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문장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 있다면 친구들은 대뜸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이냐고 묻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것은 다름 아닌 조지 하트의 『원시인 BC』다. 페이지가 닳고 닳도록 본 만화책이다. 사유는 오직 절약을 하기 위해 기성복을 입는다던가. 포복절도할 크리에이티브로 무장한 이 책은 너만의 방식으로 사유할 것을 권유했다. 가끔 친구들로부터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어쩌면 조지 하트의 카툰을 오래 음미한 덕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췌언이 길어졌다. 먼저 조지 하트의 카툰 하나를 소개해보자.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길의 벽면에 구멍이 뚫려져 있다. 그리고 그 구멍 가장자리에 이렇게 씌어 있다. ‘들여다 보지 마시오’ 그러나 그 문구는 실제로는 ‘넌 여기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못 베길 걸’하는 강력한 유혹의 글인 셈이다. 그럼 그 구멍 속에는 어떤 풍경이 있었을까. 44-38-44의 드럼통의 몸매를 가진 여자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툰의 마지막 컷은 그 구멍을 들여다본 사람들의 혀가 가슴까지 늘어져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들여다 보지 말라’는 금기가 ‘보고 싶다는’ 욕망을 생산해낸 셈이다. 욕망의 대상이 금기나 규율에 의해 통제되는 경우 그 대상은 더 강렬한 욕망의 목표가 된다는 죠르주 바타이유 식의 명제를 조지 하트는 명민하게 형상화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매치포인트>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한 청년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의 금기는 노라(스칼렛 요한슨)다. 노라는 상류층 친구 톰(매튜 굿)의 약혼녀. 그러나 크리스는 이미 톰의 여동생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와 연인 사이다. 그러나 크리스의 마음은 클로에에게 없다. 클로에는 상류층으로 편입되고 싶다는 현실원칙이 필요로 하는 상대일 뿐이다. 크리스의 마음은 노라에게 있다. 현실이냐 욕망이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냐 이수일이냐의 양자선택의 갈림에서 그는 클로에를 선택한다.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삶이 있는 한 쾌락의 원칙은 잠들지 않는다. 크리스는 노라에 대한 욕망을 접을 수 없다. 전형적인 신파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이 비장한 갈등을 더욱 비장하게 하는 것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등의 오페라 아리아다.
하기는 스칼렛 요한슨 앞에서 냉정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장을 보태자면 어지간한 수도사도 파계를 감행하게 할 용모다. 하물며 범인(凡人)들임에랴. 그만큼 그녀의 스물 두 살의 육체는 눈부시다. 그녀는 진정한 쾌락을 탐하려거든 너의 죽음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므 파탈이다.
이명옥의 『팜므 파탈』이란 책을 펴보라. 책은 귀스타브 모로의 ‘현현’, 빌렘 트뤼브너의 ‘살로메’, 귀도 레니의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아 든 살로메’, 잠피에트리노의 ‘살로메’ 등 역사 속에 명멸해간 수많은 요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도 책의 이미지에 뒤지지 않는다.)
저자는 19세기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통적인 성 가치관이 무너지고 여성들이 자의식에 눈을 뜨던 시기에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욕망과 공포가 투영된 것이 ""팜므 파탈""이라는 이미지라고 설명한다. 남성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성의 자유를 주장하고 해방을 부르짖는 여성들에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끼는 동시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를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설명이다.
영화 속의 크리스 또한 노라에게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그의 두려움은 노라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확신한다. 그의 두려움은 상류사회로부터 배척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소속되고 싶은 집단으로부터 배척될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증’이다. 구조조정에 따르는 퇴출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사내들이 가질 법한 공포증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 고분고분 따르자면 자신의 욕망을 숨길 수밖에 없다. 넥타이도 매고, 구두도 반질반질하게 닦고, 랩이나 힙합은 아이들이나 듣는 음악이라고 치부하면서 고상하게 아리아를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매혹의 대상 앞에서 그들의 자제력은 허술하다. 누르면 솟아오르는 것이 어찌 스프링뿐이겠는가.
조물주는 애초에 크리스의 욕망의 스프링을 노라를 향해 튀어 오르도록 설계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볼 때,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살아온 것은 기껏 몇 천 년뿐이다. 크리스는 금기를 뛰어넘어 노라를 향해 뛰어든다. 둘의 사랑은 뜨겁다. 그 사랑의 공간에서 어떤 현실도 발붙일 곳이 없다. 『에로티즘』에서 죠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생각해보라. 사랑의 격정에 송두리째 빠진 자에게 어떤 현실이 틈입할 여지가 있겠는가.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격절, 그것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모든 현실에 묶여 있는 자들의 운명은 사랑에 모든 것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영웅들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그들은 비장하다. 그래서 섹시하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결별을 선언하는 미셸에게 “아무도 내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손가락에 권총을 쏘는 알렉스,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김희애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달려오는 트럭에 뛰어들며 "나는 죽지 않아요"라고 외치는 문성근. 그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런 용감한 수컷들의 행위가 호르몬 테스테스테론의 영향이라고 애써 폄하하지만 그런 그들의 영웅적(자기파괴적) 행동에 연인들은 자신의 마음과 몸의 문을 연다. 그것이 신파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크리스가 노라에 대한 욕망을 접고 클로에에게 투항했거나(현실원칙의 승리), 또는 클로에에 대한 욕망을 접고 노라에게 투항했다면(쾌락원칙의 승리) 영화는 뻔한 멜로드라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팽팽한 긴장 속에 있다. 우디 알렌이 사랑과 배신이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택한 것은 현실의 긴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노대가답게 우디 알렌은 영화에서는 버젓이 통용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얼마나 먹히지 않는 허술한 논리인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니들은 그렇게 생각하니? 난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는 우디 알렌의 장난기에 포인트를 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