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김영민 지음 / 민음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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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식의 사람이 있고 지혜의 사람이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식으로 거칠게 분류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수재들은 전자에 속하겠고 몽테뉴와 소크라테스는 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동물학. 시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반면에 우리가 몽테뉴의 지적 편력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는 고작해야 『수상록』 정도다. 『수상록』은 장중하지 않다. 가벼운 이야기 거리다. 현학적 이론도 없고, 헤겔에서처럼 정교한 논리적 분석도 없다. 일이관지(一以貫之), 책 전체를 하나로 꿰뚫겠다는 추상(抽象)의 의욕도 없다. 혹자는 이를 두고 깊이가 없다거니, 사유의 두께가 얇다거니 혹평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런 혹평은 번지수가 틀렸다. 한 작가에게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이란 그 작가의 실존의 전 무게가 걸린 문제다. 몽테뉴라는 한 개인의 실존이 선택한 '가벼움'을 그의 지적 허약함이나 불성실의 문제로 따지려 드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얘기다. 몽테뉴가 누군가. 떠르르한 이론을 들먹이거나 거창한 담론으로 지적인 스케일을 과시해보겠다는 의도 따위는 그에겐 멀었다.

  "돌파구를 뚫고, 외교사절을 이끌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분명 눈부신 행위들이다. 하지만 꾸짖고, 웃고, 물건을 사고 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그대 자신과 더 나아가 그대의 식솔과 마찰 없이 공평하게, 그대 자신을 속이거나 게으르지 않고, 잘 어울려 사는 것보다 더 눈부시고, 또 드물고 어려운 일은 없다. 사람들이야말로 그렇지 않은 삶들 못지 않은 긴장과 무게로 각자의 직분에 충실하다."

 몽테뉴는 시정잡배들의 삶도 대언장어(大言壯語)를 구사하는 종교가와 정치가의 삶에 필적하는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박학다식이 정작 그 자신들에게는 어떤 소용이 있을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던가? 그것이 상식의 문지기에게 일어났던 불행을 덜어 주었는가? 논리학이 그들의 통풍(痛風)에 위안이 되었던가?"

 몽테뉴의 이런 발언은 독서의 지향점에 대해서 새삼스런 성찰을 제기한다. 한 선승의 죽음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죽음의 두려움을 상쇄하지 못한다면 그의 오랜 묵언정진(默言精進)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학문이 반드시 어떤 현실적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효용과 효율로 모든 사물의 가치를 재단하는 우리시대의 척도란 얼마나 용렬하기 짝이 없는 것인지. 그러나 지식이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면 몽테뉴의 이런 어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죽음이 닥칠 때 나는 양배추를 심고 있었으면 한다. 죽음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고, 미처 끝내지도 못한 정원 손질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담론은 결국 독배를 든 저 소크라테스 의 담대함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는 않을까."


 『형제라는 이름의 타인』(양혜영, 울림) 이란 책은 '형제란 무엇인가, 형제는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른가. 나는 형제에게, 형제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 신화와 문학과 역사, 과학을 아우르며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책에 대한 독서가 형제간의 분란을 진정시키는 데 얼마나 일조할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책의 백해무익을 강조하는 것 또한 어리석다. 문제는 이런 책이 주는 메시지를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용해시킬 수 있느냐일 것이다. 어쨌든 지적인 허기를 채워주는 책이 반드시 인간에 대한 밝은 눈뜸의 지혜를 마련해주는 것 같지는 않다. 형제에 대한 지식의 증가가 형제에 대한 연민과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몽테뉴는 말한다.

 "나는 어떠한 일로도, 심지어 그렇게 소중하다는 학식을 얻는 일로도 머리를 싸맬 생각은 없다.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만약에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부분을 곰곰 생각하느라 손톱을 물어뜯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한 두 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만약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

 이런 발언이 그리스와 로마 철학에 통달한 사람, 몽테뉴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조금은 엄살 같다. 즐거움을 안겨주는 독서를 지향했던 몽테뉴의 발언은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연상시킨다.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어떤 실용적 목적에 응답해야 할 의무감을 벗어버리고, 독서 그 자체에 몰입하는, 몽테뉴는 독서의 쾌락주의자인 셈이었다. 알랭드 보통의 『드 보통의 삶의 철학 산책』(정진욱 역, 생각의나무 ) 183 페이지는 몽테뉴가 매우 탐욕스런 독서가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편협한 지방주의나 종족주의의 편견으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역사서, 여행기, 선교사나 선장의 보고서, 다른 나라의 문학 등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탐독했다.

 저술의 난해함에 대한 몽테뉴의 비판도 눈여겨 볼 만한다.

 "개인적이거나 독특한 패션으로 관심을 끌려고 드는 것이 옹졸한 마음의 상징이듯이, 연설도 그와 똑같다. 새로운 표현이나 널리 쓰이지 않는 단어들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신출내기 학교 선생 같은 야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글쓰기 행태는 몽테뉴의 걱정을 사기에 충분하다. 학자들의 어렵고 난해한 글쓰기는 지식인들만의 '사교클럽'에서만 통용되는, 해독불가능한 암호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난삽하기 짝이 없는 글이 전문성과 지적 깊이를 가장해 저자의 게으름과 무성의를 은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외국이론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논문이란 서구 정신문화의 정화로 수입된 상품이기 때문에 논문쓰기에서 벗어나지못하는 학자들은 서구문화의 중개상 노릇을 하는 기지촌 지식인에 불과하다."는 김영민의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민음사)에도 경청할 만한 대목이 눈에 띈다. 논문이라는 글쓰기 속에서 강단과 거리, 생각과 생활, 학문과 일상, 학자와 일반인은 멀어지기만 한다는 지적이다. 요컨대 글과 삶이 따로 논다는 것이다. 대학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학의 내규에 따르면 전국 규모 학회지나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한 편이 1점으로 평가된다면, 계간지 등에 발표한 글은 0.1점에서 0.3점 정도로 평가된다고 한다. 우리 인문학의 편협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인문사회과학 에세이가 '잡문'으로 폄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한 위대한 에세이스트의 이름을 통해 지적인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텍스트에 후광 효과를 주기 위해 몽테뉴를 들먹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수다한 인용과 각주 속에는 분명 어떤 지적인 허약함이 있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소개의 글과 정의, 하위 구분과 어원 설명이 그의 저작물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책을 한 시간 정도 읽은 뒤; 그에게서 어떤 진수와 실체를 얻었는지 돌이켜보면, 거의 언제나 공허한 이야기밖에 남는 것이 없다."

 "우리의 복부에 찬 것을 배출시키는 괄약근은 우리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심지어는 의지에 반하여 그 스스로 팽창하고 수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라는 몽테뉴 발언은 내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장식적 수사와 인용을 떼어버리고 "어떤 이야기든 '너'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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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1-2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조와 선호 스타일은 저와 사뭇 다르지만 배울 것, 느끼고 반추할만한 부분이
있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