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뭔가 있어 보인다. 심오하고 난해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다. 스타일을 꽤 중시하는 친구들이 대체로 이런 류에 속한다. 이런 친구들은 심오해 보이면 뭣이든 좋아한다. 문화적 명품주의자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어떻든 희귀하고 난해하고 심오한 것들로 자신의 주변을 장식하면 꽤나 근사하게 보인다. 좀 있어 보인다. 한때는 나도 그런 병에 걸린 듯하다. 재즈명반을 모으고 마야코프스키와 호치민과 체게바라를 읽었다. 도어스의 짐 모리슨의 전기를 읽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야 대단한 명분을 내세웠을지 모르겠으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단지 그럴싸해 보인다는 이유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바바리를 입으면 꼭 깃을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마음과 엇비슷하다. 터프가이란 소리 들으려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담배 하나 꼬나문 웨스턴보이의 꼴같잖은 남성성이라니. 옛날에 그랬다면 지금은? 뭐든 게 재미다.(재미나는 골에 범난다는 말있다. 잘 두리번 거리자.) 영화도 재미고(타르코프스키는 이젠 졸립다.) 소설도 재미다.(르끌레지오는 10년 전에 재미없어졌다.) 달리는 것도 재미고(아파도 재밌다.), 읽는 것도 재미다.(책은 인터넷처럼 근사한 오락도구다.) 심지어는 사람도 재미다. (재미로 소도 잡아먹을 양반이다.)도둑도 재미만 있으면 친구 하겠지만 군자도 재미가 없다면 친구로서는 사절이다. (물론 개그 잘한다고 재밌는 건 아니다. 재미는 말로 하는 게 아니니까. 좋은 느낌, 그게 재미다.)재미주의자란 칭호가 생긴다면 그 단어의 제 1호 시험대상자로 나를 추천해주길 바란다. (너무 바란다. ) 나는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김종광이란 작자를 좋아한다. 그의 첫 창작집 『경찰서여,안녕』(문학동네)에 실린 11편의 단편 중 <많이많이 축하드려유>라는 단편은 단연 걸작이다. 지방 소도시의 원동기 면허시험장을 무대로 하면서, 시험을 보러 사람들의 입심이 걸다 못해 푸지다. 들어보자. “‘어느 다방 냄비들인가 젖통 한번 큼직하네’.정원형(62세)은 옷차림이 유난스러운 여자들 쪽을 흘깃거리며 입맛을 다셨다.확실히 벗던가, 좀더 입던가, 거참 살벌나게 입어번졌네.저 게 그래도 시험 친다고 한 가지씩 덧입고 온 행색일 것이라고 원형은 생각했다.‘아엠에뿌 땜이 다방 물 하나는 맑아졌당께’.가까이 앉은 이재만(63세)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지방 소도시가 그의 작품 속에서 오롯이 살아난다. 껌을 짝짝 씹어대며 보자기에 싼 보온병을 들고 배달 나가는 허름한 다방의 레지 아가씨도 떠오른다. 그 아가씨의 미니스커트를 힐끗거리며 “미스서 오늘 스타일 쥑이네.” 추임새를 넣는 날건달 하나도 떠오른다. 어쨌든 울긋불긋 촌스런 시장통 의상을 걸친 인간들의 입에서 나온 멘트가 모처럼 구수하다. 사무실에 혼자 남아 낄낄거리며 읽다가 보니 저만치 동료가 있어서 무안했다. 빌 브라이슨이나 김종광 같은 사람의 책은 주위를 잘 둘러보고 읽어야지 그렇잖으면 미친놈이라는 비난을 듣기 십상이다. 오쿠다 히데오도 마찬가지. 웃기는 작자다. 알랭드 보통, 미셀 투르니에나 쿤데라의 지적이고 세련된 글들을 읽는 재미야 비할 데가 없지만, 가끔은 왁자한 저자거리에서 바지에 국물을 흘리며 소주 한잔을 하고 싶을 때 김종광은 잘도 읽힌다. 너저분하고 누추한 삶을 껴안는 것이 그의 문체고 유머다. "인상 쓸 거 뭐있슈. 사람 쥑인 것두 아닌데" 능구렁이를 삶아먹은 것 같은 능갈맞은 충청도 사투리도 일품. (그의 소설 『첫경험』도 경험해봐야겠다. 치정에 얽히지 않는다는 것도 책이 좋은 이유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