 만족하는 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어떤 결핍, 어떤 허기를 메우려는 충동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눈을 돌리게 한다. 테레사는 끊임없이 책으로 눈을 돌린다. 책은 ‘토마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었다. 키냐르는 ‘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라고 고백한다. 지금 이곳이 충분하다면 왜 다른 세상과의 접속을 꿈꾸겠는가. 비루한 삶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테레사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토마스를 만났다. 그녀에게 토마스는 출애급의 모세였다. 그러나 테레사가 유일신으로 섬기는 남자는 테레사만을 섬기지 않는다. 바로 그 사실이 테레사를 무겁게 한다. 그녀는 결코 사랑 앞에서 사비나처럼 쿨할 수 없다.

사비나는 화가다. 그녀는 풍족하지는 못해도 경제적으로 얼마든지 독립이 가능하다. 그러나 테레사는 다르다. 늘 불안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남자, 사랑과 섹스를 별개로 아는 남자 앞에서 그녀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테레사는 토마스를 움켜쥐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탐욕과도 다르고 소유욕과도 다르다. 비루한 삶을 살아온 그녀의 역정이 움켜쥔 지푸라기를 속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모질다.

영화에서, 토마스와 혼곤한 정사를 치른 날 새벽, 그의 손을 꼬옥 잡고 잠에 들어 있는 테레사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는 토마스는 그녀의 손에 슬그머니 책 한 권을 쥐어준다. 세심한 관람객이라면 책의 제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다. 원작 소설에 없는 설정이다. 당신이 붙들고 있는 나는 믿을만한 언덕이 못돼. 진정으로 당신이 기댈 언덕은 바로 책이라고. 나를 쥐지 말고 책을 쥐어. 그 장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와 소설의 전개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테라사의 손에 쥐어주는 각색이 센스 있다.

소설에서는 토마스가 왜 여러 여자를 섭렵하는지를 긴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한다. 육체적 사랑이란 똑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상상하지 못하는 몇 퍼센트의 부분이 남게 마련이라는 것이 토마스의 주장이다. 자아의 유일성은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는 것,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백만 분의 일의 상이한 점과 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의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 토마스는 바로 그 백만 분의 일을 발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백만 분의 일의 상이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오로지 섹스에서뿐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둥이 토마스에 대한 쿤데라의 변호다. 유일무이한 한 인간의 구체성을 찾아다니는 이 바람둥이의 적은 누구인가. 바로 전체주의다. 인간의 개별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폭력은 혁명의 유효한 수단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개별성을 무시하고서는 어떤 섹스도 없다. 섹스는 그 개별성에 대한 탐닉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의 상대는 언제나 구체적인 개별자다. 그만의 독특한 체취와 느낌 없이 어떻게 섹스를 상상할 수 있는가. 쾌락이란 그 독특함에 대한 탐닉이다. 그 독특함을 수집하러 다니는 바람둥이 토마스에게 뉘앙스를 허락하지 않는 혁명은 달갑지 않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자신의 죄악을 모른다. 설령 자신의 죄악이 알려지더라도 그들은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는다. 대충 얼렁뚱땅 넘어간다. 그러나 토마스는 바람둥이기는 하지만 속물은 아니다. “반성과 참회를 모르는 혁명과는 타협할 수 없어.”라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바고도 의사이고 토마스도 의사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지바고가 따스하다면 토마스는 날카롭고 차다. 지바고와 토마스가 똑같이 매력적이지만 토마스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은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선과 악이 토마스를 껴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공동의 선(善)을 추구한다는 미명 하에 일체의 일탈을 반혁명적으로 엄단하는, 유머감각을 잃은 혁명, 이념적 무거움만을 좇아서 일체의 유희정신을 반동으로 몰아가는 혁명에 토마스는 몸으로 항거한다. 바람둥이, 그것은 토마스의 스타일리시한 반항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동그라미들을 ‘원’이라는 기호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기하학적 정신에 섬세의 정신은 저항한다. 섬세의 정신이 저항을 통해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개별자들의 구체성이다. 니체는 ‘추상은 구체에 대한 폭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개별자의 취향과 컬러를 무시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전체적이고 폭력적이다. 개별자들의 주검 위에 얻어진 어떤 혁명도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토마스는 몸으로 말한다. 수많은 여자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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