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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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엔트로피 사회를 향하여 삶의 틀을 바꾸자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세종연구원




  1600년대 초에 프란시스 베이컨이 썼다는 『뉴 아틀란티스』는 과학이 유토피아를 건설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책은 페루에서 닻을 올려 중국으로 항해하던 배가 폭풍우를 맞이하여 항로를 잃어버리고 헤매다 마침내 지도에 나오지 않는 땅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로 그곳이 인간의 과학이 만들어낸 유토피아 벤살렘 왕국이다. 벤살렘은 둘레가 5600마일로, 토양이 비옥한 섬이다. 벤살렘의 실력자는 학술원 회원인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건강을 증진시켜주고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물을 만들고, 유성의 체계와 운동을 모방한 거대한 건물을 만들고, 다양한 생물체를 번식시키고, 동물의 손상된 부위를 재생하는 방법도 연구한다. 과학자들의 손에서 섬은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과학이 유토피아를 건설해줄 것이라는 당시의 이런 낙관론은 비단 프란시스 베이컨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지식의 진보가 인간의 삶의 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문명을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엔트로피』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도 과학문명이 장밋빛 미래를 건설할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엔트로피』는 문명의 종말을 경고하는 책이다. 베이컨이 생각했던 대로 과학문명이 유토피아를 건설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종말을 앞당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현대의 과학문명에 대한 섬뜩한 경고인 셈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현대 문명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말하기 위해 끌어들인 개념은 열역학 법칙이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이 우주의 총 에너지는 불변이다. 즉 어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우주 전체의 에너지는 보존된다.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해서 새롭게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에너지를 계속 사용하더라도 고갈되지 않는다. 단지 그 형태만 변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에너지를 무한정 사용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석탄을 태우면 에너지 총량에는 변화가 없을지 모르지만 일의 에너지원이 되는 석탄은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질세계의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이에 따르면 에너지와 물질의 형태 변화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가 증가하는 상태로만 변할 수 있으며, 그 되돌림은 불가능하다. 이 때 사용 불가능한 형태로 바뀌어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엔트로피’라고 한다. 곧 엔트로피란 더 이상 일로 바꿀 수 없는 에너지의 양에 대한 척도이며, 엔트로피의 증가는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를 뜻한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정도’로도 표현된다. 가령 물과 잉크가 따로 있을 때는 물은 물대로 존재하고 잉크는 잉크대로 존재하므로 ‘무질서’하지 않다. 즉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이다. 그러나 잉크가 점점 퍼져가면서 물속의 ‘무질서도’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종국에는 잉크의 확산 현상은 멈춘다. 마찬가지로 빨갛게 단 부지깽이를 난로에서 꺼내어 공기 중에 방치하면, 부지깽이가 식어감에 따라 주위의 공기가 뜨거워진다. 열은 언제나 뜨거운 물체에서 찬 물체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부지깽이와 주위의 공기는 같은 온도를 유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에너지 수준에서 차이가 없어진 상태를 평형 상태라고 부른다. 이 상태는 정지되어 있는 잉크병 속의 물과 비슷한 상태다. 이 상태는 운동이 정지된 상태로서 이미 유용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다. 바로 이 상태가 엔트로피가 최대로 된 상태요, 이는 곧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

  리프킨은 “궁극적으로 정치경제의 흥망, 국가의 성쇠, 상공업의 변화, 부와 빈곤의 원천 그리고 인간 모두의 물질적 복지 등을 좌우한다.”라는,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 소디의 발언을 인용하며 인간이 행하는 모든 물리적 활동은 열역학 제1법칙 및 제2법칙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저자는 “카드 한 장을 한 장을 숫자와 그림에 맞추어 질서 있게 쌓아놓았다고 하자. 이 카드 뭉치는 질서의 최대값, 또는 엔트로피의 최소값에 있다. 이 카드 뭉치를 방바닥에 던지면 무질서한 상태로 흩어질 것이다. 카드 한 장 한 장을 집어 처음처럼 질서 있는 상태로 쌓아올리려면 카드를 뿌릴 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카드의 예를 든다. 이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카드 뭉치를 던진다는 것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일, 곧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일이다. 이는 곧 인간의 에너지 사용 행위를 의미한다. 

  리프킨은 무엇이 엔트로피를 증가하는 데 일조했는가를 책을 통해 조목조목 살핀다. 
 

  먼저 기술이다. 기술의 규모가 크고 복잡할수록 에너지의 소비량이 많아진다.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에너지의 소비는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쓸 수 없는 에너지, 곧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술이 환경에 대한 의존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제도의 발달 역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리프킨은 정치 및 경제기구들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에너지의 변환자들이고, 그들이 하는 일은 문화전체를 통과하는 에너지 흐름을 더욱 원활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에너지의 흐름이 원활하게 되어 결국 에너지의 부족사태를 맞을 때 국가는 유용한 에너지원을 찾아 영토확장을 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라고 리프킨은 설명한다.

  전문화는 증가하는 복잡성 및 집중화와 나란히 진행되는데 이 역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이 전문화로 인해 각 개인의 기능은 더욱 세분화되고 한정되지만 지나친 전문화로 인해서 융통성을 잃어버리고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리프킨은 경고한다.

  리프킨은 미국에서 농업장관을 지낸 클리포드 하딘이 “한 사람의 인력으로 현대적이고 기계화된 사육시스템을 통해 7만 5,000마리의 닭을 키우고, 자동 사료 공급 장치를 써서 5,000 마리의 소를 키울 수 있는 나라가 미국 이외에 어디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적 농업이 얼마나 고엔트로피 산업인지를 설득력이 있게 말해준다.

  이동의 효율을 현저히 증가시켜주는 수송수단과 도시화 역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요인이라고 리프킨은 지적한다. 도시의 팽창으로 무질서가 축적됨에 따라 도시의 통치기구는 더욱 비대해진다는 것도 도시화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 역시 골치다. 
 

  리프킨은 전쟁준비는 인간 활동 중 가장 많은 엔트로피를 증대시키는 활동이라고 하면서 미사일을 만드는 것은 “후손들이 쓸 쟁기를 빼앗아 칼을 만들고 있는 꼴”이라고 비판한다.   교육제도의 중앙집중화 또한 문제다. 교육제도의 중앙집중화로 새로운 정보기술이나 전문화된 프로그램 등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보가 대량으로 늘어나면서 에너지 소비도 크게 늘어났으며, 그 결과 쓰레기 정보와 같은 무질서가 축적되고, 엔트로피 과정이 더욱 빨라졌다는 것 또한 문제다. 
 

리프킨은 세계인구의 6%를 차지하는 미국이 전세계 에너지 총소비량의 1/3을 차지한다고 비판하면서 에너지 문제의 대안으로서 내놓은 자구책들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를 검토한다. 먼저 석탄을 원료로 휘발유를 얻는 합성연료는 화석연료와 같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에서 파생된 것일 뿐이고, 합성연료의 에너지를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별도의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합성연료의 효율성은 형편없으며, 그 안정성이 문제가 되는 핵연료도 에너지 문제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리프킨은 지적한다.

  리프킨은 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제3세계가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구의 생물학적 한계를 지키자는 주장은 가난한 사람을 영원한 노예상태로 묶어두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으리으리한 욕실이 달린 저택에 살면서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벤츠를 모는 상류사호의 생태론자들이 깨끗한 공기를 요구하려면 우선 자신들의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부를 좀더 균등하게 재분배해야 한다고 리프킨은 지적한다.

  둘째, 현재의 중앙집권적인 전력시스템을 분산적인 태양에너지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전력시스템을 태양발전시스템으로 대체하면 고도의 에너지가 필요한 중화학공업과 첨단기술과 같은 고엔트로피 산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태양에너지에만 의존하는 체제로 전환하려면 기술과 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리프킨은 현재의 고엔트로피 문화에서 태양과 같은 재상가능에너지를 사용하는 저엔트로피 문화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생각의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엔트로피 시대에는 성장이 삶의 목표였지만 저엔트로피 시대에는 검약이 삶의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고, 무절제한 소비와 물질적 집착 등에서 벗어나 내적인 성장을 중시하는 태도, 생태적인 관심 등에 기초를 두는 사고방식으로 인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경제학자 슈마허는 “태양에너지로 집 한 채를 따뜻하게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록펠러 센터에 난방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양에너지와 풍력을 합친다 해도 엘리베이터조차 가동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대량생산과 대도시의 삶이 태양에너지 시대의 모델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양에너지 시대에 맞는 모델은 어떤 것일까.

  리프킨은『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가 제시한 이른바 ‘중간기술’을 그 모델로 든다. 중간기술은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활용하여 이루어지는 작은 규모의 기술이다. 호미로 농사를 짓고 있는 제3세계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서 트랙터와 콤바인을 들여오게 되면, 농촌인구 과잉에 일자리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는 대다수의 제3세계에 더 많은 실업과 혼란을 야기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아니라 복잡한 기계에 무지한 농민들은 기계와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매여 버리게 된다. 그래서 슈마허 박사는 호미와 트랙터의 중간에 해당하는 그 지역의 상황에 적합한 기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중간기술이라 이름붙이고, 그러한 기술을 연구, 개발하기 위하여 '중간기술 개발 그룹'이라는 국제적인 단체를 조직하게 된다.

  중간기술의 개념은 순전히 슈마허 박사의 창안은 나이다. 슈마허 스스로가 인정하듯 그것은 본래 간디의 아이디어였다. 영국의 지배하에 들면서부터 영국의 섬유 공업이 인도 가내 공업을 파괴하면서 영국은 섬유 산업을 통해서 인도로 인해 많은 이윤을 가져가고 있을 때 간디는 서양의 거대한 생산체계가 제3세계의 민중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약탈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는 길은 비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그리고 인도의 지방 산업을 다시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섬유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영국의 섬유공업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인도인들 스스로가 물레를 돌려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레 역시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키는 기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의 대규모 섬유공업처럼 인도인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며 인간성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 간디의 생각이었다. 슈마허의 ‘중간기술’은 바로 이런 간디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한경쟁의 시대, 경제 성장을 최고의 미덕으로 아는 시대, 기술만이 최고의 부가가치를 창출해낼 것이라는 기대로 기술과 인력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시대에 어떤 정부가 중간기술과 같은 저엔트로피 기술을 도입하겠는가. 인류의 세계관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지 않는 이상 요원한 일이다. 지구는 현세의 인류만을 위한 곳이 아니고 미래의 후손들과 같이 공유하는 곳이며, 인류는 홀로 독불장군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를 이루는 한 구성원일 뿐이라는 세계관의 대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리프킨의 책『엔트로피』는 독자들에게 통렬한 각성과 실천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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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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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식량이 없어서 굶는 것일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갈라파고스







1798년에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 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여 25년마다 두 배가 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서열을 따르므로, 가난한 가정은 자발적으로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조나 지원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했다. 맬서스는 가난과 배고픔을 지구상의 인구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수단으로 본 것이다. 이 맬서스의 이론을 단적으로 사이비 이론이라고 말하는 이는 『왜 세계는 굶주리는가』의 저자, 장 지글러이다. 그는 굶는 이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기 위해 사람들이 맬서스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2006년 10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기아 희생자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에 10살 미만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갔다.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이 3분에 1명꼴로 생겨났다. 세계인구의 7분의 1인 8억5천만 명, 65억 인구의 약 20%가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아프리카는 전인구의 36%가 기아에 무방비상태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200만 명 이상의 북한 주민이 굶어죽었다. 15살 미만 북한 아동의 37%, 젖먹이는 엄마의 30%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구의 기아문제가 식량부족 탓일까. 결론적으로 현재의 기아 문제는 절대로 식량 부족 때문이 아니다. 1984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평가에 따르면, 현재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지구 인구의 2배인 120억 명을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 2400~2700칼로리 정도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식량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왜 세계는 굶주리는가』의 저자 장 지글러는  ‘살인적이고 불합리한 세계 경제 질서’를 기아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갑자기 곡물 시장에서 대량의 곡물을 방출하면 가격이 무너져 덤핑효과가 나타나고, 반대로 곡물을 사재기하여 인위적인 품귀현상을 불러일으켜 가격을 오르게 하는 투기꾼들인 소수의 곡물 메이저들과 투기금융자본의 합작이 주범이라는 것이다. 카길 인터내셔널(미국) 컨티넨털 그레인(미국) 루이 드레퓌스(프랑스)와 같은 거대 금융자본들은 격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곡물의 생산을 제한하고, 심지어 불태우거나 바다에 빠뜨리고 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야 할 곡물이 재가 되거나 물고기의 밥이 되는 셈이다.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도 기아의 주범이다. 저자는 높은 영아사망률 해결을 위해 무상 분유 제공을 내건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비협조로 실패하여, 끝내 퇴장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를 든다. 1970년 당시 칠레의 긴급과제는 어린이들의 영양실조 문제 해결이었다. 이에 소아과 의사 출신의 정치인인 칠레 인민전선의 아옌데는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ℓ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공약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때 칠레에서 목장을 경영하며 목축업자들과 독점계약을 맺고 판매망을 장악하고 있는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 네슬레는 제값을 주고 분유를 사겠다는 아옌데의 분유 구매 요구를 거부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왜 판매를 거부했을까. 이익을 원치 않아서? 이유는 그 반대다. 당시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그 보좌관인 헨리 키신저가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꺼리고 있었고, 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칠레의 자립성을 높이고 국내적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아옌데 정권의 개혁정책이 제대로 추진되면, 다국적 기업이 누려온 많은 특권들이 침해받을 수도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국적기업과 키신저가 이끄는 미국정부의 고립정책에 부딪친 아옌데는 CIA와 결탁한 피노체트 장군의 군부쿠데타에 의해 암살된다. 칠레에서의 개혁사례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로 번져갈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가 작용한 결과다. 서아프리카의 작은 국가 부르키나파소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개혁적인 대통령 상카라는 인두세를 폐지하고 개간 가능한 토지를 국유화해 4 년 만에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지만 프랑스 정부의 조종을 받은 군부 세력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식민지 정책 또한 문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의 경우를 보자. 세네갈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에 의해 땅콩 농사에만 매달리도록 강요받는다. 종주국인 프랑스는 세네갈을 상대로 자국에 필요한 작물인 땅콩만을 경작하게 하는 이른바 단일경작(모노컬쳐)을 강요한다. 그 결과 세네갈 정부는 땅콩을 수출해서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로 태국이나 캄보디아, 혹은 그 밖의 나라에서 쌀을 대량으로 구입한다. 세네갈의 주식은 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나 쌀을 수입할 수가 없다.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식량 수입의 독점권을 가지고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있다. 그러다보니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자국의 식량증진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국민들이 굶주려야 그들의 이익이 극대화된다. 기아는 식량 부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10 년 넘게 계속된 미국의 이라크 경제봉쇄 정책 또한 문제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할 때까지 이라크는 제한된 양의 석유를 수출할 수 있다. 그리고 석유수출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국제적 감시 아래 식량이나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이라크의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유니세프에 의하면 미국의 이라크 경제 봉쇄 조치로 인해 매일 200명의 아이들이 죽어갔다고 전한다. 석유의 보고인 중동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정치적 계산이 수많은 이라크인들의 죽음을 불러온 셈이다.




물론 이런 정치적인 문제만이 원인은 아니다. 육식의 문화도 기아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지방이 촘촘히 박힌 깊은 맛의 쇠고기를 만들기 위해 소에 기름진 옥수수 등 곡류를 먹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1,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가 바로 가축이 먹는 사료가 된다. 매년 가축에게 먹이는 6억 t의 곡식을 인간이 직접 먹는다면 10억 명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육식의 종말』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의 설명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막화와 대규모의 원시림 벌채 또한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기아에 의한 생명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저자는 몇 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우선적인 과제는 인도적인 구호조처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면한 긴급구호를 위해 비축된 비상식량을 배급하고 관리하는 것은 WFP 담당자들은 도움을 줄 나라의 사회구조가 어떤지 거의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도움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부실하고 부패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원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그들에게 농사 짓을 수 있도록 사회적인 구조개혁이 이루어져야한다. 세계 수위의 식량 생산국이자 수출국인 브라질의 대도시와 시골에서 아이들이 매일같이 굶주리는 것도 구조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다. 지주의 1%가 경작지의 43%를 차지하고 있고 2000년의 경우 1억 5300만 ha의 땅이 경작되지 않은 채 방치됐다. 제3세계 국가들의 인프라를 정비하기 위한 지원도 필요하다. 자본, 도로, 적당한 종자, 비축식량, 농경 전문지식 등에 대한 지원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기아의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장자크 루소의 “약자와 강자 사이에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이익의 극대화만을 꾀하는 시장 자유화 논리는 억압과 착취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정의를 위해 세계시장에는 규범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자유방임적인 시장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시장주의 논리의 허상을 버리라는 충고다. 그는 시카고의 곡물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하며, 협의 등을 거쳐 제3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확보되어야 하고, 서구 정치가들의 눈멀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저자는 주장 일변도로 나가지만은 않는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을 역임했던 경력이 말해주듯 그의 주장은 신뢰성이 있는 자료들을 동원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더구나 책은 아들이 묻고 아빠가 답하는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쉬운 문체로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 책과 함께 푸드퍼스트(food firs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식량과 발전정책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집필한 『굶주리는 세계』를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다. 이 책은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 자연 탓이다. 인구가 너무 많다, 미국의 원조가 기아를 해결한다,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등등, 굶주림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 12가지를 골라 그 허구성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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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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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의 이중성을 해부하다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을유문화사 
 

서양 군대의 경우 항복자와 전사자의 비율이 보통 4대 1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일본의 전투가 벌어졌던 미얀마에서 생존자가 전병력의 20분의 1이었지만 일본인들은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게 된 미국의 눈으로 볼 때, 지금까지 싸워온 적중에서 일본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적이었다. 이에 미국의 국무부는 여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1887 ~1948)에게 일본인의 의식 구조를 연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연구의 결과 ‘일본인의 행동패턴’이라는 보고서가 제출되었고, 이 보고서에 인류학적 내용이 보태어져 1946년에 나온 책이 『국화(菊花)와 칼』이다.

베네딕트는 이 책을 일본과의 교전 중에 집필했다. 때문에 일본에서의 현지조사가 불가능했다. 궁여지책으로 책이나 논문, 영화와 신문, 그리고 미국에서 자란 일본인들과의 인터뷰만으로 책을 집필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라는 상황은 연구자로 하여금 감정적 동요에 들뜨게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트는 냉정했다. “전쟁 중에 적을 나쁘다고 철저하게 깎아내리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인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는가에 있다. 나는 전시 중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 부정적인 요소로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로서 그것을 이용하도록 노력해야 했다.”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냉철한 눈으로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미국적 실용주의 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책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일본을 일본인의 나라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일본인들이 어떤 경우에 예의를 지키고 또 지키지 않는가, 어떤 경우에 수치를 느끼고, 당혹감을 느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가 등에 관해 기술한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의 행동을 분석하여,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도덕과 관념의 유형[패턴]을 파악한다. 
 

저자는 먼저 일본인들의 행동 패턴의 원리로서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이 개념이 인간관계 및 인간과 국가의 관계,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 관해 일본인이 품고 있는 관념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각 계층이 가지는 알맞은 위치를 중시했고, 어느 누구도 그 선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대와 성별, 연령 등에 따라 계층 제도 속에서의 한 사람의 위치가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서 학습된 계층 제도의 습관은 경제나 정치 등 넓은 영역의 생활에까지 적용된다. 일본 봉건 사회의 계층은 황실과 궁정 귀족 밑에 무사, 농민, 공인, 상인 순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계급에 따라 일일이 규정되어 있었고 그 정밀한 구도 안에서 안전과 심리적 보증을 얻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인 메이지 유신에서도 이 계층적 관습의 발판을 없애지 않고 단지 거기에 새로운 위치를 주어 그것을 존속시켜 나갔다. 일본은 철저하게 계층제도를 신뢰하고 있다. 

하층 무사 계급과 상인계급의 결탁 속에 키워져온 새로운 정치가들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전 일본 땅에서 도저히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뤄냈다. 모든 계급적 차별을 철폐했고 학교를 설립하고 불교의 세력을 제한했으며, 단발령, 천민 해방과 같은 파격적인 과업들을 진행켰다. 근대적 헌법과 제국 의회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은 근본적으로 일본 사회를 지탱해온 계층 구조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쇼군[일본의 역대 무신정권의 막부(幕府)의 수장(首長)을 가리키는 칭호]을 제거하긴 했지만 분명 유신은 천황 중심제로의 복고가 그 기본목표였다. 천황 중심적인 국가관리의 영역과 기존 세력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정치, 사회, 종교 구조를 이원화해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들의 알맞은 위치와 자리'를 인식하며 살도록 했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이러한 계층 제도의 가치관이 적용된 예로 볼 수도 있다. 세계의 모든 나라는 국제적 계층 조직 속에 제각기 일정한 위치가 주어져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으며, 같은 달 12일에는 전쟁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힘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와 자리'를 인식하고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계층제도의 가치관이 힘을 기준으로 모든 세계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식민주의의 논리로 귀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인의 관념 체계의 기저에는 ‘온[恩]'과 '기무[義務]'와 '기리[義理]'가 있다. 남으로 받은 은혜인 ‘온’은 갚아야 할 빚이다. 온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무거운 짐이 된다. 따라서 남에게 온을 입히는 것은 그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남으로부터 필요 이상의 은혜를 입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온에 대한 보답의 의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먼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갚을 수 없는 의무인 '기무[義務]'가 있다. 이것은 곤란한 요구라 하더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이다. 천황, 법률, 국가에 대한 의무인 주[忠], 양친과 조상에 대한 의무인 고[孝], 자기의 일에 대한 임무인 닌무[任務]등이 이에 속한다. 다음으로,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는 '기리[義理]'가 있다. 기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해야하는 것이 기리다. 내가 남으로부터 받은 만큼 그에게 주어야 하는 의무가 바로 기리다. 기리를 지키지 않는 인간은 명예와 체면을 깎인다. 기리를 지키지 못하면 받을 줄만 알았지 줄 줄을 모르는 인간으로 폄하된다. 기리를 지키지 못할 경우 일본인들은 극심한 우울증이나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심한 경우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채무일이 가까워오는 데도 갚을 길이 없어 자살을 하는  채무자도 있고, 교실에 걸려있는 천황의 사진이 타버렸다는 이유로 자살을 하는 교장들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구겨진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리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기리란 가신이 그의 주군이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신이 주군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게 되면 갑자기 터무니없는 증오로 일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리를 중시하고, 명예를 더럽히는 치욕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2차 세계대전중의 포로수용소에서 보여주었던 일본인 포로들의 태도다. 일본인 포로들은 연합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름을 더럽히는 치욕을 그 무엇보다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본인들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그들은 포로가 되는 것은 곧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요,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로가 됨으로써 생물학적 목숨은 붙어있을지라도 일본인으로서의 사회적 생명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본인으로서의 삶은 끝이 났으니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이 기리의 이중성이다. 고참군인으로 오래도록 군대생활을 한 극단적인 국가주의자였던 한 일본인 포로는 미군들에게 탄약고의 위치와, 일본군의 병력 배치를 세밀히 설명해주기도 하였다. 항복 일주일 전만 해도 죽창을 들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인들은 천황의 패전 방송을 듣자 미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로 돌변하기도 한다.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런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매우 절제되고 온유한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리는 호전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일 사정이 허락되면 평화로운 세계에서 자기위치를 구하리라. 그렇지 않게 되면 무장된 진영으로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게 될 것이다."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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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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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한길사/2000년




  문화는 일종의 습관이다. 김치문화는 우리의 먹는 습관이고, 한복은 우리의 옷 입는 습관이고, 장례문화는 우리의 죽음을 처리하는 습관이다. 영남에는 영남의 김치 문화가 있고 호남에는 호남의 김치문화가 있듯이 한 나라 안에서도 이 습관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 차이와 다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속한 문화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생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 독선적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우리는 인도 농부들이 굶주리면서도 왜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지 힌두교도들의 맹목적 신앙을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근시안적 태도다. 암소에게 어떤 신성한 종교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판단도 섣부르다. 육식을 금하는 동양의 정신주의니 생명존중이니 하는 말들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머쓱해질 정도로 마빈 해리스는 철저하게 그 원인을·물질적인 데서 찾는다. 먼저 트랙터와 같은 현대식 농기구를 살 여유가 없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소는 유일한 농경 수단이다. 또한 암소에서 나오는 젖은 각종 유제품의 원료가 되고, 쇠똥은 비료와 연료로 사용된다. 이렇게 유용한 소를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잡아먹는다면 장기적으로 생계가 막연해진다. 마빈 해리스는 바로 여기에서 금기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해리스는 이슬람교도나 유대인들, 그리고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도 설명한다. 돼지는 소처럼 풀만 먹고 살 수는 없고, 곡식을 주로 먹기 때문에 인간과 먹이를 두고 직접 경쟁한다. 또 돼지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털도 없고, 땀을 흘려 체온조절도 할 수 없기에, 깨끗한 진흙 속에 뒹굴어 체온을 조절해야 한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건조한 중동의 기후에서는 먼 거리를 몰고 다니기가 힘들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중동지방은 식용에 충족될 만큼의 돼지를 사육하기에는 생태학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소규모의 사육은 돼지고기에 대한 유혹만 크게 하므로 아예 돼지고기의 식용을 금지하고 양이나 염소 등을 치는 데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집단에게는 생태계가 지탱해줄 수 있는 적정한 인구수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생산 활동에 열중하다 보면 생태계가 황폐해져 결국에는 생산량이 줄어들게 된다. 이럴 경우 해결책은 영양공급을 줄이거나 인구를 줄이는 장치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이때 피임이나 낙태와 같은 안전장치가 없었던 원시인들의 제도화된 인구축소 수단이 금기와 규제와 전쟁, 유아살해 등이었다는 것이 마빈 해리스의 설명이다.

  물론 유아살해가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야만적이라고 보지 말라고 저자는 주문하면서 효과적인 피임법과 낙태법이 개발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아동살해가 자행되었는지, 18세기의 영국사를 들여다보라고 충고한다. 서구는 선이요, 비서구는 악이라는 등식이 고루한 편견임을 깨달으라는 석학의 매서운 질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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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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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권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2007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 고속도로에 설치된 무인 단속카메라 중 20퍼센트가 가짜라고 한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운전자는 무인 단속 카메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수가 없다. 결국 무인 단속카메라 앞에서는 스스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운전자의 이런 자기 통제 행위는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1791년에 만든 ‘판옵티콘’이라는 원형감옥에서도 나타난다. 판옵티콘은 한 지점에서 모든 곳을 감시할 수 있는 감옥구조다. 중앙에 원형의 감시탑을 세우고, 바깥의 원둘레를 따라 감방을 만들면 감독관이 머물고 있는 중앙의 감시탑 안에서는 감옥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죄수들은 감독관을 볼 수 없다. 시선은 불평등하다. 한쪽은 볼 수 있지만 한쪽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의 저자 미셀 푸코는 판옵티콘의 이러한 불평등한 시선의 구조에서 예기치 않은 권력의 권력효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감독관이 자리에 없더라도 죄수들은 감독관이 있다고 여겨 실제로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죄수 스스로가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감시의 내면화, 이것이 판옵티콘의 강력한 효과다. 

  슈퍼마켓 계산대 직원의 부도덕한 행동이 의심스럽다면 사장은 간단하게 계산대에 감시카메라를 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절도범도 막고 직원의 행동까지 감시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계산대 직원이 사장에게 불만을 터뜨린다면 사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좀더 유연하고 고상한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소위 ‘정신교육’이 한 방편이다.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다.’와 같은 강령들을 피고용인에게 끊임없이 내면에 주입시키는 교육이나 해병대 캠프와 같은 집체교육 프로그램을 동원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좋다. 그 결과 권력자의 뜻에 따라 잘 교육받은 피고용인은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푸코는 학교나 군대는 권력자의 뜻대로 사람들을 길들이는 훈육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결국 학교나 군대에서 가르치는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도 결국은 권력자의 이익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단지 권력이 대중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흥과 쾌락이 비정상으로 분류되고 근검과 절제는 정상으로 분류되는 식이다. 그러나 권력이 매기는 가치의 등급이 절대적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과거의 권력은 총칼을 내세웠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는 근대적인 권력은 물리적인 폭력을 앞세우는 무자비한 권력이 아니다. 군대와 교육과 병원과 같은 문화적인 외피를 걸친 권력이다. 근대적 권력은 군대를 총칼을 동원하지 않고 권력의 뜻에 맞게 사람들을 길들인다. 채찍을 동원하지 않고 판옵티콘이나 감시카메라와 같은 감시체계를 이용해 스스로를 감시하게도 하고, 권력에 의해 내면화된 이념을 통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가령, 박정희 정권 시절 언론과 교육과 군대를 통해 내면화된 충효의 이데올로기는 애국심을 절대화하여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행위를 죄악시하게 만든다. 국가에 반항하는 자를 고문하고 처단하는 것보다 이런 간접적인 방식이 훨씬 더 세련되고 문화적으로 보인다. 보다 세련되고 문화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 바로 그것이 이성을 표방하는 근대의 권력이다. 첨단정보기기의 발달은 권력에 엄청난 권능을 부여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감시의 눈을 제 몸 속에 이식하며 순종적으로 길들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그의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에서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면대에 난 구멍만큼밖에 생명력이 없다.” 거부는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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