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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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래가 그랬다


심장은 폭스바겐 만하다. 혀 위에 코끼리를 올려놓을 수도 있다. 몸무게는 고양이 3만 마리를 합쳐 놓은 것 만하다. 혈관은 소방호스 굵기다. 이 정도 힌트면 아시겠는가? 답은 고래다. 북방혹고래의 고환은 무려 1톤이다. 창피 당하지 않으려면 그 앞에서 지퍼를 함부로 내릴 생각을 마시라. 흰긴수염고래는 한번 사정에 1350리터의 정액을 방사한다.(1000리터가 1톤임을 상기하시라.) 아무리 잘 단련된 무사라도 고래를 당할 자는 없다. 호랑이의 송곳니도 매의 발톱도 고래 의 덩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양은 또 하나의 질이다.

맞짱과 싸움에도 엄연히 규칙과 논리가 있다. 주먹 쥐고 싸우는 판에 곡괭이나 삽자루를 휘두르는 건 치사하고 몰염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몰염치한 일을 아무렇지도 감행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인간이다. 초음파추적장치, 전자장치와 신무기...테크놀로지의 위엄을 앞세워 자연에게 별별 가공할 만한 짓거리들을 감행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 씀씀이, 그런 건 없다. ‘나’라는 존재의 복지 이외엔 관심이 없다. 철저한 자기중심주의요, 치졸한 소아병적 태도다. 성장주의는 그들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이란 부제가 붙은 엘린 켈지의 『거인을 바라보다』는 우리를 데리고 저 깊은 심해로 들어간다. 고래의 폐활량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고래를 따라가는 그 여행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범고래 새끼 수컷은 지독한 마마보이다. 평생 어미 고래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한 번 출산에 한 마리만 낳고, 70살 수명에 13살까지 젖을 물리는 고래, 새끼가 포경선에 잡혀가면 포경선을 이마로 들이 받는다. 모성도 체구만큼 지극하다. 향유고래가 해마다 바다에서 먹어치우는 먹이의 양은 8천만~1억톤, 이는 인간이 전세계 어장에서 건져 올리는 것보다 웃도는 양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고래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몸집으로 진화했을까? 책은 그 해답의 단서를 말해준다. 쥐처럼 작은 동물은 신진대사율(단위질량당 소비되는 에너지)이 너무 높아 음식을 찾아 멀리 돌아다닐 수 없지만, 몸집이 커지면 신진대사율이 낮아져 양질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책은 바다가 사실 영양학적으로 풍부한 곳이 아님을 말해준다. 고래도 식량난에 허덕인다는 이야기. 몸집이 커서 게을러 보이지만 먹이를 찾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고래는 하루에 150킬로미터를 이동한다. 쇠고래는 멕시코만에서 북극까지 2만킬로미터를 여행한다.(지리산 종주는 이런 여행 앞에서는 세 발의 피다.)

‘고래, 몸집만 컸지 미련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착각. 많은 인류학자들이 문화는 모방에서 시작되고 학습으로 전파된다고 했다. 엘린 켈지의 책은 고래 역시 인간처럼 어엿한 문화적 존재임을 말해준다. 오스트레일리아 샤크베이에 사는 돌고래는 도구를 사용한단다. 호모파베르, 도구적 인간이라는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사실 이 자존심은 일찍이 침팬지들이 흰개미를 잡기 위해 나뭇가지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관찰한 영장류 학자, 제인구달에 의해서 무참하게 깨진 바 있다. 아무튼 샤크베이의 돌고래들은 해저에서 해면동물을 뜯어내 주둥이에 물고 독가시가 있는 스톡피시를 사냥한단다. 해면동물이 독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한 보호장구로 탈바꿈되는 순간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래들이 이 ‘해면동물 사용법’을 어미 돌고래에게 배운다는 점이다. 본능이 아닌 학습에 의해서 말이다.

병코돌고래는 평생 사용할 자기 이름을 ‘휘파람’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호모 로퀜스, 언어적 인간의 위상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혹등고래의 뇌에서 발견된 방추신경세포는 오직 인간과 대형유인원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이 세포는 사회적 조직력과 공감능력, 화술, 타인에 대한 직감, 사랑과 감정적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부분이란다. 어쨌든 병코돌고래가 사랑의 아픔을 안다고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병코돌고래가 감정도 없는 단순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다. 뿐만 아니라 고래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아무리 영리한 고양이라도 어림없는 일이다.

북대서양의 사르가소에 사는 암컷들은 교차양육의 사례를 보여준다. 한 마리의 새끼가 여러 마리의 암컷들로부터 젖을 얻어먹는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어미와 새끼의 폐활량은 차이가 난다. 향유고래가 한 번 잠수해 바닷속에 머무는 시간은30~45분. 어떤 고래들은 1시간이나 잠수한다. 이때 엄마가 깊이 잠수해 들어갔을 때 어린 새끼들은 누가 돌보겠는가. 바로 이모와 할머니와 같은 모계집단이다.

진화이론 중에 ‘할머니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동물은 죽을 때까지 생식이 가능한데 어째서 인간은 일반적인 동물과 달리 45세 전후에 폐경을 맞이하고, 더 이상 생식할 수 없음에도 70세 정도까지 장수할까를 추측하는 이론이 '할머니 이론'이다. 답은 이렇다. 인간은 어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다른 동물보다 길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았다가는 자식이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제대로 지켜줄 수가 없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아이를 낳는 일이 위험해 진다. 이 때문에 나이가 들면 직접 아이를 낳기보다는 이미 낳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보살피는 것이 같은 유전자를 가진 후손의 수를 늘리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 할머니 이론은 고래의 모계사회를 설명하는 데도 유효하다. 고래 연구 학계에서는 고래의 학습이 고래들의 모계사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고래의 행동양식은 모계에 따라 결정되며 같은 집단에서 소리, 생존 방식, 육아 방법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책은 말한다. “ 연장 사용은 어미에게서 딸에게로 문화적으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한 마리가 어떤 도구를 사용해 그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되고, 다시 다른 돌고래들이 이 행동을 모방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해양포유류가 야생에서 서로에게 도구 사용법을 알려준다는 증거다. 즉 그들이 문화를 가졌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

바다에는 파도 소리와 새가 우는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고래가 고래를 부르는 소리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다. 바닷속은 수많은 소리들의 창고다. 고래들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듣는다. 고래들의 뇌 속에서 음향을 담당하는 부분은 인간의 것보다 10배 이상이나 된다. 그만큼 소리의 감지가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닦달하기의 명수’인 인간은 이런 사실을 섬세하게 고려할 여유가 없다. 폐수만 바다에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해안 개발, 선박 운송, 석유 탐사에 따르는 엄청난 소음을 바다에 쏟아 붓는다. 소리를 이용해 해저 공간을 인식하고 먹이를 찾는 고래들에게 음향 스모그는 심각한 문제다. (바다에 가서는 기침도 조심스럽게 할 일이다.) 남김없이 바닥을 훑고 지나가며 먹이를 싹쓸이 해가는 해저저인망 사용도 문제. (고래들이 펄펄 뛰는 건강한 바다를 볼 수 있으려면 인간의 먹이를 조금 양보해도 되지 않을는지.)

딱딱한 이론을 들먹이고 시시콜콜 그 증거를 대느라 여유가 없는 남성적 글쓰기와는 달리 서사와 이론을 여유롭게 버무리는 엘린 켈지의 여성적 글쓰기는 고래라는 대상을 부드럽고 유머스럽게 조망한다. 엘린 켈지와 함께 망망대해와 심해를 고래의 폐활량을 빌어 떠돌아 다녀보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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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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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는 상처의 기록, 트라우마 그 자체다.


이석원은 어렸을 때부터 억척스런 엄마 때문에 많이 시달렸던 듯하다. 어린아이를 학원을 일곱 개씩이나 보내고,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했던 파시스트 엄마! 끔찍하다. 엄마가 아니라 트라우마의 인큐베이터다.


책 속에서 이석원은 엄마와 화해하고 싶어하는 제스쳐를 보인다. 그러나 섣부른 화해는 금물이다. 그러나 산문집이란 장르에서 깊은 화해를 기대하긴 어렵다. 이건 대중적 산문집이다. 어떻든 그의 화해는 깊지 않다. 오히려 그의 화해의 이면에는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어하는 의지가 읽힌다. 그 단적인 징표가 책의 표지다. 책의 표지는 샛노랗다. 더구나 책의 표지는 옷을 만드는 섬유재질이다. 책이 노란 옷을 입은 격이다. 왜 이석원은 책에 노랑 옷을 입혔을까?


단서는 책의 내용 안에 있다.


미신을 신봉하던 엄마는 칠선녀가 말하더라면서 아들에게 멸망의 색깔인 노란색 옷을 입히지 말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부적도 칠선녀의 충고도 모두 쓸모없이 집안은 한마디로 ‘개꼴’이 된 모양이다. 네 명의 자식들 중 세 명이 이혼하고, 부모님 사업은 실패하고, 이석원은 몹쓸병에 걸리고.......


하여 엄마는 부적과 점이 다 쓸모없었다며 성당에라도 다녀야겠다고 푸념을 했던 모양인데... 이 대목에서 이석원은 다시 엄마를 심리적으로 응원한다. 왜일까?


적이 쓰러지면 내 적개심은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똥파리>에서의 주인공이 죽어가는 아버지를 들쳐업고 울부짖을 때의 심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복수를 위해 살았는데 적이 쓰러지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이석원은 나는 앞으로 다시는 노란옷을 입지 않기로 했다. 그 외에도 엄마가 지키라는 것은 뭐든 토달지 않고 따르기로 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이석원의 트릭이다. 그는 책의 표지에 노란옷을 입혀놓고 있다. 책 표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엄마 나보고 노란 옷 입지 말라고, 그건 엄마의 착각이었고, 칠선녀의 착각이었다고. 나는 금기에 도전할 만큼 이렇게 성장했다고, 더 이상 엄마 말에 고분고분하는 마마보이가 아니라고.


노란색 표지는 이석원이 엄마를 벗어났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세월에 그의 상처가 아물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엄마를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럴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엄마를 벗어나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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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10-01-11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따로 없는 스토리인데요.

hat in the cat 2021-01-12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2인조 가족 카르페디엠 17
샤일라 오흐 지음, 신홍민 옮김 / 양철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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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주눅 들지 않는 2인조 가족
2인조 가족/샤일라 오호/양철북

샤일라 오호의 소설, <2인조 가족>은 구질구질한 궁핍의 이야기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은 가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활달하고 씩씩하고 꿋꿋하다. 주인공 야나는 "예측불가의 괴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사춘기 소녀 야나는 남자친구와의 근사한 데이트를 상상하고 복권에라도 당첨되어 좋은 옷도 사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꿈꾼다. 그러나 야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스타일을 챙기기에는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아냐가 누군가. 가난 때문에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할 말도 못하는 소녀가 아니다. 할아버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한술 더 뜨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 같다. 거짓말 9단에 사람들이 내다버리는 철학책에서 얻은 인문학적 지식도 보통은 아니다. 나잇살도 지긋하니 체면 같은 것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이 발랄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망측한 발언들은 망측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적이다. 그 나이쯤 먹으면 무게를 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감도 없고, 체면치레 같은 것은 약에 쓸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손녀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시대보다 몇 광년은 앞서가는 삶을 살고 있는 노인네다. (이 노인네의 작중 발언을 야곰야곰 음미해 보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큰 재미중의 하나다.)
 

왜 사냐는 아냐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나는 화려하게 꾸며 입고, 인생에 만족하고, 배터지게 쳐먹고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안이 되어 주려고 살고 있어. 내가 두뇌가 되어 그런 무리 대신 생각을 해주는 거지.” 맞다. 이 노인네의 사는 방식은 우리네 뻔한 삶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먼저 이 노인네, 겁이 없다. 악착같이 벌어 조금이라도 비축해두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산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우리네 태도를 이 노인네는 맘껏 비웃는다. 아마로 <마시멜로 이야기>를 들먹이며 현재의 주검 위에 미래의 공화국을 세우자는 덜떨어진 성장주의자에게 이 소설의 한 대목을 들려줘도 좋겠다. ”고마워. 인생! 우리가 사는 공간에 정확하게 경계를 그려줘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가방에 심하게 정강이를 차이자 아마도 이런 순간에 할아버지는 아마도 이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상상한 내용이다.   현실의 불운 속에서도 우리는 아냐처럼 얼마든지 유용한 격언을 발명해낼 수 있다. 그 격언은 불우를 견딜 수 있는 포스와 유머를 만들어준다. 이 소설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둘째, 솔직하다. 마음이 시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거짓말도 사양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분증의 출생년도를 1799년으로 위조해놓고, 경찰에게도 자신이 실제로 1799년이라고 부득부득 우긴다. 미칠 일은 옆에서 그녀의 손녀 아냐까지 가세해 같이 우긴다는 거다. (세상은 인민들에게 상식을 요구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이런 무뎁뽀 인민들이 한 둘이 있어주어서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귀여운 몰상식 만세! 한번 놀아보자는 유희정신으로 똘똘 뭉쳐 자본주의의 성장 이데올로기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그 불온한 상상력 만세!)

셋째, 이 노인네가 원하는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삶이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고 자고 싶으면 자는 삶이지, 누가 자란다고 해서 자는 삶이 아니다. 따로 정해져 있는 취침시간에 잠드는 그런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은 양로원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이 노인네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그는 양로원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엘 가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판사들을 위해 멋진 일장연설까지 준비한다. 상식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멋지게 한방 먹일 태세다. (독자들은 이 노인네가 상식의 세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한방을 먹이느냐에 끊임없이 주목하게 된다.)
 

어떻든 이 노인네는 자본주의의 생산원칙이 강요하는 방식에 고분고분할 마음이 애시당초 없다. 그는 오늘 반드시 해야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는 원칙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애초부터 다르게 살아보기로 아주 작정을 한 노인이다. (이 노인네가 젊어서도 이런 삶의 원칙을 고수했는지는 의문이다. 설령 이 노인네가 젊어서는 체제에 고분고분했다 할지라도 늙어서라도 이런 변칙의 삶을 산다고 해서 주착이니 어쩌니 토를 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늙어서라도 제 의지와 원칙대로 살기란 어디 쉬운 일인가. 박수를 보낼 일이지 비난을 보낼 일이 아니다.)

넷째, 이 노인네 말빨이 장난이 아니다. 그의 말빨은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쓰레기 철학책에서 얻은 오랜 내공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그의 발언에 철학적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예리한 직관, 시적인 통찰이 있다. 자기가 얼마나 슬퍼 보이냐는 손녀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 네가 슬픈 건, 멍청한 송아지이기 때문이야. 송아지들은 눈이 슬프거든” 슬픔은 생활의 조건 같은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예 한편의 시를 쓰고 있다.
 

이 노인네와 아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꼭 피가 섞여야 가족이라는 것은 아주 편협하고 옹색한 가족주의다. 가족은 서로 품고 이해하는 나눔과 공감의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아냐와 할아버지는 훌륭한 ‘2인조 가족’이다. 피는 한 방울도 섞지 않았지만 노인의 기질은 그대로 아냐에게 유전된다.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들 수 있는 정신, 바로 그것이 사람을 하늘로 여기는 인문정신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어지간한 삶의 비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삶을 공중에 살짝 띄워보겠다는 유머정신이기도 하다. 유머정신이란 현실의 질서를 뒤틀어보겠다는 반역의 정신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가 바로 아냐다. 똑똑하고 건방지지만 꽤나 사색적이고 문학적이다. 게다가 살짝 염치가 없기까지 하다. 자신의 체스선생이 그녀를 초대해 약간의 과잉 제스쳐(?)를 보이자 아냐는 그를 밀치고 집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런 정신없는 비극의 와중에서도 생의 식탁에서 닭고기를 낚아내어 빼어나올 수 있는 담대함이 아냐에겐 있다. 아냐는 그런 점에서 얼빠진 정신주의자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 배고픔의 실체가 뭔지를 똑똑하게 아는 아이다. 그런 아이의 내면, 그런 아이의 유머, 그런 아이의 사랑을 들여다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 쓰러져 가는 임대주택의 지하에 살면서도 자신의 집을 “우리 집은 엄청나게 넓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 집은 세계사에 존재했던 모든 중요한 건축물의 특징을 조금씩은 다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집은 콜로세움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베니스와 제노바 공화국 총독 관저처럼 천장이 높고, 발할라 궁전만큼이나 황량하고, 도시 변두리와 주택가처럼 황폐하고 왕의 무덤처럼 서늘하고 음침했다.”라고 묘사할 수 있는 여유는 칭찬해줄 만하다. 
  

대체 이런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최소한의 의식주와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유럽식 사회보장제도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가난을 궁상맞게 연출하지 않아서 좋다. 가난해도 철학을 알고 시를 알고 웃음을 안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모든 여유를 부릴 줄 안다. 심지어는 양로원에서조차 아냐의 할아버지는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는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내가 실없는 소리를 잘 하잖아요. 내가 죽긴 왜 죽어요? 정신은 어디에서든 자유로워요. 그리고 여기는 때 되면 어김없이 밥이 나오고요.” 비럭질을 해먹어도 할 말이 있다는, 그 모습이 참으로 늠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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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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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멋진 캐릭터를 만났다.
교텐!
비정하면서도 따스하고 냉혹하면서도 마일드하다.


그가 아이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훅 내뿜는다.
건방진 아이는 따진다.
“어린이 앞에서 담배를 삼간다거나, 피우고 싶어도 조금 참아주는 배려 같은 건 없나요?”
그는 답한다.
“없는데” 그리고 덧붙인다.
“아름다운 폐를 연기로 더럽혀라, 소년이여. 그게 산다는 것이란다.”


그는 친구, 다다가 운영하는 심부름집에 빌붙어 산다.
가끔 일이 떨어질 때, 그는 특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주먹으로 코를 가격하거나 벽을 머리로 들이박는 자해 또는 가해의 방식으로.
그러나 그는 따스한 남자다.
어쩜 저리도 쿨할 수 있을까.
어떤 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교텐역에 오다리기조를 내세우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본 최고의 섹시남을 교텐역에?
나는 거의 질투를 느끼듯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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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조르쥬 깡길렘 / 인간사랑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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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쥬 깡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인간사랑)은 읽은 지 10년이 넘었다. 다시 펼쳐보니 무수한 밑줄이 그어져 있다. 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에 대한 집요한 탐구. 푸코의 권력에 대한 일생의 탐구가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권력에 대한 사랑의 바닥에는 권력을 남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 있다는 발레리의 말처럼, 건강에 주어지는 가치의 바닥에는 건강을 가능한 남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깔려 있다.

건강은 자신의 육체를 가장 적게 의식하는 상태이다.

위궤양의 본질은 위산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가 스스로를 소화시키는다는 데 있다.

인간의 생리학은 다양한 공격을 만들어내는 문화적 상황에 처한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이다. 평온하고, 게으르고 심리적으로 무관심한 노자나 장자류의 인간들에 대한 생리학이 아니다. 전자와 후자중 어떤 집단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생리학의 성과는 달라진다. 객관적으로 엄격해야 할 생리학마저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물며 인문학에서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복잡하긴 해도 충분히 즐길만한 책이다. 오락의 대상이 항상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베베 꼬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추리탐정소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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