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어떤 친구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스킨헤드에 가죽잠바를 입었다. 피어싱은 기본. 목걸이 팔찌 주렁주렁 문신은 더덕더덕. 그 모습이 가관이라고 생각한 길 가던 행인이 묻는다. 당신 복장이 뭐요? 그러자 이 친구 왈 <이건 다양성추구협회의 유니폼입니다> 크하, 유니폼이라, 제복이라. 촌철살인의 풍자다. 십수년 전에 문장사에서 펴낸 죠니 하트의 <원시인 BC>라는 애니매이션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을 구해주시는 분께는 당시 정가의 10배를 쳐드리겠습니다 *^--^*)

신해철이 다양성추구협회의 유니폼은 아니고 그보다는 훨씬 더 온건한 복장, 후드티를 입고 <100분토론>에 나온 걸 두고 이죽거리는 양반들이 있나보다. 딴따라에게 정장을 바라는 이 문화적 후진성을 웃어냐 하나 말아야 하나. 한 국가에는 다양한 문화층이 있고 각개의 문화층에는 제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이나 표지가 있게 마련이다. 민노당의 노타이, 연예인의 턱수염이 그것이다. 장동건이 공식석상에 턱수염을 깎지 않았다고 해서 이 따샤 너는 공석에서 턱수염도 안 깎느냐고 따지면 되겠나. 딴따라에게는 폼이 밥줄이고 생명 아닌가. 윤도현의 문신은 나도 락커이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의 표현은 아닌가. 락커라면 물론 좀더 위악적인 포즈가 필요하다. 자본에 대한 어떤 저항의 난폭한 제스쳐 말이다. 그런데 윤도현에게는 폼은 있어도 저항의 불온함은 없다. 사실 그는 노래 잘하는 엔터테이너로 족하다. 라커는 희망사항이겠지. 그러니까 의상은 정체성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이 '희망하는 정체성'일 뿐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장차 이러이러하고 싶다는 희망사항이 나를 만들어 가듯 옷도 사람을 만든다는 거다. 김기덕은 야구모자를 쓰고 칸느의 시상식에 올랐다. 김기덕은 야구모자 그 자체다. 폼이건 뭐건 상관없다. 벗으면 자연인 김기덕이요, 쓰면 영화감독 김기덕이다. 앙드레김은 국회의 청문회에 예의 그 화이트럭셔리자켓을 입고 나왔다. 멋진 김복남씨. 그런 문화적 배짱이 있어 대한민국은 그런 대로 살만한 나라다. 앙드레김의 정장, 생각만 해도 우습다. 국회를 코미디장으로 만들지 않은 앙드레김에게 더블클릭!!!! 사자머리 선글라스 전인권에게도 더블클릭(그래도 당신 이은주 발언은 너무 한 거야. 침묵하면 어디가 덧나?) EX는 노래한다. ..예쁘게 봐주세요......그래 예쁘게 봐주려면 무엇을 못 봐주나. 애정이 문제지.

강아지하품이란 말속에는 세상 평화가 다 들어있다. 하품이란 단어의 저 무방비성, 강아지란 단어의 저 천진난만함, 그 둘의 절묘한 배합이 이루어내는 고즈넉함. 강아지하품! 내가 말해놓고도 참으로 그럴듯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5-11-08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장이 어쩌고들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박정희가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하지 않고
복지문제나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지금 훨 괜찮은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를텐데. 삼십년전이나 지금이나 꼴통들 머릿통은 안바뀌는군요

감각의 박물학 2005-11-09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슬픔이여 안녕>을 쓴 사강은 마약으로 구속되었을 때 기자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 쯤 되어야 할 터인데......
 

Long Goodbye-Camel

환멸과 갱생의 시공간


  망각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기억이다. 망각의 배후에 있는  기억의 힘이 그 완강한 손아귀의 힘을 빼지 않는 이상 우리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때,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그러나 기억으로부터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때, 기억은 존재를 유폐시킨다. 존재의 목을 조르고 감금한다.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 그러나 악몽의 기억이 한사코 내 목덜미를 틀어쥘 때,  기억은 존재를 가두고 고문한다.  그러므로  어떤 악몽의 기억도 없는 망각의 땅, 그곳은 구원과 부활의 성소가 된다. 그곳에서 망각은 존재를 쇄신하고 갱신한다.

  축제는 망각의 공간, 무화의 공간이다.  그곳에서 성(聖)과 속(俗)이 뒤범벅이 되고, 고귀함과 천박함이 뒤섞인다. 의미와 규정이 휘발되어 버린 축제의 공간에서 서열과 계급은 의미를  잃는다. 모든 일상은 전복된다.  축제의 공간은 그러므로 난장판의 공간이다. 무질서와 광기의 폭죽이 터지고,  욕망의 섬광이 작렬한다. 사물들은 갑갑한 의미의 옷을 벗고 스스로를 탕진한다.

무릇 탕진한 자만이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는 법. 이 날만은 아랫것들이 버릇없이 윗분들을 농락하기도 한다. 윗분들은 허허  웃으며 아랫것들을 용납한다. 잡스런 것들이 은근슬쩍 고귀하신 것들을 희롱해 본다. 찔러 본다. 윗분들은 한참 잘 참아 내다가도,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하면서 눈을  흘겨보지만, 그 눈흘김도 도가 지나치면 축제의 흥이 깨진다. 아랫것들도 정도껏 해야지 지나치면 불경이 된다. 적당히 놀고 제 자리에 갖다 놓을 때, 축제는 대동(大同)의 한마당이 된다.

 축제를 추동시키는 힘은 망각의 열정이다.  부어라, 마셔라, 잊어보자는 무의식적인 슬로건이 축제를 움직인다. 그러나 축제의 일원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대동(大同)은 말 그대로, 크게 '하나가  됨'이다. 아랫것들이 윗분들에게 은근슬쩍 찝쩍거려보는 것도, 관용의 웃음 속에서 하나가 되자는 뜻이지, 상대를 아프게 찔러보자는 뜻이  되어선 축제의 흥이 깨진다.  상처받고 피 흘리면서도 기꺼워 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대동과 난장의 시간으로서의 망년회를 그려보는  것은 과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망년회가 최소한  일방적인 도취와 망각의  시간이어서도 곤란하다.  궂은 일, 적당히 묻어버리고, 따져야 할 일, 두리뭉실 넘겨 버리자는 식이어서도 곤란하다. 그렇게 두리뭉실 넘겨봐야 언제나  손해보는 쪽은 '없는 사람' 쪽이다. 힘없는 사람 쪽이다. 망년회가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해서는 곤란하다. 뭘 자꾸 따져, 적당히 묻어두자는 식의 망년회는 그래서  달갑지가 않다. 고래고래 노래를 하고 춤을 춰봐도  상처는 안으로 곪기 마련이다. 잊을 건 잊어야 하지만 도려내야 할 건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망년회는 불행히도 짧다. 몇 잔 마시고 몇  마디 하다가 싱겁게 끝나기 일쑤다. 기껏해야 2차의 노래방이다. 고래고래 소릴 질러봐야 나쁜  기억을 지우기는커녕 귀가길만 휑덩그레할 뿐이다. 이런 망년회를 한 번도 아니고 두 세 번 해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못해 고문이다. 혹사당하는 건 성대(聲帶)와 간장(肝腸)이다. 집 태우고 못 줍는 격으로, 이런 망년회에도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새벽의 속쓰림과 두통 속에 홀로 깨어,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자괴감 속에서 나 자신을 씁쓸하게 돌아보게 될 때, 문득 존재의 혁신을 꿈꾸어보게도 되는 것이다.  이거 인생을 확 바꾸어 버려, 다이어트라도 해버릴까, 이 나라를 아주  떠버릴까, 별별 희떠운 생각을 하게 될 때, 그나마 시들시들하고 고리타분한  삶에도 무슨 서광의 흐릿한 기미가 보이게도 되는 것이다. 삶의 임계온도,  더는 이게 아니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우리의 삶은 비약을 꿈꾸게 되는 것은 아닌지.

  환멸을 밀고 나가면 그래도 길이 보이지 않을까. 문제는 환멸을 환멸답게 밀고 나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주질러 앉는  것이 문제다. 필요하다면 바닥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을 수렁으로 밀어놓음으로써 자신을 갱생시킬 수 있는 힘, 슬픔도 이렇게 해서  거름이 되기도 하는 법이 아닌가. 흥청망청 대는 망년회 대신 이런 수렁에라도 빠져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친구 이야기를 할 때 이니셜을 쓰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내가 언제 그랬어, 하는 식의 항변을 친구로부터 받기가 십상이다. 내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일지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보려고 했던 것만을 말하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내 친구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이니셜을 쓰는 것은 안전한 일이다. 더 안전한 방법이 없을까? 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 그러니까 하나의 픽션을 구상하면 문제는 손쉽게 해결된다. 친구들이 “너 그거 내 얘기 한 거 아니야”라고 따지고 들면, 그거 픽션인데 왜 성화를 대고 난리야, 라고 가볍게 응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약간의 죄의식만 감수하면 이런 방식의 말하기는 교묘하지만 재미있는 데가 있다. 하지만 픽션에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픽션은 그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자(일단은 그를 예술가라고 하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르다. 게으른 자는 고작 이니셜을 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H

H가 신림동 고시촌 근방에서 <스피노자의 안경>이라는 안경점을 할 때의 이야기다. 다소 현학적인 간판이 제법 문화적인 친구의 이목을 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곳은 안경을 맞추러 온 고객들보다는 시간을 죽이러 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트로츠키 자서전과 황지우, 송찬호, 이진명, 최승자의 시집은 안경점에 꽂혀있을 목록치고는 이례적인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런 이례적인 아이템이 사람을 끌어 모았는지도 몰랐다. 확실히 그곳엔 이례적인 아이템이 즐비했다.

먼저 H의 외모를 보자. 한때 문학청년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그의 깡마른 체구, 존 레논을 연상시키는 길고 풍성한 머리칼, 대학생들의 철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피노자의 저서 <에티카>, 그 옆에 즐비하게 꽂혀있는 음악 씨디들은 범상한 안경점과 <스피노자의 안경점>을 확연히 구분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더구나 스타일리쉬한 그의 성품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준 것은 그의 노란색 오토바이였다.

H는 그 오토바이를 폼나게 부릴 줄 아는 친구였다. 고시생들로 북적거리는 신림동 골목길을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노란색 오토바이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머리의 사람이 아니라 몸의 사람이다.>

한때 문학에 심취했던 이력으로 보아 그는 어느 정도는 머리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H는 오토바이는 단순한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지붕이 없는 사람들의 철학”이라고 했다. 나는 <지붕이 없는>이라는 대목에 방점을 찍었다.


H의 물침대 매트

몹시 추웠던 날, 그의 옥탑방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두 사람이 몸을 비틀기에도 불편할 정도의 몹시 비좁은 방이었다. 개 발에 주석편자라던가, 물침대 매트라면 한갓진 교외의 모텔방에나 어울릴 법한 소재라는 것이 내 상식이었으니, 물침대 매트는 그 방의 규모나 분위기에 비해 지나치게 럭셔리한 것이었다. 더구나 싱글로 사는 그에게 물침대는 분명 지나친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그는 손님 대접을 한답시고 내게 물침대 매트를 양보했다. 뱀을 밟을 때의 느낌이 그럴까. 쿨렁쿨렁, 몸을 뒤챌 때마다 이상한 탄력이 등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몸을 뒤챌 때마다 꼬루루룽 하는 물소리가 잠을 방해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맨바닥을 청하면서 물침대 매트를 양보했다. 그는 물침대 매트로 오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 내가 이렇게 눌러주면 얘(물침대 매트)는 꼭 이렇게 답해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한 사내의 몸에 반응하는 창부처럼 물침대 매트는 적당한 비음을 내질러 주고 있었다.

몸의 외로움에 답해주는 물침대 매트! 그것은 어쩌면 사치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타인의 요청과 부름을 외면하는지. 내가 그 겨울, H보다 더 외로웠다면 물침대의 언어를 알아들었을 터인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분법은 인간이 즐겨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음과 양, 주체와 객체, 플러스와 마이너스, 선과 악, 정신과 육체, 분석과 직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등 2항 대립 칸막이들의 무수한 증식에 의해서 세계는 비로소 질서라는 이름 아래 포섭된다. 그러나 질서는 무수한 개별자들의 희생 위에서 세워진다. 칼금을 긋듯 딱 잘라 구분해버릴 수 없는 세계의 다양성 앞에서 인간은 현기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구획정리를 하겠다는, 그리하여 세상의 어지러움을 어떤 식으로라든 이겨내야겠다는 인간의 강박관념이 무수한 이분법을 만들어 냈으리라.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불이(不二)를 설파하였던가. 만법귀일(萬法歸一), 결국은 하나라는 말씀이시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나는 여전히 나이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다. 새는 창 밖으로 날아가고 나무는 가지를 출렁여 그 새의 흔적을 말해줄 뿐. 하나라고 생각하기 십상인 '나'만 해도 그렇다. '가시나무새'가 아니더라도 내 속엔 내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나는, 그 많은 '나' 중에서 아주 그럴싸한 나를 선택해서 나이고 싶어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그런 나를 유일한 나로서 승인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라는 간판을 내걸고 드러내고 싶은 '나'는 결국 무수한 '나'의 억압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다. 하나의 음성과 칼라로 수렴되는 '나'일 때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 하지만 억압했던 '나'는 언젠가 기필코 돌아온다. 누르면 누를수록 그것은 더 맹렬한 분출의 힘으로 나를 압도한다. 억압하고 싶어했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나는 타인의 얼굴에서 본다. 나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맹렬하게 분출하는 어두운 '나'를 억압한다.

나서기를 좋아하는 어떤 후배에 대한 나의 비난도 그런 성질의 것이었으리라. 누군가의 앞에 나서고 싶은 자기현시의 욕망이 내 안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후배를 비난함으로써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억압하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모습 속에서 읽어낸, 저 천박하기 그지없는 '나'를 껴안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적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도덕을 껴안아 포옹하지 못하는 '도덕만을 위한 도덕'의 표정은 매서우리만치 비정하다. 그렇다면 내 아내에게서도 현숙(賢淑)만을 강요할 일이 아니다. 약간의 퇴폐가 그녀를 아름답게 할지도 모를 일. 세계의 이중성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주의, 일절의 퇴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순수주의는 파시즘으로 표정을 바꿀 위험이 충분히 있다.

성숙이란 혼돈을 견디는 힘의 증가가 아니던가. 내 안의 드라큘라, 내 안의 콰지모도, 내 안의 그림자를 또 다른 나로서 인정하는 데엔 관용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미성년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그러나 부인한다고 해서, 억누른다고 해서 내 안의 괴물이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억누르고 참아내는 인내는 결국 신경증을 부를 뿐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미국식으로 리바이벌한 영화, '황야의 7인 The magnificient Seven'에서 총잡이로 분한 찰스 브론슨은 '겁장이가 전장터 한 가운데로 스미는 법'이라는 의미심장한 화두 하나를 던진다. 그러나 내 안의 겁장이를 부인하지 않고 의식하는 나는 쉽사리 만용의 총부리를 타인의 심장에 겨누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음울한 인간 곁에는 반드시 그에게 예속되어 있는 밝은 영혼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어떻든 내 아내와 내 벗들과 나의 모순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리라.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둘이 아니고 승(僧)과 속(俗)이 둘이 아니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누군 행복해서 행복하냐?
행복은 의무다
예외는 없다
행복하자
하라구

 
 

 
 
 
 
Beck의 Sex Laws는 올해 만난 수작
모처럼의 경쾌발랄, 우울아 썩 꺼져라
내 몸은 너희들이 거처할 장소가 아니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드무비 2004-12-2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쳐할--거처할(오타 신고!^^)

신납니다. 퍼갈게요.

감각의 박물학 2004-12-24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오타으, 항제...황재. 횡재 ㅋㅎ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