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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ㅣ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을 꿈꾼다.
대담/휴머니스트/도정일, 최재천/2005
제나라에 사는 석(石씨) 성을 가진 목수 하나가 신상(神像)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는 큰 나무를 발견했다. 나무 그늘이 얼마나 큰지 소 수천 마리가 누울 수 있을 만큼 자리가 넉넉했다. 하지만 목수는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의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이렇게 크고 좋은 목재는 처음 보았습니다. 한데 스승님께서는 왜 그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으십니까?" 목수는 대답했다. "저 나무로 배를 만들면 물에 가라앉을 것이고 관을 만들면 금방 썩을 것이네. 그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지. 그래서 아무도 베지 않고 나무도 장수하면서 그렇게 높이 자란 걸세.“ 쓸모없는 것이 오히려 쓸모가 있다는 이른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역설을 장자는 우화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이내 썩어버리는 나무는 당장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보자. 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면 그 나무는 풍성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을 쉬게 하고 곤충들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뿐인가. 나무는 멋진 경관의 일부가 되어주고, 신성한 산소를 공급해 삶에 활력을 부여한다. 경제적인 효율성이라는 ‘눈 앞의 쓸모’만으로 그 나무를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쓸모없는 나무의 비유는 인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심장한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목수의 제자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때만이 사물은 존재가치가 있다는 실용적 관점을 대변한다. 자본주의의 현실에서는 바로 이런 실용적 관점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한다. BK21 사업에서 인문과학의 초라한 예산 배정에 비해 자연과학분야나 공학분야에 천문학적 예산이 배정된 것도 이런 현실을 말해주고, 의학이나 법학과에 고득점자들이 몰리는 현상이나, 실용서들의 강세와 인문서적들의 약세 또한 실용적 관점이 우리 사회의 대세임을 말해준다.
『대담』은 동물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최재천 교수와 영어학부 교수이자 문화연대 공동대표인 도정일 교수와의 대담을 묶은 책. 이 책에서 도정일 교수는 ‘눈앞의 쓸모’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효율성 만능주의 현실을 강도 높게 비난한다. “당장 시장에다 내다 팔 지식만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는 미래를 도살하는 나라예요....인문학의 기초가 없는 나라에서는 수준 높은 문화산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요." 도정일 교수 역시 인문학의 가치를 문화산업의 관점, 즉 실용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최재천 교수의 관점도 흡사하다. ”기초학문의 연구 성과는 아주 천천히 나타나지만 굉장히 위력적이죠. 가령 몇 십 년 동안 진행된 영국 옥스퍼드의 박새 연구나 케임브리지의 사슴 연구 등이 갖는 학문적․경제적 위력은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도정일, 최재천 교수는 전공과 관심 분야는 다를지 몰라도 중요한 하나의 공통점을 말하고 있다. 즉 당장에는 쓸모없는 것 같아 보이는 인문학이나 기초학문도 결국은 쓸모 있는 것이라는 것. 장자가 말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현대식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담』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를 모색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최재천 교수는 “학문의 경계란 자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자연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결국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구분 짓는 울타리를 넘어 서로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트랜스(Trans)‘‘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역설한다. 이에 도정일 교수는 ”’트랜스‘란 한 사람의 연구자가 다수의 전공영역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를 살찌우기 위해서, 혹은 연구대상에 대한 더 나은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 혹은 어떤 연구 대상에 대한 더 나은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 인접학문이나 다른 학문의 성과들을 부단히 조회․참조하고 원용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동의한다. 가령 심리학의 통찰을 빌려 인간의 경제행위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트랜스한 연구 경향의 한 예라는 것이다.
이에 최재천 교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며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라는 책을 소개하며 이 책이 자연환경이 문화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있고 폭넓은 분석을 해낸 것이라는 점을 들어 간접적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흥미롭게 시사해준다.
두 교수의 논쟁이 불을 뿜는 곳은 ‘유전자’를 주제로 하고 있는 제2장이다.
도정일 교수는 인간의 모든 행동과 행위 동기, 가치와 목표들이 생물학적․유전학적으로 다 설명될 수 없다면서, 생물학이라는 이름을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 것은 좋게 말하면 통합학문적 열정이고 나쁘게 말하면 생물학의 제국주의라고 말한다. 독자로서는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인간의 사회라면 적어도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규정하는 일련의 가치와 규범, 기준에 인간이 눈을 뜬 것은 자연스런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이기보다는, 구태여 진화라는 말을 쓰자면 사회적 진화의 결과죠. 사회적 진화는 정치적․사회적 선택, 한마디로 ‘문화적 선택’의 결과”라고 도정일 교수는 단언한다. 그러나 문화적 선택도 생물학적 토대 위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에 최재천 교수는 유전자만 가지고 생명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견해를 르원틴 교수의 책 『3중 나선』을 들어 설명한다. 유전자․ 생명체․환경 등의 세 가지의 상호작용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이렇게 『대담』은 논쟁을 통해 논점들에 깊이를 부여하고, 인문학적 사유에 풍성함 질감을 확보해준다.
인문학은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하는 학문이다. 르원틴의 주장대로 DNA가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DNA가 인간의 성향에 미치는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면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인문학도 생물학과 무관할 수는 없다. 또 인문학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인지심리학이나 뇌신경학, 인공지능 연구를 내 몰라라 할 수만도 없다.
“복잡다기한 사회 현실의 문제들을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참신한 학제간 연구 방법론의 개발에 소홀했으며, 새로운 사회적 요구와 수요가 반영되도록 인문학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겸허히 받아들인다.”라는 것이 고려대 인문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인문학이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학문간의 소통으로 학문의 외연과 깊이를 확보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서 인문학의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대담』의 한 구절은 왜 학문간의 소통이 필요한지를 영감에 찬 소리로 말하고 있다. “진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 있다면 생명이란 가둘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한다는 겁니다. 그 어떤 힘도 생명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말하는 과학과 자유를 말하는 인문학에 대체 무슨 구별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학문간의 소통을 통해서 인문학이 새롭게 변모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이 책의 잠재적 독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