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의 370페이지는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간과해버렸을 귀중한 정보 하나를 소개한다. “유럽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은 단연 소피아에 모여 있었다.” 모름지기 독서가 왜 중요한 일인지를 이 페이지만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주체할 수 없는 남성호르몬의 소유자인 빌 브라이슨의 책은 알렉산더 페인의 귀엽고 깜찍한 영화 <사이드 웨이>를 생각나게 한다. 어떻게 하면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침대 속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에 골몰하는 이 속물들의 캐릭터들에게 너그러운 애정을 갖도록 만드는 알렉산더 페인의 연출력은 절묘했다. 허접하고 구차스런 욕망을 나무라지 않고, 사는 게 뭐 그런 거 아니야 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연출가의 시선은 따스했다. 어쨌거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볼따구를 꼬집어 주고싶은 영화였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더구나 수시로 웃긴다. 나는 오직 한번이라도 더 웃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세상은 날마다 금요일은 아니지』에서 살인적인 유머를 선보였던 호어스트 에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근엄하게 시치미 떼며 사람 웃겨준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웃기는 작자들이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뭣보다 대한민국은 따지는 게 많은 나라다. 주자학적 전통은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듯하고, 군번, 학번 따지는 서열주의 문화도 엄존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벌떼처럼 날아오는 댓글이 장난이 아닌 나라다. 더구나 이념적 경직성은 또 어떤가. 스탈린 시대에 버금간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다가는 생매장시켜버리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을지도 모르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에 빌 브라이슨이 태어나지 않은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런 일이다.

화려한 수사학으로 센티멘탈리즘을 교묘하게 위장하는 문인들의 여행기는 재미가 떨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중력이란 중력은 모두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한 도저한 자의식, 이런 거 이제는 부담스럽다. 그저 가볍게 빌 브라이슨을 따라가 ‘내 안의 히피를 일깨우는’ 곳이라는 암스테르담에 머물고 싶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빌 브라이슨은 이렇게 압축하고 있지 않던가. “네덜란드 맥주를 손에 들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창 밖의 광경을 보면서 이 큰 도시를 아름다운 운하와 쾌활한 창녀들, 풍부한 마약으로 채우다니 네덜란드인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라고. 불손하고 삐딱할뿐더러 무뎁뽀이기까지 하지만 그러기에 베시시 입꼬리를 귀에 걸리게 한다.

코펜하겐의 매력을 설명할 때도 빌 브라이슨은 자기식의 유머를 잃지 않는다. “코펜하겐은 또한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사무실 여직원들이 점심시간에 나와 시립공원에서 상의를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유일한 도시다. 누가 뭐래 해도 이 점만으로도 나는 매년 코펜하겐을 유럽의 문화 도시로 선택한다.”라고. 이런 고급정보를 독자들과 공유할 정도로 빌 브라이슨은 너그럽다. 이런 정보는 어떤가. “기억해두자. 로마에서 줄을 설 때는 끼어드는 사람을 막기 위한 곡괭이가 필요하다!”

이 수다스런 불평꾼의 입이 갑자기 시인의 그것처럼 우아해지는 도시가 있다. 이탈리아의 소렌토와 카프리가 그곳이다. 빌 브라이슨의 입을 거친 투명한 햇살과 수려한 풍광에 궁둥이가 들썩인다. 마이너스 통장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코펜하겐의 미녀들은 하루하루 늙어가지만 새로운 미녀들은 자꾸자꾸 태어나는 법이다. 내 눈으로 코펜하겐의 매력을 지켜보기 위해서 돈 버는 일에도 조금 더 신경 쓸 일이겠다.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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