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이해
마샬 맥루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캐나다 출신의 미디어 비평학자인 마샬 맥루한은 '인간의 확장(Extension of Man)'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미디어의 이해』를 통해서 “모든 미디어는 인간이 지닌 재능의 심리적, 물리적 확장이다. 바퀴는 발의 확장이다. 책은 눈의 확장이다. 옷은 피부의 확장이다. 전자회로는 중추신경의 확장이다.”라고 말한다. 천체망원경은 토성의 띠를 관찰할 수 있게 해주고, 전자현미경은 극미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모든 도구는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감각의 확장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 오감을 이용해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도구[미디어]의 발명으로 오감 사이에는 균형이 깨진다. 인쇄기와 같은 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의 의사소통을 시각 하나에 의존하게 만들고, 라디오의 등장으로 인간은 청각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형태를 변화시킨다. 가령, 표음문자인 알파벳이라는 미디어의 발명은 입과 귀에 의존하던 구어적 인간을 눈에 의존하는 활자적 인간으로 변화시켰다. 미디어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맥루한은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인류 역사를 4단계로 구분한다. 직접적인 언어에 의해 정보 교류가 이뤄지던 구전(口傳)시대, 한자나 알파벳의 등장 이후 전개되는 문자시대, 15세기 구텐베르크 활판인쇄술 이후의 인쇄시대, 그리고 20세기 전기매체 시대가 그것이다.

  입으로 말하는 구전시대에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족민들은 모두 비슷한 지식을 향유했다. 따라서 구전시대에서는 개인주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자가 생겨나면서는 양상이 달라진다. 시각적 인식을 중요시하는 문자 미디어는 인간을 신체적 접촉, 즉각적 반응 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문자는 인간을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으로 변모시켰다. 문자로 씌어진 글줄을 따라서 내용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순차적이고, 선형적인 사고에 점차 익숙해졌다. 사람들이 말을 통해서 타인과 직접 대화하기보다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족사회가 와해하는 탈부족화 현상도 나타났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문자문화는 폭발적으로 팽창된다. 독서를 통해서 혼자서 읽고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인간이 생겨났고, 분석적, 순차적, 단계적 공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인쇄는 조립라인과 산업사회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또한 인쇄물들이 퍼져감에 따라 지방어들이 하나의 모국어로 통합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주의가 탄생되었다.

  19세기말 전신의 발명과 함께 인쇄문화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를 두고 맥루한은 ‘마르코니의 전신이 구텐베르크의 은하를 침식’했다고 표현한다. 텔레비전이 시민들의 건전한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는 ‘바보상자’라는 비판론자들도 있지만 맥루한은 텔레비전의 긍정적 가능성에 주목한다. 텔레비전은 거의 모든 감각기관의 연장이어서 시각 위주였던 문자시대의 과도한 분석적 사고, 개인주의, 합리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형으로 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고 맥루한은 생각했다. 게다가 텔레비전, 전신, 전화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전 세계, 우주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연장시켜 주어 전지구적 차원의 연대가 가능하게 했다. 텔레비전, 전신, 전화 등 미디어로 통합된 세계를 맥루한은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 명명한다.


  이처럼 인류의 삶은 미디어를 통해서 입수하는 정보 형태에 따라서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 맥루한의 주장이다. 그런데 맥루한은 미디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형태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은 그 지면이 모자이크적, 불연속적이므로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도 기사의 내용에 관계없이 세계를 모자이크적, 불연속적 방식으로 인지한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단순히 의미의 중립적인 전달자가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형성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어구가 맥루한만큼이나 유명해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문장이다. 이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보다 미디어의 특성이 우리 사회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해서 기존의 미디어가 당장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가 말을 몰아내지 못했고, 전화가 등장했다고 해서 편지가 사라진 것도 아니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책과 신문을 대치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는 사람들의 의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가령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경우와 이메일을 쓰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이메일로 편지를 쓰는 경우는 편지 내용이 가볍게 안부를 묻는 정도에서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편지지에 직접 글씨로 편지를 쓸 때는 그 내용이 단순히 안부를 묻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메일이냐 편지냐에 따라서, 즉 미디어에 따라서 메시지의 내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맥루한은 모든 미디어를 매체의 정세도(精細度:정보량)와 수용자의 참여도에 따라서 핫(hot)미디어와 쿨(cool)미디어로 나눈다. 정세도가 높아서 수용자의 참여도가 낮은 것은 핫미디어, 반대로 정세도가 낮아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쿨미디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라디오와 같은 '핫 미디어'와 전화와 같은'쿨 미디어, 혹은 또는 영화와 같은 핫 미디어와  텔레비전과 같은 쿨미디어가 이렇게 구별되는 데는 근본원리가 있다. 핫 미디어란 단일 감각을 높은 정세도(精細度)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높은 정세도라는 것은, 자료가 충족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테면 사진은 시각적으로 높은 정세도를 갖는다. 만화는 극히 적은 시각적 정보가 제시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낮은 정세도를 갖는다. 전화는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기 때문에 쿨미디어, 혹은 낮은 정세도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이미 시시콜콜히 다 말해버렸기 때문에 수신자가 참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라디오나 신문과 같은 핫미디어의 특성이다. 반면 쿨미디어는 직관적이며 감성적으로 관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정보의 양이 빈약하며 불분명하여 수용자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신문은 책이나 여타의 인쇄미디어와는 달리 빠르게 정보를 전달한다. 책은 한 사람의 고백형식이지만 신문은 집단적 고백형식이다. 신문은 독자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개입시킨다. 신문은 텔레비전처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등 서로 전혀 관계가 없는 기사내용으로 구성되어 모자이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맥루한은 “서적지향형의 사람들이 신문이 사회의 더러운 이면을 언제까지나 기사로 사고 있다고 개탄하는 것도 신문의 집합적인 모자이크 형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맥루한의 주장대로 전자미디어는 인간의 인지 능력, 사회관계 등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기기가 대중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기술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첨단의 정보테크놀로지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미디어의 이해』는 책이 처음 출간된 1964년 당시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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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water 2008-01-1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저 책, 한글을 번역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