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중단하라 서해클래식 15
토마스 홉스 지음, 신재일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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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가의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타이타닉호처럼 커다란 배가 빙산에 부딪혔다고 가정해보자. 배 안은 서로 살아남으려는 탑승객들의 이기적인 생존본능 때문에 이른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대혼란이 야기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때 힘 있는 자가 앞에 나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평하게 규칙을 정하고 조난 작업을 지휘한다면 탑승객들은 기꺼이 그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자발적으로 그의 통제와 명령에 따를 것이다. 바로 이 힘 있는 자가 홉스가 말하는 절대권력, 즉 리바이어던(Leviathan)이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무적의 수중괴물로 국가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며, 청교도혁명이 한창이던 1651년 출간된 홉스의 저서 이름이기도 하다.

 청교도 혁명은 1642~1660년에 영국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찰스 1세의 절대주의 강화를 둘러싸고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벌어진 내란이다. 피를 부르는 내전은 생존투쟁을 위한 정글의 상태를 방불케 하였다. 이 싸움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가 홉스의 관심사였다. 홉스의 답은 ‘계약’과 ‘동의’였다. 개인들이 자신의 욕구와 의지를 군주에게 위임하기로 계약하고, 자발적으로 통치에 따른다는 것이다. 조난의 위기에 처한 탑승객들이 힘 있는 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그의 통제와 명령에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힘 있는 자가 곧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에 기인한 무질서를 평정하고, 인신의 보호와 평화라는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통치권으로서의 국가, 즉 리바이어던이다. 그 이전까지 유럽에서의 통치권은 신이 내린 것이었다. 당연히 교회는 홉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의회파 역시 국가를 괴물로 비유한 홉스를 따돌렸다. 그러나 홉스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과 정부 구성의 원리를 사회계약론 위에 세운 최초의 근대 정치 철학자로 평가된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두 가지 중요한 권리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묵비권과 양심적인 병역 거부의 권리가 그것이다. 이 두 권리에 대한 보장 없이는 국민들의 안정과 보호에 대한 보장도 없는 것이며, 국민들의 안전과 보호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이는 국민과 통치자 사이에 맺은 ‘계약’ 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21장에서 홉스는 “통치자에 대한 백성의 의무는 통치자의 힘이 지속적으로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만 유지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경우, 스스로를 보호할 선천적인 권리는 그 어떤 계약에 의해서도 폐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홉스는 시민들에게 국가에 일방적으로 헌신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개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원할 때는 언제나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시민들의 자연적인 권리라고 홉스는 주장한다. 그는 “만약 어떤 백성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거나, 그의 인격이나 생활수단이 적에게 감시를 당하고, 승자에게 복종하는 조건 아래 생명과 신체적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에게는 그와 같은 조건을 수락할 자유가 있다. 그 조건을 수락한다는 것은 자신을 사로잡은 자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국가에 우리 자신의 권리를 양도할 때, 목숨을 지킬 권리마저 양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는 것, 국민을 무시하고는 국가의 정당성을 세울 수 없다는 홉스의 주장은 국민의 위상을 높이고 자유민주주의의 확산에 데 크게 기여하였다. 홉스의 주장대로 국가가 국민들과의 계약과 동의의 산물이라면, 국민은 일방적인 충성이나 거부만으로 국가에 대한 태도를 정할 수 없다. 무엇에 동의하고 무엇에 동의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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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통합논술 多지식 세계명작 10
빅토르 위고 지음, 서지원 엮음, 정금석 그림 / 대교출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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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법, 무엇을 위한 법인가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곧잘 “그런 법이 어디 있어?”라는 표현을 쓴다. 법은 공평해야 한다는 우리들의 무의식적 요구가 반영된 표현이다. 특정 계급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법, 강자에게만 이익이 되는 법은 마땅히 재검토되거나 폐기되어야 옳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기치를 내걸었던 프랑스 대혁명은 바로 특정 계급의 시녀로 전락한 구체제와 구법(舊法)을 청산하기 위한 시민들과 민중들의 봉기였다.

 『레미제라블』의 소설적 무대가 된 1789년 7월의 프랑스대혁명 당시, 각종 특혜를 누리던 성직자와 귀족들로 대표되는 구체제의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었다. 영국과의 교역 실패로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였고, 미국의 독립전쟁 지원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은 바닥나 있었다. 흉작과 물가의 폭등으로 인한 민중들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다.  정의와 평등은 어디에도 없었다. 귀족과 성직자들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해주는 구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 날품팔이 노동자 장발장은 누이동생과 조카 일곱을 부양하고 살면서 배고픔 끝에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의 선고를 받게 된다. 장발장은 남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여 틈만 있으면 탈옥을 시도하다, 13년 만에 만기 출옥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던가. 출옥 후 장발장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밀리에르 신부의 은그릇을 훔치지만 밀리에르 신부는 그를 용서한다. 용서의 힘은 컸다. 장발장이 ‘마드렌느’라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의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자베르’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의 신념 하에서는 장발장은 여전히 처벌받아야 할 한 사람의 죄인일 따름이었다. 자베르는 구법(舊法)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발장을 뒤쫓는다. 장발장이 어느 소도시의 시장이 되었을 때 자베르는 장발장의 과거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그가 과거에 탈옥수였다는 것을 공개하려고 한다.그때 마침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장발장을 존경하던 청년대원들은 자베르를 붙잡아 그를 총살시키려 한다. 그의 총살을 말리는 장발장에게 자베르는 그 이유를 묻는다. 이때 장발장은 이렇게 대답한다.“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소. 바다가 땅보다 더 넓고 하늘은 그보다 더 넓소. 그러나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이오.” 

 용서를 외면하는 법, 사랑과 관용을 모르는 법,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해주는 법, 현실에 존재하는 민중들의 고통과 한숨을 보지 못하는 법,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는 약자들의 항변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법을 의심하지 않는 존재가 곧 자베르 경감이다. 그러나 장발장은 자베르를 용서한다. 자베르는 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용서를 구한다.    

  『레미제라블』의 서문에서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쓰고 있다.“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의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한, 가난에 의한 남성의 타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과 같은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가 고쳐지지 않는 한,  어떤 지역에서도 사회적 진실이 통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하자면, 더욱 넓은 의미에서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존재하는 한,  이 책과 같은 성격의 책들이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법의 공평성이란 따지고 보면 더 많은 사람을 껴안으려는 관용과 사랑의 정신의 발로다. 어떤 시도도 이 원칙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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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마르틴 부버 지음, 김천배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7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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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산업사회에서 현대인들은 과학기술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몇 세기 전의 사람들에 비해 결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물질 중심 문화는 물질 추구에 대한 강박증을 초래하고 있으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현대인들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있다.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현대사회의 이러한 비극적 상황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데서 오는 것으로 보고, 인간회복을 위해서는 ‘나와 너’의 참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버에 의하면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두 가지의 주요한 태도는 ‘나-그것’의 관계로 표현되는 사물세계와 ‘나-너’의 관계로 표현되는 인격적 만남의 세계이다. 따라서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인간 삶의 양상도 달라진다.

  ‘나-그것’의 세계는 경험과 인식과 이용의 대상이 되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사람들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다. ‘나’와 ‘너’와의 참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나’와 도구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뿐이다. 그 만남은 차갑고 냉담한 만남이다. 그 만남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114 다이얼을 돌려보라. 친절한 목소리가 당신을 반길 것이다. 전화번호 안내가 끝나면 전화기 속의 목소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 아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인사일 뿐이다. 바로 이런 관계가 이른바 ‘도구적 관계’이다. 마르틴 부버의 표현을 빌면 ‘나-그것’의 관계다.

  경제적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본가는 노동자를 인격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생산의 한 요소로 생각한다. 생산현장에서 노동자의 성격과 취향과 개인적 처지를 하나하나 고려하는 것은 오히려 생산의 능률을 떨어뜨리는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경우 가급적이면 노동자를 추상화된 단위로 차갑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냉담함’이 ‘나-그것’의 관계를 이루는 정서다.

 사물을 대할 때 이런 냉담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세계를 경험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그것’을 대상으로 소유하고 이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때의 세계는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일 뿐, 경험하는 주체와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인격적 존재를 대할 때 이런 냉담함은 문제가 된다. 나는 나의 욕망대로 사물은 소유할 수 있지만, 나의 욕망대로 타인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 또한 욕망의 소유자이고, 타인 또한 스스로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추구권은 나와 타인, 모두에게 동일한 권리이다. 나만의 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사물을 부리듯 사람을 부릴 수는 없다. 사람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자유의 유무다. 자유는 외부에 얽매이지 않음이다. 외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말미암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스스로에게서 말미암을 수 있는 능력은 사고력, 즉 판단력과 이성에서 온다. 정신지체자, 알콜중독자, 약물중독자처럼 이성적 사유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사물을 대하듯 부린다면 인권침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칸트는 “자기와 남의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대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우하라는 말이다. 마치 도구처럼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사용자는 피고용인을 자신의 이익을 달성해줄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매춘이 버젓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보면,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이 목적으로 대우받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적어도 매춘에 있어서는 타인을 ‘내’ 욕망을 실현시켜줄 도구로서의 ‘그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맺는 타인과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경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파출부, 운전사, 배달부와 ‘나’와의 관계는 내 인격을 모두 드러내놓고 맺는 ‘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일정 부분만 드러내놓고 맺는 ‘나-그것’의 관계다. 이러한 ‘나-그것’의 관계가 도구적 관계다.

 이 관계는 차가운 관계다. 정서적 교류가 없고,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겪는 소외감도 바로 이런 차가운 관계에서 비롯된다. 세일즈맨은 차가운 관계의 상징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하지만 그들과 진정한 정서적 교류를 하지는 않는다. 나의 쓸쓸함을 토로할 수도 없고, 나의 기쁨을 나누어 가질 수도 없다. 항상 고객들에게 친절한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바로 그것이 이른바 ‘감정노동’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는 감정노동이 얼마나 피로한 노동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진정한 관계는 ‘나-너’의 관계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않고 목적으로 대우하는 관계요, 사람을 사물이나 도구로 대하지 않고 인격으로 대하는 관계이며, 사람을 부분이나 요소로 생각하지 않고, 그의 모든 면을 고려하는 관계다. 이런 관계에서는 사람은 더 이상 생산의 한 요소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낱 이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과연 대한민국의 모든 병원들이 환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운영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병원의 경영난을 생각해서 의사는 환자에게 고가의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해볼 수도 있다. 굳이 그 의약품이 아니더라도 그보다 저렴한 대체 의약품이 있는 경우에도 고가의 의약품을 권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이른바 ‘과잉진료’다. 의사로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신발 장사는 필요한 만큼의 신발이 있는 사람에게 새 신발을 권하고, 옷 장사는 입을 수 있는 만큼의 옷이 있는 사람에게 새 옷을 권하듯 모든 영업 행위자들은 소비자에게 필요 이상의 ‘과잉’을 권유하는 법이다. 의사는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자선사업가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죄악이 아닌 이상 영리를 목적으로 과잉을 권하는 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라고. 그러나 과잉진료에서 환자는 병원의 영업이익을 실현시켜줄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과잉은 도처에 넘쳐난다. 비단 병원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환자는 수단이 될 수 없다. 마르틴 부버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너’의 관계에서 ‘나’와 ‘너’는 서로 전존재를 기울여 전인격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관계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다.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고받음’의 관계다. 모자지간을 생각해보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머니 또한 아들로부터 정서적 만족을 얻는다. 아들 또한 어머니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연인의 관계가 바로 상호적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가 있음으로 해서 ‘너’의 기쁨이 있고, ‘너’가 있음으로 해서 ‘나’의 기쁨이 있다. ‘너’는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일무이한 ‘너’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아들이 정신적으로 미숙하다고 해서 교체를 원하는 부모가 있겠는가. 사람은 사물이나 도구와 달리 ‘대체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나-그것’의 관계에서의 ‘나’와, ‘나-너’관계에서의 ‘나’는 서로 다르다. ‘나-그것’의 ‘나’는 내 욕망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이지만, ‘나-너’의 관계에서의 ‘나’는 내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아울러 생각하는 인격적 존재다. 

  이처럼 부버는 관계의 개념으로 인간의 위치 및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참다운 인간존재는 고립된 실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형성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부버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관계를 통해 그의 실존을 형성해 나가는 창조자로 파악된다. 즉 그는 그의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사상을 ‘인간실존의 기본적인 사실은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나-그것’의 관계에서 대화는 없다. 대화는 오히려 능률과 효율을 저해한다. ‘나-그것’의 관계에서의 미덕은 오직 효율성과 생산성일 뿐이다. 상업적 거래에서 상대편의 사정을 고려해서는 오히려 거래를 그르칠 수가 있다. 거래하는 상품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말해야겠지만 거래당사자에 얽힌 사적인 정보는 불필요하다. 당연히 이런 거래에서 대화는 불필요하다. 우리들은 이렇게 대화적 관계를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부버에 의하면 현대인은 ‘나와 너’의 대화적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비대화적 관계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다. 고객과 세일즈맨의 관계가 바로 비대화적 관계다. 수많은 정보들이 교환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대화가 될 수 없다.

 세일즈맨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겠지만 그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라고 할 수 없다. 부버는 삶은 곧 ‘만남’이라고 보며 삶 자체를 만남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부버는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만남은 피상적인 것이며, 진정한 만남은 ‘나-너’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동의보감의 허준은 그의 스승인 유의태를 만나 뛰어난 명의로 거듭난다. 눈과 귀가 먼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났음을 상기해보라. 진정한 만남은 이렇게 존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부버가 지적하는 ‘나-그것’의 관계, 타인을 도구로서 대하는 관계는 우리 주위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미 사회에서 인간은 그의 인간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도구적 유용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그 하나의 사례다. 사용자는 피고용인의 인격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질을 가졌는가를 문제 삼는다. 당연히 그의 자격증과 토익점수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가 양심, 동정심과 같은 좋은 인격적 특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업이익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그가 고용될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다. 그것이 냉혹한 오늘의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의 평가는 그의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도구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인간은 인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품이다. 소외는 바로 인간의 상품화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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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스팟 - 내가 못 보는 내 사고의 10가지 맹점
매들린 L.반 헤케 지음, 임옥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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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무지한가

블라인드 스팟/매들린 L. 반 헤케/다산초당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맹점)’은 자동차 사이드미러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말한다. 수많은 자동차 사고의 원인이 되는 블라인드 스팟은 자동차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자기계발전문가인 매들린 L. 반 헤케 박사는 그의 저서 『블라인드 스팟』에서 인간이 사물이나 세계를 인식하는 데도 수많은 블라인드 스팟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가령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파도 소리를 듣지 못하고, 향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향수 냄새를 맡지 못한다. 또한 성경의 구절대로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저자는 블라인드 스팟의 원인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이로 인한 폐해는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이나 국가의 차원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즉 맹점은 익숙한 사고방식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습관화된 일상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한다. 우리의 감각은 익숙한 자극은 무시하고 새로운 자극을 먼저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자주 접하는 것은 금세 익숙해지기 때문에 습관화된 것을 새롭게 경험해보라고 충고한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신입사원들은 기존의 직원들이 너무 익숙해져 보지 못하는 회사의 특정한 면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신입 사원들이 타성화된 사고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성화된 시각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관점을 버리고 타인의 관점을 취하라고 저자는 권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나 낯선 세계를 접해보는 모의체험도 편협한 주관성을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다. 특히 영화와 문학과 그림과 같은 예술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해 자신의 맹점을 극복해줄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피카소의 명작 중의 하나인 <황소 머리>는 예술가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작품의 소재는 쓰레기장에 버려진 자전거의 안장이다. 사람들이 쓰레기장에서 이 사물을 보았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자전거의 잔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피카소는 그런 선입견을 버렸다. ‘자전거’, ‘안장’과 같은 타성화된 언어로 사물을 이해하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사물의 형상만을 주시한 결과, 거기에서 황소 머리의 형상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물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곧 예술가의 눈이다. 맹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물을 패턴화하려는 경향, 즉 유사성과 차이점을 근거로 해서 사물을 분류하려는 습성은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이지만 이런 범주화의 경향이 맹점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범주화하기 위해 분류하는 과정에서 대상들의 한두 가지 특징에만 초점을 맞춘 채 상호간의 다른 차이점들은 모두 무시하기 때문이다. 각 집단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점들을 무시한 채 이들을 함께 묶을 만한 공통점 중심으로만 환원시키다 보면 훨씬 더 다양성을 지닌 개별 구성원들의 특징이 묻혀 버린다. 범주화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범주를 바꾸어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꿉장난하는 아이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하찮은 돌멩이도 자동차가 되고 가구가 되기도 한다.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범주화된 시각으로부터 아이들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을 진보주의자니 보수주의자니 하는 이름으로 그들을 간단하게 분류해버린다. 개인의 정체성을 집단의 정체성으로 대체하려는 이런 태도는 한 사람의 개별성을 보지 못하는 맹점을 만들어낸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보편적 생각을 의심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무지에 대한 불감증을 초래하기도 한다.

   왜 우리가 무지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이 책의 서술은 다소 산만하지만 내 인식의 함정을 되짚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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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역습
마크 롤랜즈 지음, 윤영삼 옮김 / 달팽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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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크 롤랜즈는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주장한 ‘평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을 들어 동물들의 권리를 옹호한다. 그의 논점을 요약해보자. 만약 당신이 남성이 될지 여성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면, 당신은 여성차별이 존재하는 사회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여성이 될 가능성이 50퍼센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차별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당신이 인간인지 다른 동물인지 모른다면, 미각적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을 원하겠는가? 몇몇 과학자들이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실험실에서 당신을 고문하고 죽이는 상황을 원하겠는가? 당신의 털이나 가죽을 벗겨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전기충격이나 가스로 죽이는 상황을 원하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종(種)에 속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상황에 처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현실세계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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